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⑳ 산에 소 풀 먹이러 가서 즐긴 놀이들
[꽃 피어날 추억] ⑳ 산에 소 풀 먹이러 가서 즐긴 놀이들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08.09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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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름 방학을 하면 아이들은 망태기를 메고 소풀을 뜯어오고,
오후에는 산에 소 풀 먹이러(소 띠기려) 갔다. 소고삐를 목에 감아 산에 올려
보내면 곤을 두고, 공기 놀이를하고, 감자를 케어 구워먹고,
떡개구리 다리를 호벅잎에 싸서 구워 먹었다.
엄마 소와 송아지의 행복한 모습. 유병길 기자
엄마 소와 송아지의 행복한 모습(유병현 제공). 유병길 기자

1950~6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 새마와 대부분의 농가에서는 한우 한 마리는 키우고 있었다. 그때 소 한 마리는 그 집 재산의 절반을 차지할 정도로 귀한 존재였다. 농가에서 소는 힘든 일을 하며 주인을 도왔다. 남의 일을 하여 품삯도 벌어오고, 시골 5일 장날엔 달구지로 남의 짐을 장터까지 실어다 주고 운임도 벌었다. 부잣집 송아지를 키워 큰 소가 되어 송아지를 낳아 젖을 떼면, 큰 소는 부잣집에 돌려주는 장리 송아지를 키워 어렵게 자기 소를 마련하였다. 암소가 매년 낳는 송아지를 키워 판돈으로 학비와 생활비에 보탰다. 어쩌다가 쌍둥이 송아지를 낳을 때는 큰 경사였다. 송아지가 자라 고삐를 당겨도 잘 따라오지 않을 때는 쇠코뚜레를 끼워 고삐를 묶어 말을 잘 듣게 하였다.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 졌지만 외양간과 잿더미와 잿간이 보인다. 유병길 기자
지금은 철거되어 없어진 사랑채의 외양간이다. 오른쪽의 잿간 사이가 두엄터였다. 유병길 기자

소는 가을에서 봄까지 외양간에서 생활하지만, 여름에는 마당 옆 두엄터에 말뚝을 막아 소를 매어 시원한 곳에서 잠을 자게 하였다. 사람들도 마당에 멍석을 깔고 저녁을 먹고  쉬고 잠도 잤다. 보리짚과 생쑥으로 모깃불을 피워 모기를 쫓고 부채로 더위를 날려 보냈다. 방에는 모기장을 치고 잠을 잤다.

낫 치기할 때 사진같이 낫의 끝이 땅에 박히면 이기는 놀이였다. 유병길 기자
낫 치기 놀이는 5m 정도 밖에 선을 긋고 낫을 돌리며 던져 낫의 끝이 땅에 박히면 이기는 놀이였다. 유병길 기자

아침 시원할 때는 친구들과 망태기를 메고 들이나 밭둑 야산에서 소 풀을 뜯어 왔다. 소 풀을 뜯다가 심심하면 낫을 던져 낫 끝이 땅에 박히면 풀을 한 줌씩 주는 내기 낫 치기도 하였다. 점심을 먹으면 오후에는 산에 소 풀 먹이러(소 띠기려) 갔었다. 점심을 먹고 나면, 딸랑딸랑 방울 소리 울리며 골목길을 지나는 소리가 들렸다. 이집 저집에서 아이들이 소를 몰고 나와서 동네 뒤 묘(뫼) 등에 모이면, 절터골, 매방골, 시막골, 큰골 등으로 장소를 정하여 줄을 지어 출발하였다. 목적지에 도달하면 소고삐를 풀리지 않도록 목에 감아서 산으로 올려보냈다. 소는 해가 질 때까지 마음대로 다니면서 맛있는 풀을 배불리 뜯어 먹었다.

소들의 세계에도 힘의 서열, 승부 욕이 있는 것 같았다. 암소는 암소끼리, 황소는 황소끼리 처음에 만나면 머리를 맞대고 싸웠으나, 며칠 지나면 서열이 생겨 마주 만났을 때, 약자가 먼저 도망가서 싸우지 않았다. 암내를 내는 암소가 있을 땐 처음 싸워서 졌든 황소들도 사랑 앞에선, 물불을 가리지 않고 다시 도전하여 싸웠지만, 황소들의 사랑도 강자에게만 돌아갔다. 여름철에는 산에서 이루어지는 자연 교미로 임신 되는 소가 많았다. 자연 교미가 아니고 암소를 황소가 있는 집에 몰고 가서 교미시키려면 황소 주인한테 콩 한 말씩 주었다.

땅 바닥에 곤 그림을 그리고 돌이나 나무토막 나뭇잎으로 마주보고 낮아 곤을 두었다. 유병길 기자
곤(꼰, 고누)두기 놀이는 땅에 그림을 그리고 마주보고 앉아 말 3개씩을 위와 같이놓고 번갈아 가며 말을 한번씩 옮겨 놓는다. 처음 자기 말을 놓았던 곳에 다시 자기 말을 놓을 수없다. 처음 상대방의 자리에 들어간 말은 되돌아 나올수 없다. 상대방이 말을 더 이상 움직일 수 없게 되면 이긴다.  유병길 기자

소를 산에 올려보내고 나면, 아이들은 나무 그늘에서 곤 두고, 공기놀이, 땅 따 먹기 놀이를 하였다. 배고플 땐 감자 구워 먹기, 개구리 뒷다리 구워 먹기 등으로 배도 불리는 놀이를 하였다.

