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⑬ 힘들었던 손모내기, 기계모내기로 바뀌었다
[꽃 피어날 추억] ⑬ 힘들었던 손모내기, 기계모내기로 바뀌었다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06.08 10:00
  • 댓글 1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물못자리에서 모를 쪄 손으로 줄모 벌모를 심었다. 통일벼는 보온절충못자리에서 모를 쩌 손으로 줄모를 심었다. 1980년대 중반부턴 전 면적에 기계모내기를 한다.
못줄을 대고 모를 심고 있다. 유병길 기자
못줄을 대고 줄모를 심고 있다. 유병길 기자

195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에서는 물못자리에서 모를 키워 손 모내기를 하였다. 손 모내기의 시작 시기는 알 수 없으나 끝은 79년 기계 모내기가 시작되어 80년대 전 면적에 보급될 때까지 손 모내기를 하였다. 손 모내기는 못줄을 대고 모를 심는 줄 모내기와 마음대로 심는 벌모가 있었다.

농사를 많이 짓는 집에는 큰 머슴, 작은 머슴 두고 농사를 지었다. 물못자리를 설치하고 나면 모내기할 준비에 바빴다. 잘 썩은 퇴비와 외양간두엄의 운반 수단은 지게에 지고 가거나 소 질매 실어 논에 운반하였다. 논에 고루 뿌리고 쟁기로 논을 갈았다. 들판의 논은 냇가에 보를 막아 물을 넣었지만, 지대가 높은 다랑논은 비가 조금이라도 내리면 논둑부터 단단하게 바르고 논물 가두기를 하였다.

모를 심을 수 있게 소를 몰아 쓰레질을하여 논을 편편하게 하였다. 유병길 기자
모를 심을 수 있게 소를 몰아 쓰레질을하여 논을 편편하게 하였다. 유병길 기자

손 모내기는 못자리 설치 후 45일경인 6월 상순에 모내기를 시작 하였다. 하지 전 3일 후 3일을 모내기 적기로 보았다. 이때가 되면 들판마다 “이라 낄낄” 소 부리는 소리로 시끄러웠다.

물못자리에서 모를 쩌서 한줌씩 묶었다. 유병길 기자
물못자리에서 모를 쩌서 한줌씩 묶었다. 유병길 기자

동네에서 집집마다 모내기 날짜를 정하여 품앗이로 하였다. 컴컴한 이른 새벽부터 모를 쪄서 한 줌씩 볏짚으로 묶었다. 헌 가마니에 새끼줄을 묶어 모춤을 싣고 다니면서 논에 고루 던져 놓았다. 모를 잘심는 사람은 하루에 130여평을 심었지만 못 심는 사람은 70여평 정도를 심어 평균 하루에 100여평 심는다 하였다. 모내기를 처음 시작하여 동네 전체 모내기가 끝이 나려면 한 달 정도 걸렸다. 이때가 농사철 중에서 제일 바쁘고 물 논에서 일하여 많이 힘든 시기였다. 모내기 시작하고 삼사일은 허리 팔다리가 아팠으나 일주일이 지나면 몸이 풀려서 처음 같이 아프진 않았다. 그래서 계속 모내기를 하였을 것이다. 허리 아픈 것을 잊기 위하여 '상주 서보 노래' 등 모내기 노래를 많이 불렸다.

“상주 서보 유명~~하~다, 서보 수 문~만 열어~놓 면, 상 주 앞들 수천~두~락~에 이 논 귀 저 논 귀 물 이~넘네, 에헤야 얼러리 상사~디야 에헤야 얼러리 상사~디야, 에~헤 에 루 와 좋~고 좋~다 풍년~~ 이로구나."

40년대 초반(일제 강점기 때)에는 강제로 줄 모내기를 시켜, 8.15 광복되면서 못줄을 던지고 벌모를 심었다는 말도 있었다. 50년대 정부에서 줄 모내기를 권장하였으나 인력, 못줄 부족으로 벌모를 많이 심었다. 모를 심는 일꾼이 적은 집은 십여 명, 많은 집은 이십 명도 넘었다. 굶기를 밥 먹듯이 하던 아이들, 집에서는 밥을 못 먹었다. 엄마 아빠가 모내러 간 논에 찾아가면 꽁보리밥에 된장국, 무장아찌, 매운 장떡(밀가루에 된장 고추장으로 반죽을 하고 차조기 잎을 썰어 전같이 두껍게 부친 것)이 반찬이지만 배불리 먹을 수 있었다. 모내기 철은 동네 아이들은 잔치 기분이었다. 모심는 어른보다 따라온 아이들이 더 많았다. 모심기 노랫소리, 웃음소리, 애들 우는소리, 소 부리는 소리, 송아지 우는 소리로 온 들판이 무척 시끄러웠다.

