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㉙ 벼 베기와 탈곡 이야기(1)
[꽃 피어날 추억] ㉙ 벼 베기와 탈곡 이야기(1)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09.28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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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를 베고 큰단으로 세워 말리고 집으로 운반하여 탈곡을 하고
깨끗하게 정선하여 뒤주에 넣는 것은 모두 인력으로 하였다
잘 익어가는 벼. 유병길 기자
 밀 보리를 일찍 파종하기위하여 벼가 익으면 바로 베었다.  유병길 기자

1950~6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에서 벼 베기와 타작할 때는 모두 인력으로 하였다. 벼가 익으면 낫을 이용하여 벼 베기를 하였다.

벼를 베든 낫. 유병길 기자
벼를 베든 낫, 무거운 무쇠 낫(조선낫)이 가벼운 낫(왜낫)으로 변화하였다. 유병길 기자

품앗이하거나 온 가족이 논에서 낫으로 벼를 베기 때문에 들판은 사람과 사람들의 소리로 시끌벅적하였다.

낫으로 벼를 베는 모습. 유병길 기자
낫으로 벼를 베는 모습. 유병길 기자

낫으로 벼를 잘 베는 사람은 하루에 150평, 보통 사람들은 100평 정도 베었다. 모심기 벼 베기 등 농번기에는 학교에서 3~5일 정도 가정실습을 하여 학생들이 농사일을 도왔다. 벼 베기 할 때 참으로 삶아 온 햇고구마를 삶아 왔다. 쉬면서 먹었다. 배가 고플 때 잠시 허리 펴고 앉아서 먹는 고구마의 달콤한 맛은 행복의 순간이었다.

남부지역에서는 벼를 베면서 논에 깔아 3~4일 말려서 작은 단으로 묶어 집에 운반하고 보리 파종을 하였다.

볏단의 이삭을 맞붙여 세워서 말렸다. 유병길 기자
볏단의 이삭을 맞붙여 세워서 말렸다. 유병길 기자

상주 김천 문경 등 북부 지역에서는 큰 단으로 묶어서 논바닥에 두 단씩 벼 이삭 부분을 맞붙여서 길게 세워 말리면서 보리 밀을 파종하였다.

소등에 길마(질매)을 얻는다, 유병길 기자
 길마 위에 발채를 올려 볏단을 양쪽에 넣고 위에 올려 싣고 집으로 운반하였다. 유병길 기자

 소등의 길마 위에 발채(걸채) 올리고 마른 볏단을 양쪽에 넣고 위에 높이 싣고 끈으로 묶어 집으로 운반하였다. 마당에 둥그렇게 한 단 한단 쌓았다. 높으면 밑에서 던지면 한 사람이 받아서 쌓아 올리며 어느 정도가 되면 좁혀가며 마감을 하면 집 체크기의 낟가리가 되었다. 비가 와도 속으로 비가 들어가지 않았다.

밀보리를 다 파종하고 나면 탈곡(타작)을 하였다. 벼 이삭에서 벼알을 털어내는 것 탈곡(타작)이라 한다. 초련할 때는 온 식구가 둘러앉아서 수숫대를 접어서 이삭을 끼워 당겨 훑었고, 조금 발전된 것 쇠로 빗같이 만든 것(훑치기, 홀태)을 세우고 벼를 끼워 당겨서 훑었다. 추석에 햅쌀로 메를 올리기 위하여 벤 벼는 주로 이것으로 훑었다.

옛날 벼를 탈곡하든 챗돌, 지금은 방치되어 있다. 유병길 기자
옛날 벼를 탈곡하든 챗돌, 지금은 방치되어 있다. 유병길 기자

품앗이로 탈곡(타작)할 때는 마당 한쪽에 챗돌(개상에 올린 큰 돌덩이)를 놓고 한 발 정도 되는 새끼줄로 마른 볏단을 한번 감아 들어 올려서 돌에 내리쳐 탈곡(타작)을 하였다. 한 단을 탈곡하려면 여러 번 내리치기 때문에 힘이 많이 들었다.

족답식 탈곡기. 유병길 기자
일인용, 이 용 족답식 탈곡기. 유병길 기자

50년대 후반 새마에서 족답식 탈곡기를 논이 많은 다섯 농가가 공동으로 구입하여 돌아가면서 사용했다. 한사람이 볏단을 풀고 한 줌씩 나누어주면 한두 사람이 발로 밟으면 ‘와롱’‘와롱’ 소리가 났다. 볏대를 잡고 이삭을 탈곡기에 대면 벼알이 떨어졌다. 힘을 적게 들이고 하루에 많은 양을 탈곡할 수 있었다.

지개위에 키를 올리고 유병길 기자
지게와 키 자리를 이용하여 벼를 깨끗하게 하였다.  유병길 기자

탈곡한 벼를 깨끗하게 하려고 지게에 달린 줄을 큰 돌에 묶어 지게를 앞으로 약간 기울여 세우고 키(칭이)를 올려놓았다. 앞에선 사람은 발로 자리 가운데를 밟고 양손 자리 끝에 가는 나무 막대를 감고 잡아서 양팔을 벌렸다 모을 때는 바람이 났다. 이때 삼태기에 벼를 담아 서서히 내리면 먼지와 북데기를 날려 보내 벼를 깨끗하게 하였다.

탈곡한 벼를 깨끗하게 하든 풍구. 유병길 기자
탈곡한 벼를 쉬운방법으로 깨끗하게 하든 풍구. 유병길 기자

60년대 중반에 나무로 만든 풍구가 공급되었다. 손잡이를 돌리면서 투입구에 벼를 넣고 서서히 내리며 손잡이를 돌리면 나오는 바람에 먼지와 북데기는 앞으로 날아가고 깨끗한 벼알은 옆으로 흘러내리면 그릇에 담아 뒤주를 채웠다. 대형 바람개비를 손으로 돌리면 삼태기에 담은 벼를 서서히 내리면 먼지는 날아가고 벼만 깨끗하게 되었다.

남아있는 뒤주의 사진. 유병길 기자
남아있는 뒤주의 사진. 유병길 기자

깨끗한 벼를 문이 열린 빈 뒤주에 넣으며 나무 문을 하나하나 끼우며 채웠다. 뒤주가 없는 집은 가마니에 담아 보관하였다.

60년대 후반 쉽게 탈곡을 하려고 노력을 하였다. 가뭄 때 물을 푸는 발동기와 탈곡기를 벨트로 연결하는 탈곡기가 선을 보였다. 탈곡 작업은 쉬워졌으나 우마차 리어카로 이집 저집 운반하는 것이 힘들었다. 농사가 많은 집은 순서를 정하여 차례로 탈곡을 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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