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㉑ 밀주(密酒) 단속꾼과 숨바꼭질 애환
[꽃 피어날 추억] ㉑ 밀주(密酒) 단속꾼과 숨바꼭질 애환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1.08.17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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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청의 허가 없이 몰래 담근 술이 밀주(密酒)였다. 현금이 없으니 싸라기로 고두밥을 찌고, 식은 밥으로 몰래몰래 농주(밀주)를 담가 먹었다. 범보다 무서운 술 조사는 술 단지와 숨막히는 숨바꼭질을 하였다.
동동주와 막걸리를 담가 먹었던 술 단지. 유병길 기자
동동주와 막걸리를 담가 먹었던 술 단지. 유병길 기자

1950~60년대 봉강리(경북 상주시 외서면)의 대부분 농가에서는 우리 밀 농사를 지었다. 정미소에서 밀가루를 빻을 때 처음 나오는 흰 밀가루는 받아서 주로 국수를 만들어 먹고, 나중에 나오는 붉은 가루는 따로 받아 빵을 만들어 먹었다. 그 찌꺼기인 밀기울(밀 껍질)은 물로 반죽을 하여 못 쓰는 소쿠리에 담아 외양간 위 다락에 두면 자연 발효로 누룩이 되어 한 덩어리가 되었다. 누룩을 망치나 방망이로 가루를 만들어 보관하였다.

싸라기가 아닌 찹쌀로 찐 고두밥(몹시 된 밥). 유병길 기자
싸라기가 아닌 찹쌀로 찐 고두밥(몹시 된 밥). 유병길 기자

싸라기 한 되(1.6kg)로 고두밥을 찌고 자리에 펴 놓아 다 식으면 누룩 반 되(800g)정도를 혼합하여 단지에 넣고 물을 세 되(5~6L) 정도 넣어 손으로 휘저어주고 단지 입구를 천으로 덮었다. 여름에는 술 단지를 그냥 두었고 겨울에는 헌 이불로 술 단지를 덮어두면 '뽀골''뽀골' 소리가 나고 단 냄새가 났다. 며칠 지나 소리가 안 나면 술이 되었다. 

막걸리를 짤 때 항아리위에 체 다리를 놓고 체를 놓았다. 유병길 기자
막걸리를 짤 때 항아리위에 체 다리를 놓고 체를 놓았다. 유병길 기자

술이 되면 술을 짰다. 항아리 위에 두 갈래로 갈라진 체 다리를 놓고 고운체를 올려놓고 단지의 술을 바가지로 퍼서 넣고, 적당량의 물을 넣으며 손으로 저어 술을 짜면 술은 항아리에 고이고 체에는 술 찌꺼기가 남았다. 술은 어른들 일하실 때 잡수셨다. 술을 짠 찌꺼기는 버리지 않고 사카린을 타서 배가 고픈 부녀자와 애들이 먹기도 하였다. 이웃이나 친척에서 술을 짜면 술 찌꺼기를 얻어서 먹었다. 사카린의 단맛과 배고픔에 먹다가 술 취해서 하루 동안 잠을 잔 애들도 있었다. 어른들이 막걸리 술잔을 돌리며 마실 때, 아이들은 그릇에 찬물을 퍼서 사카린을 타서 돌려가며 시원하게 마신 기억도 있었다.

1909년 일제에 의해 ‘주세법’이 도입되고, 16년 강화된 ‘주세령’이 도입되면서 우리 민족은 일제의 밀주 단속에 고통을 당했고, 해방 후 94년까지 계속되었다. 95년부터 전통주 자가 양조가 전면 허용되었다.

‘너시’(백전리) 들어가는 입구에 양조장이 있었다. 양조장 터가 상주 종중 땅이라 유씨 어른들은 양조장에 들어가면 술을 대접받았다. 한 잔 마시고 안주는 그릇에 담긴 굵은 소금을 몇 알 집어 먹었다. 양조장에서 얻어 마시는 배주(막걸리 원액)는 소주보다 더 독하였다.

농가에서는 밀기울(밀 껍질)로 누룩을 만들어 붉은색이고, 곡자회사에서 만든 누룩은 통밀을 갈아 만들어 흰색이었다. 유병길 기자
농가에서는 밀기울(밀 껍질)로 만든 누룩은 붉은색이었고, 요즘 시장에서 파는 누룩은 흰색이다. 유병길 기자

양조장에서 만든 막걸리가 잘 안 팔릴 때는 양조장에서 세무서에 밀주 단속을 부탁하였단다. 세무서에서는 곡자 회사(누룩을 만드는 회사)와 합동으로 동네에 찾아와서 밀주를 뒤졌다. 들키면 술도 뺏기고 벌금도 내야 했다. 친구 갑의 종조할아버지가 곡자(누룩만드는 곳)회사 상주, 밀양, 대구공장장으로 계셨다. 세무서에서 연락이 오면 어쩔 수 없어 몇 번 같이 술 조사를 나간 적이 있다고 하셨단다. 농가에서는 밀 껍질로 누룩을 만들지만 곡자회사에서는 밀을 갈아서 만들기 때문에 누룩 색이 흰색이었다.

