[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77)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77)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8.15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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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의 행동거지로 미루어 서방이란 작자도 믿을 수가 없다
장인장모의 고까운 한마디에 발끈하여 돌아섰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악이란 것은 헛간의 먼지처럼 쌓일 것이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소문만복래(笑門萬福來)라고 웃음이 꿀처럼 달달한 집안으로 만복이 깃들건만 언제부턴가 집안으로 웃음기가 자취를 감추었다. 웃음기만 가시었다면 그나마 다행이다 그 빈자리를 기다렸다는 듯 찔끔거리는 애달픈 울음이 대신하고 있다. 조석으로 눈만 마주치기라도 하면 이유를 불분, 먼저 무엇부터가 섭섭하고 서러운지 울기부터 한다. 친정으로 쫓아 보낸 며느리가 죽도록 보고 싶다며 눈물바람이다. 들어오던 복도 사정을 알고는 엇~ 뜨거워라 싶어 줄행랑을 칠판이다. 이럴 바에는 어째 소박을 놓아 친정으로 보냈냐고 따져 묻고 싶어도 먼저 눈가로 눈물이 그렁그렁하는 데는 나오던 말조차 대못을 박듯 막혀버린다. 그런 한편으로 지난번 아들은 어째서 빈손으로 돌아왔나 싶었다.

며느리의 입장에서 생각해 볼 때 그것은 어쩌면 당연한 일이라 여겼다. 시어머니에게 소박을 맞았는데 어떤 증표도 없이 철딱서니 없는 서방만 혼자서 덜렁덜렁 왔다. 얼싸 좋다고 따라나설 만도 하지만 위험천만한 일이다. 평소의 행동거지로 미루어 서방이란 작자도 믿을 수가 없다. 처음에는 잊지 않고 찾아줘서 고맙기 짝이 없고 한없이 반가웠지만 달리 생각하면 그것은 아니라는 생각에 덜렁 따라나설 수는 없다 여겼을 것이다.

소설 삼국지에서 관도대전 중 안량과 문추의 수급을 벤 관우가 유비의 소식을 접하고 선 오관(조조진영의 다섯 관문)을 돌파할 때였다. 관문을 지키는 장수를 모조리 도륙내고는 마지막 성문을 나서는 찰라 뒤늦게 소식을 접한 조조가 급하게 달려와 붉은색 전포를 전할 때였다. 다른 장수 같았으면 하마(下馬)는 물론 감격에 겨워 정중하게 예를 표한 뒤 양손을 떠 받혀 받았을 것이다. 하지만 관우는 적장을 대하 듯 적토마 위에 덩그렇게 앉은 채로 “승상 감사하오다”하는 한마디를 건네곤 청룡언월도를 앞으로 길게 내밀어 창날 끝으로 받아서는 조조를 노려보며 몸에 둘렀다. 삼척동자의 눈에도 한없이 거슬리다 못해 한껏 오만한 행동이다. 그런 관우를 보는 조조진영의 신료들과 장수는 물로 일개 병사에 이르기까지 한 목소리로 분에 겨워 발끈했다. 저런 무례한 자는 이 자리에서 당장 응징해야 한다며 길길이 날뛴다. 하지만 조조는 일국의 승상답게, 삼국지를 들어 영웅답게 태연작약이다. 관우의 입장으로 볼 때 작금의 상황이 바람 앞의 촛불 같은 형세라 어쩔 수 없었을 것이라는 것이다. 비록 전장은 아니지만 사방이 적으로 둘러싸였다. 게다가 관우는 지금 혼자 몸이 아니라 유비의 두 부인(감부인과 미부인)을 호송하는 중이다. 따라서 혼자의 목숨이라면 초개같이 버릴 수도 있겠지만 두 형수의 목숨까지 걸린 일이라 함부로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목하(目下)누란의 위기를 타계하려면 일일이 예를 표할 수 없는 입장이라는 것이다.

개개인의 생각과 입장은 각기 다르겠지만 며느리도 이와 같은 가련한 처지었다는 생각이 들었다. 시집이라고 들어가 보았자 반겨주는 사람도 없거니와 말 한마디 따뜻하게 건네줄 내 편이 없다는 것이다. 자신을 들어 눈에 든 가시로 여겨는 것도 모자라 호시탐탐, 속을 알 수 없는 시어머니는 여전히 두 눈 시퍼렇게 건재하다. 피를 빨고 살을 파먹는 두억시니(모질고 사악한 귀신의 하나)같은 악다구니의 모진 여인이 독사 모양 독을 품고는 똬리를 틀었다. 형세가 적병들로 둘러싸여 사면초가에 빠진 관우와 다를 바가 없다는 것이다. 버러지 같고 개똥밭에 구르는 생일지라도 삶을 영위 해야만 에오라지 아들을 지켜낼 수 있다 여겼을 것이다. 자신의 목숨과 고통쯤은 도외시하여 이미 문제가 아니었다. 천방지축의 서방이 가마를 대동하여 왔지만 시부모의 어떠한 언질도 증표도 없다. 따라서 깊이 생각할 것도 없었을 것이다.

