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3) 무가지보(無價之寶), 훈민정음 해례본
(3) 무가지보(無價之寶), 훈민정음 해례본
  • 오주석 기자
  • 승인 2020.03.10 11:07
  • 댓글 1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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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안동본)
간송 전형필은 어떻게 훈민정음 해례본을 소유하게 되었을까?
훈민정음 상주본의 소유권 및 그 가치는 얼마일까?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문화재단 자료 사진
국보 70호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문화재단 자료

'훈민정음'은 백성을 가르치는 바른 소리라는 뜻으로, 1443년에 세종이 창제한 우리나라 글자인 ‘한글’을 이르는 말이다. 조선의 4대왕인 세종은 한글을 창제한 뒤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 그리고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 등을 설명하는 ‘훈민정음’이라는 책을 엮었다.

훈민정음은 크게 ‘예의’와 ‘해례’로 나누어져 있다.

‘예의’는 세종이 직접 지었는데 한글을 만든 이유와 한글의 사용법을 간략하게 설명한 글이다. 우리가 국어 시간에 배웠던 "나라 말이 중국과 달라..."로 시작되는 문장은 예의의 첫머리에 있는 한문으로 된 서문을 우리말로 바꾸어 놓은 것이다. 흔히 「훈민정음 언해본」이라 부른다.

훈민정음 언해본. 문화재청 제공
훈민정음 언해본. 문화재청 제공

‘해례’는 훈민정음 원본이라고 부르며 성삼문, 박팽년 등 세종을 보필하며 한글을 만들었던 집현전 학사들이 한글의 자음과 모음을 만든 원리와 용법을 상세하게 설명한 글이다.

해례(다섯 '해설'과 한 '예시'가 실렸기에 '해례'이다)의 다섯 해설은 아래와 같다.

제자해: 글자 창제에 관한 해설 / 초성해: 초성 글자에 관한 해설

중성해: 중성 글자에 관한 해설 / 종성해: 종성 글자에 관한 해설

합자해: 초중종 글자를 합한 글자에 관한 해설

용자례: 글자를 활용한 예시 이다.

한글의 자음, 모음을 만든 원리 등 한글 창제의 비밀이 가득 담겨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은 표지 2장에 본체 33장으로 이루어져 있으며 현재까지 1940년 안동에서 발견된 것과 2008년 상주에서 발견된 것 두 권만 존재한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문화재단 자료사진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문화재단 자료

훈민정음 해례본의 크기는 가로 20센티미터, 세로 32.3센티미터 크기이고 발견 당시 예의본의 앞부분 두 장이 낙장 되었는데 낙장 된 이유는 '연산군의 언문책을 가진 자를 처벌하는 언문정책' 때문에 부득이 앞의 두 장을 찢어내고 보관하였으며 이후 낙장 된 것은 이한걸의 셋째 아들 용준의 글씨로 보완하였다. 용준은 안평대군체에 조예가 깊었으며, 선전(鮮展)에 입선한 서예가였다.

▶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또는 안동본)

우리 문화유산 가운데 가장 우수한 문화유산인 한글이 위대한 이유는 만들어진 시기가 명확하고 과학적인 창제를 했다는 것인데 이것은 유일하게 남아 있는 훈민정음 해례본이 증명하기 때문이다. 그런 까닭에 훈민정음 해례본이라는 이름보단 훈민정음 원본으로 더 잘 알려져 있으며, 상주에서 두 번째 해례본이 발견된 이후에는 구별을 위해 발견된 지역의 이름을 따 안동본 또는 소유자의 호를 따서 간송본이라고 부른다.

1940년 경상북도 안동시 와룡면 주하동 진성 이 씨 이한걸가(李漢杰家)에 소장되었던 해례본이 처음 발견되었는데 그의 선조인 이천(李蕆)이 여진을 정벌한 공으로 세종으로부터 직접 받았고 그 책에는 세종 28년(1446년) 9월 상한이라고 한글 반포 시기가 기록되어 있으며 상순의 끝날 인 9월 10일을 양력으로 환산하여 10월 9일을 한글날로 제정하였다.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간송문화재단 자료사진
훈민정음 해례본 간송본. 간송문화재단 자료

일제 강점기와 6·25전쟁 속에서도 지켜낸 훈민정음 해례본은 간송미술관에 보관되어 있으며 1962년 국보 제70호로 지정되었다. 그리고 1997년 10월에는 유네스코 세계 기록유산에도 등재되었다.

