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52)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52)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1.22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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희망찬 미래를 꿈꾸는 고모를 축복하는 듯 햇살마저 머리 위에서 따사롭기 한량없다
앞으로 일만 대를 더 맞아야 이 질기고 모진 악업이 끝납니다
정체성을 잃고, 자존심을 저버려야 하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내용도 뜻도 알 수 없는 기괴한 낙서들로 빼곡한 종이 나부랭이를 내려다보는 고모는 망연자실이다. 까막눈의 고모가 할 수 있는 것이라곤 이승에 없는 할머니를 두고 왜? 왜라고 묻는 것이 전부다. 나아가 무엇을 위해서 이 고생을 하였습니까? 자리에 있다면 어째서 쓸모없는 이런 종이 뭉치를 남겼는가에 대해 이유를 묻고 싶었다. 누구를 위해 늦은 밤, 졸음을 털어가며 청승을 떨고, 미련을 떨었습니까? 따지고 싶었다. 그런 한편으로 이 모두가 일자무식의 자신 때문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진즉에 애살(‘샘’의 방언)을 심으로 글을 배우지 못했다는 생각에 절로 마음이 숙연하다. 뒤돌아보는데 처녀 적의 허송세월이 그저 안타깝기만 하다. 제멋에 겨워 천방지축 놀기만 할 것이 아니라 진즉에 할머니를 졸라서 글이라도 배울 걸 그랬나 싶었다. 난생처음으로 후회란 단어가 가슴속을 싸하게 후비고 있다.

한참을 뚫어질 듯 들여다보던 고모는 무언가 생각을 굳힌 듯 원래대로 꼭꼭 싸서는 본래의 자리에 갈무리하고는 이틀 만에 저녁상을 받았다. 밥 한 그릇을 싹싹 비워서 배부르게 먹었다. 밥상을 내가던 행랑어멈이 휑하니 비워진 밥그릇을 보고는 의아한 표정이다. 귀신이라도 다녀갔나? 처연히 앉은 고모를 보고는 말을 할 듯 말 듯 어물거리다간 방을 나갔다. 그 길로 마님께 달려가서는 밥을 먹었다고 고자질이다. 그것도 아주 많이 먹었다고 일러바친다.

이를 아는지 모르는지 달포가 지난 어느 햇살 부드러운 봄날을 맞아 고모는 낫 한 자루를 들고는 산을 올랐다. 그간 마음속으로만 다짐하던 결심을 행동으로 옮기려는 발걸음은 자석에 이끌리듯 시아버지의 무덤가에 닿고 있었다. 그새 금잔디는 봉분 위에서 차분하게 어우러져 붉은빛의 황토를 대부분 갈무리로 파릇파릇하여 봄의 세레나데다. 말 못 하는 미물도 때가 되면 스스로 여물어 제 몫을 다하는데 나는 여태껏 왜 이 모양 이 꼴일까? 풀이 죽은 고모가 자신도 모르게 금잔디 위로 몸을 맡기는데 이마를 스쳐 지나는 온풍(溫風:따뜻한 바람으로 봄철에 부는 바람을 뜻함)이 가슴을 설레게 한다. 산마늘의 알싸한 향이 춘풍에 깃들어 귀밑머리를 어루만져 지난다. 나는 이 세상에 태어나 무얼 할 수 있을까? 호랑이는 죽어 가죽을 남긴다는데 나는? 나는? 이끌리듯 고개를 들자 에메랄드색을 무한정으로 풀어놓은 듯 하늘이 온통 새파랗게 시려서 실눈이다. 미래를 꿈꾸는 고모를 축복하는 듯 햇살마저 머리 위에서 따사롭기 한량없다.

