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81)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81)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9.12 01: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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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핑계 저 핑계를 끌려다 붙여서는 기필코 내쫓으리라 생각한 때문이다
도드라진 머리 뒷부분이 손바닥 안으로 볼록하게 느껴진다
반상의 법도가 뒤집혔다고 길길이 날뛰다 가는 같잖아서 웃을 것만 같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들리는 풍문에 의하면 악녀는 어느 날 온다 간다는 한마디 말 없이 도망을 치듯 집을 떠났다고 한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분에 넘치게 화려한 복장으로 처녀를 불러들일 때는 또 다른 꿍꿍이가 있다는 생각을 마음속으로부터 지울 수가 없었다. 지금의 호강은 일종의 미끼라는 생각이 머릿속에서 떠나질 않는다. 지금껏 겪어온 시어머니의 성품으로 미루어 보아 알토란 같은 내 손자를 받아들이는 구실로 미구에는 처녀 자신을 들어 이 핑계 저 핑계를 끌려다 붙여서는 기필코 내쫓으리라 생각한 때문이다. 이는 숙명처럼 이미 운명으로 정해진 앞날이라 생각한 처녀는 그저 아들의 장래만을 생각하고 있었다. 남바위의 길게 늘어진 자락을 들어 아로새겨진 ‘壽’자의 전통문양 사이사이로 적힌 수복강령충효신희(壽福康寧忠孝信喜)처럼 아들의 앞날을 두고 목숨은 길고, 복이 있고, 건강하고, 평안하고, 나라에는 충성을 다하고, 부모께는 효도, 친구 간에는 믿음이 있으며 날마다 기쁘게 산다면 어미는 노비로, 종으로 산다고 해도 하루가 하루 같이 즐거우리라 생각하고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뼛속까지 미움이 쌓인 찰거머리가 없어진 마당에 시어머니의 구박은 아무것도 아니라 여겼다. 헌 옷 보따리만 않는다면 벙어리 삼 년, 귀머거리 삼 년, 봉사 삼 년도 모자란다면 평생을 들어서 그렇게 있는 듯 없는 듯 일에 파묻혀 살리라 생각했다. 처녀가 복잡한 심사를 아들로 인해 잊고 있을 때 처녀의 어머니가 슬며시 다가와

“애~야!”하고 일깨우듯 부른다. 그제 서야 정신을 차린 처녀는 벌겋게 충혈된 눈으로 어머니의 어깨너머에 선 아버지를 건너다볼 적에 영감이라고 딸내미의 그런 속마음을 어찌 모르겠는가? 하지만 그래도 어쩔 수 없다는 듯 한시바삐 가마에 오르라며 연신 손짓으로 재촉이다. 마지막으로 장모자리가 인진쑥과 보드라운 지푸라기가 반쯤 찬 요강단지를 기마 속 깊숙이 밀어 넣은 것을 끝으로 떠날 채비가 얼추 마무리를 짓는다.

이윽고 온 동네 사람들이 구름처럼 운집하여 지켜보는 가운데 처녀와 아기를 태운 가마가 삽짝을 벗어나 고샅을 돌아 산어귀에 이르는가 싶더니 순식간에 재를 넘어간다. 순풍을 탄 돛단배처럼 미끄러지듯 넘실넘실 재를 넘는다. 가마의 뒤꽁무니를 쫓아 넋을 잃은 듯 마당 한가운데서 마냥 지켜보는 영감의 눈에서 멀어지면 멀어질수록 또렷하다. 콩을 반으로 자르기 위해 사흘 밤낮을 지켜보자 수박만큼 커지듯 확연해진다. 고갯마루에 이르러 잠시 머물던 가마는 야속하게도 봄 안개처럼 아른아른하여 산모퉁이를 감돌아 영영 모습을 감춘다.

아기를 품에 안은 처녀에게 소박이란 단어는 한낱 기우에 지나지 않았다. 그저 혼자 생각일 뿐이었다. 동네 나들이에 아기를 안고, 옷 보따리를 들고 대문 밖만 나서도 가슴이 철렁 내려앉아 부리나케 잡으려 나올 시어머니는 그날 해거름에 대문 밖을 서성거리다가 가마가 돌담을 돌아들자 신발이 벗겨지는 줄도 모르고 달려 나와 맞았다. 곧장 가마를 세운 시어머니는 먼저 가마의 앞문을 들쳐 며느리의 얼굴을 확인하고는 주체하지 못하는 눈물을 철철 흘리며

“애야~ 네가 진정으로 왔구나!”하고는 양손으로 얼굴을 덥석 감싸서 쓰다듬더니

“어째 너는 그새 얼굴이 핼쑥하여 반쪽이고! 어디 아픈 곳이라도 있는 게냐?”하고 묻고는 안쓰럽다는 듯 또 어루만져서 쓰다듬는다.

“아니 예요! 어머님 제가 아프긴요!”