전후 사정을 들어 찬찬히 형세를 따져보자 나오는 것은 한숨뿐이다. 또 한편으로 생각건대 며느리의 행동이 야속하여 이해할 수가 없었다. 평소의 성품으로 보아 현명하고 지혜로운 며느리다. 시집에서 가마를 대동하여 서방이 나섰다면 만사를 제쳐 지옥불로 뛰어들더라도 따라나설 며느리다. 그런데 어째서 따라나질 않았을까? 두 번 세 번 생각하건데 이 모든 사달의 원인은 며느리보다는 아들에게 있다 여겼다. 평소 말주변도 없을 뿐더러 늘푼수(‘늘품’의 방언으로 앞으로 좋게 발전할 가능성이 있는 품성이나 품질)도 없어 앞뒤가 꽉 막힌 아들이다. 게다가 어릴 적부터 최고다. 최고다 떠 받들려서 커온 탓에 이기심은 물론 아집과 고집이 그 누구보다도 만만찮다. 안 봐도 삼천리인양 장인장모의 고까운 한마디에 발끈하여 돌아섰을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금에 와서 아들을 불러 앉혀 시시콜콜 따져서 훈계한들 무슨 소용이 있으랴! 자식의 허물이 곧 부모의 허물이고 나아가 집안의 허물임은 세상의 이치다. 일의 경중과 헝클어질 대로 헝클어진 실타래를 본래대로 풀자면 시아버지 자신이 나서지 않으면 성사의 가능성이 희박해 보였다. 가마를 대동하고 아들을 앞에 세운 다음 시어머니의 부름이 있어다는 징표가 있어야 많이 비로소 가능하다 여겼다.

조선시대를 통틀어 가장 어질고 현숙한 왕비를 손에 곱으라면 십중팔구는 숙종의 계비 인현왕후를 첫 손가락에 곱을 것이다. 하지만 인현왕후는 그 후덕하고 인자함을 떠나 폐서인이 되어 사가로 내쳐진 적이 있었다. 후일 인현왕후가 폐비에서 왕비로 복위될 때였다. 영의정과 상선이 어명을 받들어 복위교지에 입궁을 아뢰자 인현왕후는 단박에 거부했다. 이유인 즉 왕은 지어미를 맞는 예를, 왕실은 왕후를 맞는 예를 생략했다는 것이다. 이는 사소한 듯해도 매우 중요하다는 것이다. 일국을 들어 국모의 복위를 두고 어명의 성지라지만 내시 따위가 가지고 온 종이쪼가리 한 장에 오라 가라 할 일이 아니라는 것이다. 복위든 폐비든 그 무엇이든 간에 그에 합당하는 절차의 례(禮)가 있어야 한다는 것이다.

시어머니의 손가락으로부터 금가락지가 빠지는 순간 대충 조건은 갖추어 졌다. 문제는 시아버지 자신이었다. 깊은 생각 끝에 마지막 남은 난제로 시아버지는 자신의 체면치례 따위를 가감하게 벗어던지기로 했다. 집안의 화목을 위하고 오는 복을 받아들이고 잃어버린 웃음을 찾는데 미력하나마 한 집안의 가장으로써 힘을 보태리라 마음먹었다. 만약의 경우 손자만이란 생각에서 마음을 다잡아 반듯이 며느리를 가마에 타워야 한다고 생각했다. 강보에 쌓인 핏덩이 손자와 청상과부나 다름없는 며느리와의 생이별은 있을 수 없다 여겼다. 그럴 바에는 차라리 빈 가마로 돌아와 후일을 기약하는 편이 현명한 판단이란 생각도 들었다. 손자는 비록 친가라 해도 아직은 지각도 없을 뿐더러 조부모는 물론 아비조차도 모른다. 눈만 뜨면 본능에 따라 어미만 찾는다. 어미라고 어찌 다를까? 생살을 도려낸들 어찌 그보다 더 아프고 천만간장이 녹아내리는 듯 아릴까? 밤낮을 그리움에 쌓여 눈물로 세월을 삯일 것이다. 그런 마당에 어찌 한(恨)인들 가슴이 제 집이라 똬리를 틀지 않을까? 악(惡)인들 어찌 싹을 틔워서 자라지 않을 수 있을까? 한이란 것은 겨울철 추녀 끝으로 주렁주렁 매달리는 고드름처럼 자랄 것이며, 악이란 것은 헛간의 먼지처럼 쌓일 것이다. 착하고 선함을 떠나 모자지정의 생이별 앞에는 그 누구라도 그러할 것이다. 훗날 악이 자라 한이 준동하는 과정을 들어 뭇 사람들의 입방아에 오르내리는 전설 한 페이지는 거뜬하다 여겼다. 결코 그래서는 안 된다는 생각에 며칠을 묵어서라도 머리를 조아리는 등 용서를 비는 경우를 대비해서 여벌의 옷도 두 서너 벌 챙겨서 행장에 꾸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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