농가에서 밀주를 담을 때는 술을 안 들키려고 무척 애를 썼다. 밀주 단속 나온다는 소문을 이장이 미리 알면 동네일 심부름하는 사람을 시켜 정철 뒷산에 올라

“술 조사 나온답니다.”

큰소리로 외쳐서 새마, 정철, 행갈, 기말기에 알려주었다. 밀주를 안 들키려고 어떤 농가는 술 단지를 땅에 묻어 놓고, 어떤 집은 잿간의 재 속에 단지를 묻어두고 계속 술을 담가 먹는 집도 있었다. 술 조사가 동네에 닥치면 술 단지는 숨바꼭질을 하였다. 방에 있는 술 단지를 들고 마루에 나오는데 술 조사가 사립짝(삽짝. 나뭇가지를 엮어서 만든 문짝)을 밀고 들어와서 술 단지를 마루에 놓고 소변 보듯이 치마로 덮고 앉았는데 술 조사가 민망하여

“밀주하시면 안 됩니다”

하고 되돌아 나갔다는 에피소드도 있었다. 집에 사람이 없으면 집안에 들어오지 못하기 때문에 뒷문으로 도망가는 사람도 많았다.

상주군 모동면 00리와 영동군 황금면 00리는 마을 복판의 작은 도랑 하나를 경계로 충청북도, 경상북도로 갈리는 곳인데, 상주에서 술 조사가 나오면 도랑 건너 영동지역으로 술 단지를 옮겨 놓고, 영동군에서 나오면 상주지역으로 옮겨 들키지 않았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동동주 단지에 표주박을 띄워두고 수시로 한잔씩 하였다. 유병길 기자
동동주 단지에 표주박을 띄워두고 수시로 한 잔씩 하였다. 유병길 기자

양조장에서 막걸리를 사다 먹으려면 돈이 있어야 했다. 곡식을 판매하여야 돈을 만질 수 있었기 때문에, 손쉽게 집에 있는 싸라기로 고두밥을 찌거나, 식은 밥에 누룩가루를 섞어서 위험을 감수하며 술을 몰래 담가 먹었다. 친구 갑이네 집은 동동주가 떨어지지 않았다. 누룩을 물에 담가 두었다가 위의 맑은 물을 고두밥과 버무려 술을 담그면 밥알이 동동 뜨는 동동주가 되어 술을 짜지 않고 표주박으로 수시로 떠먹을 수 있어 편리하였다. 아무리 조심을 한다고 하여도 운이 없을 때는 들켜서 벌금을 낸 일도 있었다. 뒤주 앞의 발판으로 구유(소먹이를 담아주는 큰 그릇)를 뒤집어 놓았다. 그 밑에 단지를 묻어 놓고 동동주를 담가 먹었다. 중학교 8km 걸어 다닐 때는 간식 할 것이 없을 땐 표주박으로 조금씩 먹었으니 술과의 친분은 동동주에서 시작되었단다.

어느 집이든 농주가 떨어지면 아이들은 주전자를 들고 주막에 술 심부름을 다녔다. 집에 올 때 한 모금 한 모금 마시면 맛이 있었다. 옆집 친구하고 형이 술 심부름을 갔다. 마을 주막에는 술이 없어서 기말기 술집에서 사 오면서 둘이 한 모금씩 마시다 보니 동네 입구에 오니 반밖에 남지 않아서 공동 우물에서 물을 부어 가져갔는데, 술이 많이 취하셔서 모르고 넘어갔다는 이야기도 들었다. 초상이 나거나 소상, 대상 등 제사와 결혼식 회갑연 때는 큰 단지에 술을 담아서 손님을 대접하였다. 양조장에서 막걸리 몇 말을 사면 눈을 감아 주었다.

술이 되었을 때 술독에 싸리나무로 만든 용수를 박아놓으면 용수 안에는 맑은 술(청주)이 고여 청주를 뜨고 난 후 막걸리를 걸렀다. 청주는 귀한 손님 대접용으로 사용하였다. 

그때 양조장은 면 단위의 부자요 유지였다. 말 통으로 팔던 양조장 막걸리가 통일벼 재배로 농가 소득이 올라 조금 살게 되자, 작은 병에 담아 파는 소주 맥주에 밀려났다. 문을 닫은 양조장이 많았으나, 작은 병에 담아 파는 병 막걸리가 나오면서 인기를 회복하였다. 해외에 수출하면서 판매량이 많이 늘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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