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 3대 명재상 허조의 철학 깃든 금호서원
세종 3대 명재상 허조의 철학 깃든 금호서원
  • 장희자 기자
  • 승인 2019.10.25 17: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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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희, 맹사성과 함께 세종 3대 재상으로 통하는 청백리, 직언으로 왕의 선정을 도운 대나무 공신, 조선초기 태평성대 발판을 마련한 수응재상(瘦鷹宰相)
왕에게 직언으로 황희와 함께 세종 30년간을 태평성대로 이끈 조선 왕조의 명재상 문경공 허조를 배향하는 금호서원

경북 경산시 하양읍 부호리 114(가마실길 2길 32-1)에 위치한 금호서원(琴湖書院)은 조선 세종때 좌의정을 지낸 경암 허조(許稠 1369-1349)선생을 배향한 서원이다.

금호서원의 정문인 준도문

선생의 호는 경암(敬庵)이며 시호는 문경공(文敬公)이다. 조선왕조 통치의 기본 법전인 경제원과 속육전을 수찬하였고 국조오례의 사례의를 찬정하여 석전의식을 개정하였다.

금호서원 강당인 수교당 좌측에 있는 성경재와 구인헌으로 유생들의 숙소로 이용하였던 곳.

이 서원은 효종 4년(1653) 영남 유림에서 금호동( 현 하양읍 금락리)에 사당을 창건하였으며 숙종 10년(1684)에 위판이 봉안되었다. 경종4년(1724)에 사이동(현 하양읍 서사리)으로 이건하였으며 정조14년(1790)에 사액되었다.

성경재와 마주보는 언덕위에 사당으로 들어가는 내삼문

그리고 고종8년(1871)에 서원 정비령(대원군의 철폐령)으로 훼철되었고 고종38년(광무5년:1901) 훼철원지에 유허비각을 건립하고 1923년 현 위치에 유림들에 의하여 서원이 복원되었다.

금호서원 사당인 경덕사로 문경공 허조의 위패를 모심.

경암 허조(許稠 1369-1349)는 1369(공민왕 18)∼1439(세종 21). 고려 말에서 조선 초의 문신으로 본관은 하양(河陽). 자는 중통(仲通), 호는 경암(敬菴). 판전객시사 허수(許綏)의 증손으로, 할아버지는 도관정랑(都官正郎) 허윤창(許允昌)이고, 아버지는 판도판서(版圖判書) 허귀룡(許貴龍)이며, 어머니는 통례문부사 이길(李吉)의 딸이다. 권근(權近)의 문하이다.

사당인 경덕사 경내에 있는 은행나무 고목이 가을빛으로 물들어 가고 있다.

1383년(우왕 9) 진사시, 1385년 생원시에 합격하고 1390년(공양왕 2) 식년문과에 급제해 전의시승(典儀寺丞)이 되었다. 1392년 조선이 건국되자 좌보궐(左補闕)·봉상시승(奉常寺丞)으로서 지제교를 겸해 예악제도(禮樂制度)를 바로잡는데 힘썼다.

금호서원의 현대식 강당인 경의관

1397년 전적이 되어 석전(釋奠)의 의식을 개정했으며, 1399년(정종 1) 좌보궐로서 지제교를 겸하였다. 태종이 즉위하자 사헌부잡단(司憲府雜端)으로 발탁되었으나, 강직한 발언으로 왕의 뜻을 거슬러 완산판관으로 좌천되었다. 그 뒤 강직한 성품이 다시 인정받아 1402년(태종 2) 이조정랑, 1404년 호군·집현전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좌문학이 되었다. 1406년 경승부소윤(敬承府少尹), 이듬해 예문관직제학으로서 세자시강원문학을 겸임하였다. 세자가 명나라에 들어가게 되자 집의에 올라 서장관으로 수행하였다. 이 때 명나라의 여러 제도를 자세히 조사하였다. 그리고 귀국 중에 들렀던 궐리(闕里)의 공자묘(孔子廟)를 본떠 조선의 문묘에서 허형(許衡)을 제향하고 양웅(揚雄)을 몰아내었다.

'하양 허씨 청소년 보학 교육본부'라는 현판이 걸려 있는 양몽재.