“그럼 그런 다행이 없고...! 그 몸에 어떻게 젖은 잘 나오느냐?”하는 시어머니를 향해 처녀가

“예~ 어머님...!”하는데

“오냐! 조상신이 음덕으로 돌봤습이니라! 장하다 며눌아가야! 그보다도 난 네가 나를 미워해서 지난번처럼 빈 가마로 오면 어쩔 거나 했다. 아니 오면 어쩌나 했다. 어떡할 거나 싶어 걱정이 늘어져서 정성으로 부처님께 소원하고 조상님께 음덕으로 도움을 청했더니 이 늙은이의 소원을 가련타 여겨 너를 보내주셨구나! 이 얼마 만이고? 어디 우리 며느리 얼굴이나 다시 한번 더 보자! 그간 매정한 이 시어미를 두고 원망도 오죽이나 했을 거냐! 아무려면 어떠하라! 네가 이렇게 내 곁으로 오는 것만으로도 나는 세상을 다 가진 기분이란다. 부처님 감사합니다. 조상님 감사합니다”하며 가마 채를 붙잡고는 눈물을 펑펑 쏟는다. 동네 사람들이 기웃거려 시어머니자리가 체통 머리 없이 하며 손가락질을 하든 말든 가마에서 내리는 며느리가 넘어질까 몸종처럼 부축이다.

전도몽상(顚到夢想)으로 주객이 전도되어도 한참이나 잘못된 모양새다. 게다가 처녀가 품 안으로부터 건네는 손자를 왼팔로 받아 안고는 오른손을 이용해서 은근슬쩍 머리 뒷부분부터 쓰다듬어 살핀다. 살살 어루만지자 도드라진 머리 뒷부분이 손바닥 안으로 볼록하게 느껴진다. 순간 시어머니는 속으로 기쁨에 들떠

“오~냐! 오냐! 그~래! 그래! 너야말로 진정한 우리 집안의 핏줄이 확실하구나! 내가 왜 진즉에 왜? 그 생각을 못 했을까? 지금에 들어 가만히 생각해보니 그 녀석의 뒷머리는 널빤지 모양 넓적 했었지! 열 명의 장정이 도둑 한 명 못 잡는다고, 도둑을 맞으려면 개도 안 짖는다고, 집안을 망쪼 낼 귀신이 덮어 씌어도 단단히 씐 모양이다”하더니 와락 품에 안아

“이것아! 내가 네 할미다. 이 할미가 착하디 착해 멀쩡한 네 어미를 두고 몹쓸 짓으로 죄가 많다 보니 이제야 너를 품에 안아보는구나! 이제야 내 너의 얼굴을 마주하여 생시로 보는 구나!”하며 또 눈물바람이다.

그날 밤을 맞아 세상을 다 얻은 듯 밥상머리에 앉은 시어머니는 며느리를 위해 일삼아 생선 가시를 발린다. 작은 가시 하나까지 일일이 발려서는 밥술 위에 얹고서는

“먼 길에 오죽이나 배가 고플까?”하며 많이 먹으란다.

“어머님! 제가...!”하고 거부를 했지만 어림없단다. 그런 한편으로 시어머니는

“애가 워째서 이런다나! 남도 아닌 시에미를 두고! 너는 그저 많이 먹기나 해라! 많이 먹고 어서 몸을 추스려야지!”하는데 밥알이 입안서 모래 알갱이처럼 뱅글뱅글 돌아다니는 기분이다. 그런 한편으로 시어머니의 뜻밖의 호의가 두려고도 무섭다. 신혼 초, 시어머니와 사이가 좋을 때도 이런 경우는 없었다. 99칸의 고루거각은 아닐지라도 넓은 집안 관리에 눈코 뜰 새 없이 부산을 떨다가 삼시 세끼를 찾아 먹는 것 만으로도 행복하다 여겼다. 그때도 시어머니가 생선 가시를 발리는 등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한데 소박을 놓았다 불러들인 첫 밥상을 두고 시어머니가 생선 가시를 일삼아 발리고 있다. 시아버지나 당신의 귀한 아드님을 위한 것이라면 이상할 것도 없다. 하지만 그 상대가 미운털이 단단히 박혔던 며느리다. 동네 똥개가 이 모습을 본다면 반상의 법도가 뒤집혔다고 길길이 날뛰다 가는 같잖아서 웃을 것만 같다. 무안하고 부끄럽고 몸들 바를 몰라 시아버지와 남편을 건너다보지만 호기심 어린 눈으로 일별, 바라다볼 뿐이다. 남의 일인 양 수저만 부지런히 놀릴 뿐이다. 그 와중에도 시어머니는 애써 가시를 발라 놓은 생선 살을 큼지막하게 밥술에 올려서는 빨리 먹으라고 재촉이다.

“어머님 제가...!”하며 숟가락을 받아 들고자 손을 내미는데

“아이고 애야~ 이번 한 번 많은 내가 먹여주고 싶구나! 어서 아~ 하고 입이나 크게 벌려 봐라!”하며 재촉이다. 돌발 행동에 깜짝 놀라 도리도리 고개를 내저어 거부해 보지만 막무가내로 권하는 시어머니의 손길을 벗어날 수는 없었다. 할 수 없이 한입 가득히 물고 왼손과 오른손을 겹쳐서 입을 가린 뒤 우물우물, 수줍게 웃다가는

“어머님 저~는 저~는 이 감당을 어떡하라고요! 죄송해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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