공기 돌만 있으면 어디서 든  쉽게할 수 있든 공기 놀이. 유병길 기자
공기 놀이는 다섯 개의 공깃 돌만 있으면 어디서든지 쉽게할 수 있는 보편적인 놀이다. 유병길 기자

감자 구워 먹기는 산 밑에 있는 감자밭에 아이들 몇 명이 내려가서 감자 포기 양쪽 옆을 손으로 파서 굵은 감자 한 두 개만 캐어 오기 때문에 밭 주인도 몰랐다. 남아있는 아이들은 깨어진 큰 옹기 조각을 주워 편편한 곳에 돌 세 개를 놓고 솥 같이 놓고, 마른 나무를 준비도 하였다. 감자가 도착하면 옹기 조각 위에 모래를 약간 펴고, 그 위에 감자를 놓고 모래를 덮고 개울물을 뿌리고 옹기 조각으로 대충 덮고 진흙을 반죽하여 조각 사이를 메웠다. 밑에 불을 때면 한참 후에 김이 오른다. 싸리나무 막대를 옹기 조각 사이로 넣어 감자를 찔러 쑥 들어가면 감자가 잘 익은 것으로 판단하였다. 옹기 조각을 걷어내고 물을 뿌려 식은 감자 반쪽씩 껍질을 벗겨 먹는 구수한 맛! 배고플 때의 그 맛은 잊을 수 없단다.

개구리 다리 구워 먹기는 콩밭에 가면 ‘떡 개구리’라는 큰 개구리가 많았다. 다른 개구리들은 등이 푸르거나 누른 바탕에 얼룩이 있는데, 떡 개구리는 흰 바탕에 검은 얼룩이 찍힌 것 같고 크기도 다른 개구리보다 두 세배 정도 큰 편이다. 아이들은 양손에 나무막대를 하나씩 들고 개구리 사냥을 나섰다. 개구리도 잡히면 죽는다는 것을 알고 있는지 힘껏 뛰어 도망가기 때문에 잡기가 무척 힘이 들었다. 떡 개구리 뒷다리 껍질을 벗겨, 호박잎에 몇 겹 싸서 연기가 안 나는 불 덩이가 된 모닥불에 올려 호박잎이 타도록 굽는다. 까맣게 탄 호박잎을 헤치고 하얗게 익은 다리 하나씩을 들고 소금에 찍어 먹으면, 쫄깃쫄깃하며 구수하고 담백한 개구리 특유의 맛. 배고픔에 잡아먹은 떡 개구리 뒷다리는 맛이 좋았단다.

해가 서쪽으로 넘어가려 하면 아이들은 소를 찾으려 산으로 올라갔다. 산 정상 부위에 가면 소들은 떨어지지 않고 서로 무리를 지어서 풀을 뜯고 있었다. 소를 동네 쪽으로 몰아 동네 뒤에서 고삐를 풀어 집으로 가고, 황소를 먹이는 형들은 아카시아 잎으로 만든 방석을 소등에 깔고 소를 타고 내려갔다.

송아지를 낳은 후 7일 만에 친구 갑이가 송아지를 외양간에 가두어 놓고 처음 소를 몰고 산에 왔는데, 무리 옆에 소가 없었다. 친구 갑이는 소를 찾아 뛰어다녔지만, 소를 동네 쪽으로 보냈기 때문에 도와주지 못하고 내려왔었단다. 소는 들길이나 동네 옆을 다닐 땐 마스크를 씌우지 않으면 농작물을 뜯어 먹었다. 갑이 혼자 소를 찾아다니다가 혹시 송아지 때문에 집에 내려갔는가? 집에 왔으나 송아지 울음소리만 들렸다. 소를 안 보고 놀았다고 할아버지한테 혼이 났단다.

초롱(등롱)은 사방을 유리로 막혀 바람이 부는 길과 들판의 어둠을 밝혀 주었다.  유병길 기자
초롱(등롱)은 사방이 유리로 막혀 바람이 불어도 호롱불이 꺼지지 않아 어둠을 밝혀 주는 유일한 기구였다. 유병길 기자

초롱에 불을 붙여 할아버지 일꾼과 셋이 절터골을 헤맸으나 찾을 수가 없었다. 내일 아침에 일찍 오기로 하고 내려왔다. 갑이는 멍석에서 늦은 저녁을 먹고 잠이 들었다. 새벽에 추워서 잠이 깨었는데 외양간 앞에 막아둔 사다리가 넘어지고 송아지가 없었다. 놀란 갑이는 일꾼을 깨워 뒷산 능선을 향하여 뛰어 올라갔다. 7부 능선을 올랐을 때 워낭소리가 들려 위를 바라보니 송아지가 엄마 소의 젖을 빨고 엄마 소는 송아지 등을 핥아 주고 있었다. 동네 길 산길도 모르는 생후 7일 된 송아지가 어떻게 엄마 소를 찾아왔는가? 정말 궁금하였단다.

1950년대 후반 둥근 통유리를 끼운 호야(일본말)가 판매되어 집집마다 구입하여 밤에 들에 나갈때 많이 사용하였다. 유병길 기자
둥근 통유리를 끼운 램프(남포등)가 판매되면서 초롱보다 많이 밝아 집집마다 구입하여 밤에 일할 때 많이 사용하였다. 유병길 기자

시골에서 자라는 아이들은 학교에 갔다 오면 동생들을 돌보고 소 풀을 뜯고 부모님의 잔일을 도우며 자연 속에서 삶을 배우며 자연과 더불어 살았다. 나무 막대는 연필이되어 땅 바닥에 글씨를 쓰고 지우고, 그림을 그렸다. 배는 고팠지만 화목하고 자유로운 생활을 하였다. 그때는 왕따, 따돌림, 학원 스트레스 등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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