1408년 판사섬시사(判司贍寺事)로 세자시강원우보덕을 겸했으나, 조대림사건(趙大臨事件)에 연루되어 춘주(春州)로 귀양갔다. 그러나 곧 경승부윤으로 복직했으며, 1411년 예조참의가 되어 의례상정소제조를 겸임하였다. 이 때 사부학당을 신설하고 왕실의 각종 의식과 일반의 상제(喪制)를 정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태종조에 이루어진 많은 예악제도는 거의 그의 손에 의해 이루어지다시피 하였다. 뒤에 이조·병조의 참의를 거쳐 평안도순찰사가 되었는데, 도내의 민폐를 자세히 조사·보고하면서 조세 감면과 왕의 수렵 자제를 극간하기도 하였다.

금호서원으로 들어가는 협문(狹門)

1415년 한성부윤·예문관제학, 1416년 예조참판·제조, 1418년 개성유후사유후·경기도관찰사를 역임하였다. 세종 즉위 후에는 공안부윤(恭安府尹)·예조판서로서 부민고소금지법(部民告訴禁止法)을 제의해 시행케 하였다. 또한 시관이 되어 많은 인재를 발탁하였다. 1422년(세종 4) 이조판서가 되자 구임법(久任法)을 제정해 전곡을 다루는 경관(京官)은 3년, 수령은 6년 임기를 채우도록 정하였다. 그리고 죄인의 자식이라도 직접 지은 죄가 없으면 처벌하지 않도록 하는 법제를 만들었다. 또한 이듬해에는 『속육전(續六典)』의 편수에도 참가하였다.

서원 뒷편 야산에서 바라본 금호서원 전경: 저멀리 호산대학교 본관건물이 보인다.

1426년 참찬·빈객이 되었다가 이조판서에 재임했는데, 이때 대간들의 간언을 두호(斗護: 남을 두둔해 돌보아 줌.)해 언로를 넓힐 것을 주장하였다. 1428년 판중군도총제부사가 되어서는 동북방의 적을 막기 위해 평안도에 성곽을 쌓고 전선(戰船)을 마련해야 한다고 주장해 이를 관철시켰다.

금호서원 기와지붕과 담장이 어울러서 고풍스러워 보인다.

1430년 찬성을 거쳐, 1432년 다시금 이조판서에 올라 관리 임명에 공정을 기하는 한편, 효자순손(孝子順孫)과 충현(忠賢)들의 자손을 발탁해 예교(禮敎)를 장려하는 데 힘썼다. 이듬해 세종이 파저강야인(婆渚江野人) 이만주(李滿住) 등을 치려고 하였을 때는 후환이 있을 수 있다면서 극력 반대하였다.

서남쪽에서 바라본 금호서원 전경

1435년 지성균관사가 되고, 이듬해에는 예조판서를 겸임하였다. 과거시험에서 사장(詞章)보다는 강경(講經)을 중시해야 한다는 입장에서 초장강경(初場講經)을 주장했으나, 이를 성사시키지는 못하였다. 당시까지만 해도 고려시대부터 내려오는 사장 중시의 경향이 강했던 때문이었다.

금호서원 뒷편 솔나무숲 사이로 장군산이 보인다.

1438년에는 세종을 도와 신숙주(申叔舟) 등 진사 100인과 하위지(河緯地) 등 문신급제자 33인을 뽑았고, 같은 해 우의정 영집현전춘추관사 세자부로 승진하였다. 이듬해 궤장(几杖)이 하사되고 좌의정 영춘추관사에 올랐으나, 그 해에 생을 마쳤다.

금호서원 수교당 강당

『소학』·『중용』을 즐겨 읽었고 효행이 지극했으며, 강직한 성품을 지녔다. 특히, 유교적 윤리관을 보급해야 하는 조선 초기에 태종·세종을 도와 예악제도를 정비하는 데 크게 공헌하였다. 세종묘정에 배향되었다. 2003년 10월에 경상북도 문화재자료 제449호로 지정됐다. 충효의 도리를 중시하고 인(仁)과 덕(德)을 숭상했던 조상들의 지성은 우리의 전통과 역사에 켜켜이 쌓여 오늘에까지 학원도시 하양의 위상을 되새기게 하는 본바탕으로 이어져 나갈 것이다.

금호서원 강당인 수교당은 정면 4칸 측면 1칸 반 규모의 팔작지붕 겹처마 집으로 전면에는 툇마루를 두고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