▶ 훈민정음 해례본을 간송 전형필이 사들인 일화

1940년 경상북도 안동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이 나타났고 책 주인이 판매가격으로 천원을 불렀다. 간송 전형필은 중개인에게 즉시 1만 1천원을 건네며 책 주인에게 만원을 전하고 천원은 중개인 수고비로 주었다. 당시 천원은 서울의 큰 기와집 한 채 값이었다. 그리고 그때는 조선어학회 사전이 터져 한글한자들이 모두 잡혀 들어가고, 조선총독부에서 한글 탄압정책을 펴던 어려운 상황이었다. 그렇게 해서 간송 전형필의 손에 훈민정음 해례본 원본이 들어오게 되었다. 간송은 “훈민정음 같은 보물은 적어도 이런 대접을 받아야 한다.”고 말했다는 일화가 전해진다.

또 간송 전형필 선생은 6·25전쟁 때도 피난을 다니면서 이 책을 오동나무 상자에 담아 휴대했고 잘 때는 머리에 베고 잤다고 했다.

▶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 수난사와 그 가치는?

한 권만 남았다고 알려진 훈민정음 해례본이 2008년 8월 상주에 사는 배익기 씨의 제보로 세상에 모습을 드러냈다. 고서 수집가인 배 씨가 집수리를 위해 짐을 정리하다 발견했다며 안동MBC에 제보하면서 발견자 이름을 따 ‘상주본’이라 부르게 되었다. 기존에 한 권 있었던 안동본과 동일하지만 비록 세 장이 떨어져 나갔으나 보존 상태가 훨씬 좋아 가치가 매우 높게 평가되었다.

그러나 상주에서 골동품상을 하는 조 모 씨가 자신의 책방에 있던 상주본을 배 씨가 훔쳐갔다며 배 씨를 고소했다.

1심과 2심을 거쳐 대법원은 2011년 5월 조 씨에게 소유권이 있다는 판결을 최종 확정했다. 승소한 조 씨는 2012년 문화재청에 훈민정음 상주본을 기부하겠다는 뜻을 밝힌 뒤 숨져 현재 소유권은 국가에 귀속되어 있는 상태다.

이후 배 씨는 2012년 9월에 무죄로 풀려났지만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돌려주지 않고 있는데, 2008년 이후 모습을 감춘 훈민정음 상주본은 2015년 3월 배익기 씨의 집에서 불이나 일부가 탄 것으로 확인됐다. 배씨는 화재 당시 집안으로 뛰어 들어가 훈민정음 상주본을 꺼냈고, 이후 자신만 아는 곳에 낱장을 비닐에 넣어 보관 중인 것으로 알려졌다.

상주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화재로 일부 소실된 상태임. 상주시청 제공
상주에서 발견된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은 화재로 일부 소실된 상태임. 상주시청 제공

문화재청은 실소장자인 배 씨에게서 상주본을 강제 회수할 법적 근거를 확보했지만, 상주본의 행방을 알 수 없는 상황에서 무리한 강제집행은 하지 않겠다는 입장이다. 또 문화재청은 “반환 협상이 되지 않은 상태에서 압수수색을 벌이게 되면 자칫 상주본이 훼손될 수 있다”면서 “(배 씨와의) 반환 협상을 우선으로 하되, 강제집행을 하는 방안도 고려하고 있다”고 했다.

그러면서 배 씨는 문화재청에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을 반환하는 대가로 1,000억 원을 요구하고 있는데 그 이유는 현재 훈민정음 해례본의 가치가 1조 원이기 때문에 1조 원의 10%를 요구하는 것은 정당하다고 했다.

훈민정음 해례본 상주본의 분쟁이 어떻게 결말이 날지 관심을 가지고 지켜볼 일이다.

▶ 훈민정음 해례본은 자랑스러운 문화재

인류 역사상 문자가 그 만든 목적과 유래, 사용법, 그리고 창제의 원리와 세계관을 명확히 밝혀 만들어진 예는 없었다. 훈민정음이 유일무이하다. 따라서 훈민정음은 비단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인류의 역사와 문화의 전개에서도 엄청난 성과이자 족적이라 할 수 있다. 이런 한글의 위상과 의미를 여실하게 보여주는 것이 바로 이 훈민정음 해례본이다.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국가의 보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훈민정음 해례본은 그 가치를 돈으로 매길 수 없는 소중한 국가의 보물이다. 문화재청 제공

그래서 훈민정음 해례본은 무가지보(無價之寶)로 불린다. 값을 따질 수 없을 만큼 귀중하다는 뜻이다. 현재 국보 1호를 숭례문에서 ‘훈민정음 해례본’으로 바꾸자는 입법 청원이 국회에 제출되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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