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곡 이이가 빼어난 절경을 노래한 청도 삼족대(三足臺)
율곡 이이가 빼어난 절경을 노래한 청도 삼족대(三足臺)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09.15 17: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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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창천 우연(愚淵), 바위절벽, 소나무가 어우러진 가장 한국적인 아름다움를 풍기는 누정
두번의 사화를 겪은 삼족당 김대유선생이 향리에 은거하며 명사와 시인 묵객과 강학장소
동시대를 살았던 고향 출신 소요당 박화담과 의기투합 백성의 구휼사업 위한 동창설치
세가지에 만족하는 삼족당의 장구지소, 2013년 경상북도 민족문화재 제171호

 

매전교에서 바라본 삼족대. 소나무숲 사이로 정자 뒤편 삼족대가 보인다, 태풍 하이선 영향으로 동창천이 흙탕물로 변했으나 아름다운 자태는 변함없다. 장희자 기자

연무는 눌연(訥淵)에 걸리고/ 고기는 우연(愚淵)에 뛰논다./ 한가한 중이라도 형용을 묘사하기는 어렵고/ 노을은 봄이 저무는 산허리에 피어오른다./ 고요함 속의 다함이 없는 자태요/ 낙엽은 가을 밤 달이 삼경일 때 부서진다. 

경북 청도에 있는 삼족대(三足臺) 편액으로 걸려 있는 율곡 이이가 격찬하고 김희연이 쓴  ‘삼족당서(三足堂序)’라는 시문의 일부이다.  삼족당의 빼어난 절경을  짐작할수 있는 글이다.

삼족대는 학일산 지맥이 갓등산을 지나서 동창천으로 끝맺는 지점인 경북 청도군 매전면 금곡리 901번지 바위 절벽 위에 동남향으로 자리잡고 있다. 삼족대 앞으로는 경주 산내면 문복산에서 시작한 동창천이 운문댐에 잠시 머물렀다가 동곡천과 관아천과 합류하여 삼족대 아래에서 휘돌아 간다. 삼족대 기암절벽 아래에서  깊은 소(沼)를 만드는데 김대유 선생은 이 소를 우연(愚淵)이라고 이름지었다.

삼족당 신도비와 담장으로 둘러싸인 삼족대 출입하는 일각문. 좌측으로는 뒷쪽 또 하나의 일각문으로 연결된 계단이 보인다. 장희자 기자

삼족대는 김대유(金大有, 1479-1552)가 관직을 그만두고 우연(愚淵)이 있는 졀벽 위에 별장을 지어 살면서 후학들을 양성하던 곳이다. 선생의 본관은 김해이고 탁영(濯纓) 김일손(金馹孫)의 조카이며 조광조의 문인이다. 화양읍 토평리 백곡마을 출신으로, 1498년(연산군 4) 무오사화로 김일손이 화를 당하였을 때 아버지와 함께 호남에 유배되었다가 1506년(중종 1)에 풀려났다. 1507년 정시(庭試)에 장원하여 진사가 되고, 1518년 행의(行誼) 있는 선비를 구할 때 전생서직장(典牲署直長)에 서용되었으나 사직하고 고향인 청도로 돌아갔다. 1519년 현량과에 급제한 뒤 성균관 전적·호조 좌랑 겸 춘추관 기사관·정언 등을 두루 역임했다.

칠원 현감(漆原縣監)이 되어 선정을 베풀던 중 기묘사화가 일어나 현량과가 혁파되자, 관작과 과제(科第)를 삭탈당했다.  향리인 청도에 내려와 은거하면서 삼족대를 짓고 조식(曺植), 박하담(朴河淡), 주세붕(周世鵬), 김응조(金應祖), 김극일(金克一), 신계승(申季誠) 등 제현들과 도의지교를 맺고 이곳에서 강론했으며, 율곡 이이 등 많은 명사들과 시인 묵객이 찾아들었다.

 같은 청도 출신 소요당 박하담과 뜻이 같았고 우정이 깊어 1520년 둘은 의기투합해 창고를 짓고 곡식을 모아 고향의 가난한 백성들을 위해 가뭄과 기근이 들 때를 대비했다. 그때 세운 창고가 동창((東倉)이다. 청도관아의 동쪽에 있는 창고라는 뜻이다. 그때부터 창고가 있는 마을은 동창마을, 동네를 감아 흐르는 강은 동창천이 되었으며, 그 마을이 지금의 매전면 소재지이다. 선생은 1545년(인종 1) 현량과가 복과되어 전적에 다시 서용되어 상경하던 도중에 병이 나서 청도로 되돌아 와서 여생을 마쳤다. 두 사람은 지금 눌연(訥淵)이 있는 신지리 선암서원에 나란히 배향되어 있다.

김대유의 자호(自號)를 삼족당(三足堂)이라 하였는데 삼족은 예기(禮記)에서 유래되었다. 선생은 이를 본따 세상에서 가장 행복한 사람은 만족할 줄 알아야 한다면서 ‘벼슬도 현감을 지냈으니 벼슬로도 만족하고, 항상 밥상에 반찬이 부족하지 않으니 먹는 것도 만족하고, 나이도 환갑을 넘겼으니 수명(壽命)도 만족한다’하여 삼족(三足)이라고 이름지었다. 삼족대는 김대유의 장구지소(杖屨之所)이며 1987년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189호로 지정되었다가 2013년 경상북도 민속문화재 제171호로 승격됐다.

태풍 하이선이 할퀴고 간 동창천 건너편 바위 언덕 위에 삼족대가 있다. 소나무숲으로 가려 보이지는 않는다. 장희자 기자

삼족대는 조선 초기에 처음 지어진 후에 여러 번 중수 과정을 거쳐 김대유의 13대 손 김용희에 의해 새롭게 단장된 건물이다. 매전면사무소에서 금곡리 방향으로 국도 20호선을 따라 1.2㎞ 정도 국도변 우측에 어분산 금곡리에서 내려오는 개천 교각을 건너면  정자를 관리하는 관리사가 있다.

북쪽 평지 위에서 가파른 언덕길을 올라 방형의 토담 안에 토석의 담장을 두르고, 동북쪽 일각문을 달아 갓등산으로 연결되어 있다. 담장의 서북 모퉁이에도 일각문을 달아서 출입하고 있는데, 한 칸 아래 정자와 동창천으로 연결되어 있다. 삼족대는 정면 3칸, 측면 2칸의 건물로 북쪽 2칸은 통으로 된 방이며, 반칸 정도는 전퇴를 물려 마루를 놓았다.

청도 삼족대에서 보면 바로 아래 남쪽에 한단 낮은 대지위에 삼족대 관리사로서 방2칸과 부엌과 방앗간으로 이루어진 하당(下堂)이 있었으나, 지금은 그 자리에 1973년 세운 삼족당 신도비가 있다. 삼족대 언덕 아래 벼랑에는 물에 뜬 강정(江亭)도 있었다고 한다. 지금은 청도군에서 6각 정자를 지어 놓아 허전함을 달래고 있다.

삼족당(三足堂) 김대유 선생이 두번의 사화를 겪고도 향리에 은거하며 명사, 시인 묵객들과 강론하면서,  백성을 위한 구휼사업을 했다.

삼족대 한단 아래에 청도군청에서 최근에 지은 육각정자는 동창천 소(沼)와 매전교와 조화되는 곳에 자리잡고 있다. 장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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