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㉒ 집념과 열정의 억척 농업인 이경재 씨(1)
[꽃 피어날 추억] ㉒ 집념과 열정의 억척 농업인 이경재 씨(1)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08.25 17: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소로 농사를 짓다가 경운기로, 트렉터로, 이앙기로, 벼를 베면서 탈곡하는 콤바인 작업 등 우리나라 기계화 농업 발전의 산 증인의 한 사람인 이경재씨. 아들 딸 사남매 교육을 위하여 한우를 키워보았으나 돈을 벌지는 못 하였다. 비닐하우스에서 사십년 채소를 재배 시장에서 직접 판매하면서 아이들 대학교육을 시켰고 결혼을 시켜 화목한 삶을 살고 있다.
채소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유병길 기자
채소를 재배하는 비닐하우스 밖 놀골에 들깨를 심었다. 유병길 기자

 

1941년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에서 다섯 형제 중 둘 째로 태어난 이경재(81)씨. 그 당시에는 맏아들에 대한 기대와 공부를 많이 시켜 성공하기를 바라는 기대 심리가 대단한 시기였다. 초등학교 6학년 때 형이 중학교 3학년이라 내년에는 중학교, 고등학교를 진학하게 된다. 논 몇 마지기 농사를 지어 고등학교, 중학교 학비를 부담하는 것이 무리라는 것을 알고 경재씨는 아버지를 도와 농사를 짓기로 결심하였다. 자신이 학업을 포기하고 부모님을 도와 농사일을 하여, 형과 동생 세 명은 대학을 졸업하였다.

바로 옆집에 이천리 살고개에 살던 유씨 어른이 이사를 왔다. 몇 년 살다 보니 옆집 둘째 딸이 인물도 좋고 심성이 좋았다. 또 옆집 둘째 아들이 인품이 좋고 농사일을 열심히 하였다. 어른들이 서로가 서로를 잘 아니까 사돈을 하자고 결정하여 옆집에 사는 처녀총각이 결혼하게 되었다. 논 댓 마지기를 상속을 받았다. 동네에 빈집이 없어 시막골 밭에 작은 집을 지어 신혼살림을 시작하였다. 부부는 농사를 지으면서 부모님의 일을 도맡아서 하였다. 시막골 집에서 5년 정도 살았을 때 외서 초등 교사로 있던 이두식 선생이 상주 시내로 이사 가게 되어 그 집을 사서 동네 안으로 이사를 하였다. 아들 딸 사남매가 태어나 키우고 공부 시킬 걱정에 잠이 안 왔단다. 

경재 씨는 우리나라 농업 기계화 발전의 산증인 중의 한 사람이다. 벼농사와 비닐 농사를 같이하는 농업인 중에는 연세가 많이 높은 편이다.

소를 몰아 논과 밭을 갈고 쓰레질하여 손모내기를 하고 밭작물을 파종하였다. 유병길 기자
소를 몰아 모든 농작업을 하였다. 유병길 기자

 

경재 씨는 어릴 때 부터 소를 몰아 논을 갈고 쓰레질을 하고 손 모내기를 하였다.

소가 하던 농사일을 경운기가 다 하였다. 유병길 기자
소가 하던 농사일을 경운기가 하게 되었다. 유병길 기자

 

1970년대 통일벼를 재배하면서 농가소득이 오르자 소를 팔고 경운기를 사서 논을 갈고 로터리를 하여 손 모내기를 하였다. 부모님 일과 남의 일을 도맡아 하여 노임을 벌었고, 통일벼를 길러 매년 논 몇 마지기를 샀다.

이앙기로 기계 모내기를 하였다. 유병길 기자
이앙기로 기계 모내기를 하였다. 유병길 기자

 

80년대 이앙기를 사서 쉬운 모내기를 하면서 남의 논 모내기도 많이 하였다.

경운기보다 작업능률을 높이기 위하여 소형 트렉터를 샀다. 새로운 농기계가 나오면 남보다 먼저 샀다.

