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⑲ 넝쿨째 굴러온 박
[꽃 피어날 추억] ⑲ 넝쿨째 굴러온 박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08.02 17: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박을 재배하여 박 바가지를 만들어 그릇으로 사용하였다.
장마철에 박잎으로 전을 부쳤고, 생박 회를 만들었고, 박나물을 만들어 먹었다.
생박을 말려 조청에 졸여 박 정과를 만들었다.
푸른 박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유병길 기자
푸른 박이 무럭무럭 자라고 있다. 유병길 기자

1950년~ 6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에서는 집 집마다 호박구덩이 열 개를 파고 퇴비를 넣고 호박을 심는다면, 박은 한두 구덩이를 파고 박을 심었다. 박은 호박만큼 먹거리를 제공하지는 못했지만, 그릇이 부족하였던 시절의 박 바가지는 생활을 편리하게 하였다. 박도 호박같이 몰래몰래 넝쿨이 기어올라 초가지붕을 덮으면 흰 꽃이 피었다.

박꽃과 어린 박이 자라는 모습. 유병길 기자
박꽃과 어린 박이 자라는 모습. 유병길 기자

뜨거운 여름 해가 서산에 기울기 시작하면 소복 입은 여인이 수줍은 듯 흰 꽃을 피우고 내려오는 이슬을 한 모금이라도 더 많이 받으려는 듯 긴 고개를 내밀었다. 친구나 이웃집에 모여서 십자수를 놓거나 삼을 삼던 여인들은 비가 오는 날에도 박꽃이 피기 시작하면 저녁을 준비할 때가 되었음을 알고 집으로 돌아갔다. 시계가 흔하지 않았던 그때 박꽃은 시계 역할도 하였다. 아침 해가 뜨면 박꽃은 흰 꽃잎을 오거리고 깊은 낮잠에 빠져들었다.

밤알만 한 박이 달려서 아이들 머리만큼 크면 박 모양을 예쁘게 만들기 위하여 짚으로 받침을 만들어 박 밑에 받쳐주었다. 달 밝은 밤에 달빛에 검은 초가지붕을 환하게 밝히는 흰 박꽃과 크고 둥근 하얀 박을 보노라면 왠지 허전함을 느끼게 되었다. 시골집 골목에서는 어디를 가더라도 쉽게 볼 수 있는 풍경인데 왜 그런 마음의 동요가 일어났을까?

박잎으로 전을 부치면 모양과 맛이 배추전과 비슷하다. 유병길 기자
박잎으로 전을 부치면 모양과 맛이 배추전과 비슷하다. 유병길 기자

장마가 계속되는 여름에 전을 부칠 만한 배추가 없을 때 억세지 않은 박잎을 따서 전을 부쳤다. 배추전과 구분을 못 할 만큼 맛과 모양이 비슷하였다.

그때는 바가지를 생산할 목적으로 박을 심었기에 모양이 삐뚤어진 박은 익기 전에 따서 껍질을 벗기고 속을 파내고 삶거나 볶아서 박나물을 만들었다. 쓴맛이 심한 박은 반찬을 하여도 먹기가 힘들어 박을 따면 쓴맛이 나는가 맛을 보았다.

박잎 전과 생박 회. 유병길 기자
박잎 전과 생박 회. 유병길 기자

생 박을 채 썰거나 납작납작하게 쓸어 초장에 묻혀 박 회를 만들어 반찬을 하거나 막걸리 안주로 먹기도 하였다.

첫서리가 내릴 즈음 박을 따서 바늘로 찔러 완전히 익은 박과 익지 않은 박을 가렸다. 바늘이 들어가는 익지 않은 박은 오그라들어 바가지를 만들 수 없어 잘라서 소를 먹였다.

그중에도 익지 않은 연한 박은 머리 부분을 잘라 속을 파내고 껍질을 벗기고, 일정한 두께로 끊어지지 않게 오려서 빨랫줄에 늘어 말리고 일정 간격으로 잘라 소쿠리에 담아 보관하였다가 설 명절이나 길흉사시에 조청에 졸여 정과(과자)를 만들었다. 수십 년 전에 보았든 달고 쫄깃쫄깃한 정과 맛! 그때 그 맛은 아직도 입가에 남아 있는 듯하단다.

봄에는 찹쌀풀을 먹인 가죽이, 가을에는 생 박을 오린 박이 빨랫줄의 단골이었다.

예전에 많이 사용하였던 박 바가지. 유병길 기자
예전에 많이 사용하였던 박 바가지. 유병길 기자

잘 익은 박은 박 꼭지를 바짝 자르고 흥부와 놀부전에서 박을 켜는 것과 같이 톱날이 가는 톱으로 위에서 아래로 잘라 속은 빼내고 큰솥에 여러 개를 넣고 삶아서 건져냈다. 박이 식으면 헌 숟가락으로 겉껍질과 허물 허물한 속을 완전히 파내고 엎어서 말렸다. 바짝 마르면 가볍고 단단한 박 바가지가 되었다.

호박씨는 호박 속에 낱개로 박혀 있는데, 박씨는 단단한 씨 집 속에 박혀 있어 씨앗을 보관할 때는 씨 집 전체를 말려서 보관하였다. 자연산 박 바가지는 놋그릇, 사기그릇과 같이 밥그릇, 국그릇이 되어 밥이나 국을 담아 먹었고, 나물과 밥을 넣고 비벼서 여럿이 같이 먹기도 하였다. 물을 퍼먹는 물바가지가 되었고, 모든 것을 담아 두는 그릇이 되었으며, 발로 밟아 깨어 나쁜 액운을 쫓아내기도 하였다. 박 바가지는 잘 깨어지는 단점이 있는데, 남편을 들들 볶는 여인들 가슴속의 바가지는 깨어지지도 않는다는 말도 있었다.

화초용으로 키우고 있는 조롱박. 유병길 기자
화초용으로 키우고 있는 조롱박(상주역). 유병길 기자

1960년대 후반인가? 석유화학의 발달로 깨어지지 않는 플라스틱 바가지가 보급되기 시작하면서 우리 민족과 생사를 같이했던 박 바가지는 편리함에 밀려 우리들의 손길에서 멀어졌다. 지금 농촌에서 조롱박은 화초로, 큰 박은 박나물용으로 재배하고 있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한국인 2021-08-03 10:14:55
호박 박에 대한 추억어린 옛정경을 잘 풀어쓴글 보고 다시한번 감사드립니다
호박꽃 피는 시절보다 순박한 박꽃이 피는때가 더욱 정겹고 사랑스럽게 느껴집니다
흰박 꽃이 필때면 서울간 순이가 돌이온다고도 하느말이 있듯이 초가을이다가오는 요즘에 가을에 익은 단단한 둥근박을 그려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