62년 농촌진흥법이 제정되면서 농사교도소가 농촌지도소로 바뀌고 인력이 확충되면서 3~4개 읍면 당 지도소지소를 설치하고 3~4명의 농촌지도사를 배치 식량 증산, 의식주 생활개선, 학습조직체 육성, 농민교육 등 본격적인 농촌지도사업이 시작되어 쌀 증산의 기반을 다졌다.

한편으로는 쌀 소비량을 줄이기 위하여 혼식 분식을 권장하게 되었다. 이때부터 본격적으로 평당 포기수를 많이 심는 줄 모내기가 시작되었다. 못줄 양쪽 끝을 긴 막대에 묶어서 못줄을 감았다가 폭이 넓은 논에서는 풀고 좁은 논은 줄을 감아서 아이들이 긴 막대를 잡았다. 모를 한 줌 쥐고 못줄 앞에서 두 사람씩 붙어 서서 반대쪽으로 눈금에 모를 심어가다가 반대편에서 오는 사람과 만나면 한 줄 모를 다 심었다. 이때 아이들이 “야” “야” 소리치며 못줄을 넘겼다. “야” “야” 소리가 추가되어 들판은 더 시끄러웠다.

경제개발 5개년 계획을 수립하였고 농공병진 정책으로 하늘의 비만 바라보는 수리 불안전 천수답을 없애기 위하여 다목적 댐(소양강댐 준공 1973년 10월)을 막기 시작하였다. 선진국과 같이 기계화 영농을 위하여 600평 900평 단위로 경지정리를 시작하였다.

72년 통일벼 재배 첫해 일찍 모내기를 위하여 보온절충 못자리를 하였다. 북부지역인 상주 김천 등지에서는 1모작으로 6월 상순에 일찍 모내기를 마쳐 수량이 일반벼보다 2배 이상 생산되어 성공하였다. 경북 남부 일부지역에서는 보리 후작 재배로 늦게 모내기를 하여 이삭이 늦게 패고 익지 않아 문제점이 많았다. 정부에서는 이듬해부터 식량 자급을 위한 통일벼 확대 재배에 모든 힘을 쏟아부었다.

적기 영농 추진과 통일벼 재배면적 확대를 위한 새벽 독려, 현지 중점지도 결과 77년에 쌀의 자급 달성으로 녹색혁명을 이룩하였다.

통일벼 재배 5년만인 1977년 주곡의 자급달성을 하였다. 유병길 기자
통일벼 재배 5년만인 1977년 주곡의 자급달성을 하였다. 유병길 기자

참이나 점심을 먹기 전에 밥 한술에 반찬을 얹어 논밭에 던지며 “고시네(고수래)”(귀신에게 먼저 바치기 위하여 음식을 조금 떼어 던지면서 하던 소리)라고 소리를 쳤다. 이때 아는 분들이 지나가면 서로 불러서 막걸리 한잔을 주고받으며 잠시 쉬면서 이웃 간의 정도 키워갔다. 이게 우리 농촌의 훈훈한 인심이 아닐까? 만날 때마다 주고받는 막걸리 한 사발은 벼농사의 신기술을 주고받았다.

60년대 중반까지는 소로 논갈이 쓰레질을 하였고, 후반부터 70년대는 경운기로 논을 갈고 로타리를 하여 집집마다 키우던 소가 없어졌다. 70년대 후반부터 트렉트가 논을 갈고 로타리를 하며 머슴이 없어졌다. 80년대 중반까지 손모내기를 하였으나, 기계모내기가 확대되면서 벼농사는 기계화가 되었다.

요즘은 5월하순이면 모내기가 끝난다.  유병길 기자
요즘은 5월하순이면 모내기가 끝난다. 유병길 기자

손모내기 할 때 같으면 지금은 모내기를 시작할 때이지만, 물못자리가 보온절충 못자리로 바뀌고 기계모내기를 하면서 요즘은 5월 하순이면 모내기가 끝난다.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1
0 / 40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
한국인 2021-06-09 20:37:53
가난하던 옛 시절이 눈앞에 선하게
떠오릅니다
아이구 허리야 하고 잠시라도 쉴량이면
좌우에서 뭐하냐고 핀잔이 들어오던
그시절 모내기 ㅡ꼭두새벽에
밤새 술먹고 잠시 눈붙히는데 깨워서
들에 나가 모판에서 일하는데 그저 물논에 주저 앉고 싶었던 기억도 새롭군요
지금은 정감어린 옛추억으로 다가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