벼를 베면서 탈곡하는 콤바인 작업. 유병길 기자
벼를 베면서 탈곡하는 콤바인 작업. 유병길 기자

 

벼 베기와 탈곡을 동시에 하는 비싼 콤바인도 남보다 먼저 사서 남의 벼부터 먼저 베어 주면서 돈을 벌었다. 농협 융자를 받아 새로운 농기계를 사다가 보니, 농협 부채가 쌓여 이자 갚기가 버거웠다. 동네에서 처음으로 한옥을 헐고 시멘트 벽돌로 주택을 신축하였다. 새로운 소득 농업에 대하여 고민을 하게 되었다. 1980년대 못자리용 골주를 꼽고 비닐을 덮어 채소를 조기재배하여 시장에 조금씩 판매하였다.

한우를 사육하였다. 유병길 기자
한우를 사육하였다. 유병길 기자

 

한우를 사육하는 농가가 소득이 높았다. 아래채가 있던 곳에 우사를 짓고 암 송아지 다섯 마리를 넣어 키웠고 송아지를 낳아 판매하여 재미를 보았다. 단기간 비육을 하여 팔면 소득이 높다는 말을 듣고 비싼 송아지 십여 마리를 구입, 비육을 시작하였다. 운이 안 따랐는지 사료 가격이 오르고 한우 값이 떨어져 재미를 못 보았다.

봉강리 동생들 여러 명이 잘사는 농촌을 만들기 위하여 전국 여러 곳의 선진지를 견학하였다. 상주 원예 조합에서 오이를 재배하여 수출하는것을 보고, 오이재배를 결심한 동생들은 회원 가입을 하고 대나무로 비닐하우스를 지어 오이 농사를 짓기 시작하였다.

파와 호박잎을 따기위한 호박재배. 유병길 기자
파. 호박잎을 따기위하여 호박을 재배하고 있다. 유병길 기자

 

비닐 터널 채소 재배를 하고있던  경재 씨는 거금을 들여 쇠 파이프 비닐하우스 3동을 지었다. 봄에는 대파 쪽파 상추 얼갈이배추 열무를 재배하여 팔고, 여름에는 상추 파 호박잎 고구마 줄기 아욱 풋고추 들깨순 등을 팔고, 가을에는 파 상추 양대 고구마 익은호박 팥  찹쌀 풋고추 등을 팔고, 겨울에는 상추 대파 쪽파 배추 무 찹쌀 등을 팔았다. 오후부터 저녁 늦게까지 채소를 손질하고 작은 단으로 묶어 새벽에 트럭에 싣고 부인과 같이 상주 시장, 점촌 시장에 가서 판매를 하였다. 일 년이 지나자 대형 식당이 단골이 되어 수시로 전화를 하면 채소를 가져다주었다.

90년 여름 태풍으로 비닐하우스 3동이 바람에 솟구쳐 허물어졌다. 오이를 재배하는 대재, 재명, 광식 등 동생들의 도움으로 구부러진 골주를 펴서 하우스를 다시 짓게 되어 고마웠단다. 채소가 부족하여 하우스 4동을 더 지어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새벽부터 저녁 늦게까지 억척스럽게 지금까지 사십 년째 채소 농사를 짓고 있다. 하우스와 하우스 사이 공간에도 들깨, 땅콩, 참깨 등을 심어 놀리는 땅이 없게 농사를 짓고 있다.

요즘은 코로나19 때문에 식당이 안 되어 채소도 적게 팔리고, 3년 전 부인이 협착증 시술을 받아 일할 수가 없단다. 상주 시장은 안 가고 혼자 점촌 장날만 가서 채소를 팔고 있다.

청량고추 하우스에서 늘어진 가지에 줄을 메어 들어 올린다. 유병길 기자
청양 고추 하우스에서 늘어진 가지에 줄을 메어 들어 올리는 경재 씨. 유병길 기자

 

비닐하우스 농사 사십 년을 짓다보니 자신과 같이 단동 하우스 골주도 약해졌단다. 

“내가 이십 년만 젊다면 연동 하우스를 지어 트렉터로 경운, 정지, 비닐피복 등 모든 작업을 쉽게하는 농사를 지어보고 싶다.”

이경재 씨의 푸념 섞인 말이다. 사십 년을 비닐하우스 안에서 힘든 농사를 지었으나, 환경이 좋은 연동하우스에서 더 농사하고 싶다는 억척 농부다. 평생 한 곳을 향해 살아가는 집념과 열정이 오늘따라 한없이 부럽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