옛 생각에 젖어 상석을 쓰다듬던 고모가 찬찬히 옷깃을 여민다. 옷매무새도 단정하게 절을 하려는데 ‘앗~불사’ 아찔한 기분으로 털썩 주저앉는다. 어째 이런 일이! 상석에 진설할 제물로 대추 한 알, 밤 한 톨, 감, 사과나 배 반쪽이 없다 보니 망연자실이다. 행여나 싶어 주섬주섬 품 안을 더듬는데 문득 곶감 두 개가 손가락 끝에서 말랑말랑하다. 새참을 겸해 주전부리로 먹으리라 아무 생각 없이 가지고 왔건만 천만다행이다. 이것마저 없었으면 어쩔 뻔했나 싶다. 넓은 상석 위에 달랑 곶감 두 개를 올리고 보니 찬바람이 살갗을 콕콕 찔러 에이는 시베리아 벌판을 거니는 듯 황량하다. 그러한 살풍경에 시아버지께 죄스럽기가 그지없다. 못난 며느리란 생각에 고개가 절로 떨궈진다. 이왕지사 이리된 것 새삼 옷고름을 매만지고 마음을 다잡아 경건하게 재배를 올린 뒤 다소곳하게 꿇어앉는다.

“아버님! 아버님 며느리가 여태껏 정신을 못 차려서 이 모양입니다. 그 날수록 철이 덜 들어도 한참이나 덜 들었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다음번에는 제물도 제대로 장만하고 수루매(‘오징어’의 방언)포에 청아한 약주도 한 잔 올려 드리겠습니다” 조용히 고개를 숙였다가는

“아버님! 한참이나 늦었건만 오늘에 이르러 아버님 며느리가 미력하나마 작은 꿈 하나를 가졌습니다. 용렬(容悅)하다 마시고 하늘에서 굽어 응원해 주세요! 끝을 짐작하여 알 수 없겠지만 아버님 며느리로 또 김씨 집안의 종부로서 부끄럽지 않게 살도록 힘써 노력하겠습니다”

나부죽이 재배 후 조용히 물러난다. 시아버지산소를 떠난 고모는 얼마 떨어지지 않은 곳에서 낫으로 싸리나무를 벴다. 작년 봄에 햇순으로 받은 곧고 가는 것으로 20~30개 정도를 벤 고모는 내려오는 길에 칡덩굴도 얼마간 걷어 왔다. 곧장 집으로 돌아온 고모는 처녀 적 어깨너머로 본 할머니를 흉내다. 서툰 솜씨를 발휘, 엉성하나마 싸리비 한 자루를 만들어 대문간에 가지런하게 세워 놓고는 방으로 들어왔다. 그때 고모는 시집오기 전 감골댁으로부터 전해 들은 이야기를 흉내네고 있었다.

감골댁 이야기에 따르면 남편으로부터 매를 맞고 사는 여인이 있었다. 얼마나 심하게 맞았으면 시퍼렇게 멍든 자국이 얼굴과 팔다리에서 가실 날이 없었다. 멍도 멍이지만 그녀는 남편으로부터 무자비하게 매를 맞을 때면 곧장 죽을 것 같은 공포에 치를 떨었다. 맞고 또 맞고, 여인은 매일같이 이렇게 맞고 살아야만 하나 싶은 어느 날인가? 이래서는 안 되겠다 싶어 용하다는 스님을 찾아 이 지옥 같은 삶을 어떻게 하면 벗어날 수 있습니까? 애절한 눈빛으로 물었다. 여인으로부터 딱한 사연을 전해 들은 스님이 한참을 생각에 잠겼다가는 지그시 감은 눈을 번쩍 뜨더니

“앞으로 일만 대를 더 맞아야 이 질기고 모진 악업에서 벗어날 수 있습니다” 하는데 여인은 까무러질 지경이다. 잠시 뒤 정신을 차린 여인은 절박한 심정으로 스님의 옷자락을 붙잡았다.

“스님! 일백 대도, 일천 대도 아닌 일만 대라니요! 그럼 저는 그전에 맞아 죽습니다. 스님 어떻게 하면 눈앞으로 닥친 이 난관을 무사히 넘어갈 수가 있는지요? 부적(符籍)이나 스님만의 특별한 비방은 없는지요? 달리 좋은 방도는 없습니까?” 묻자 스님은 몸으로 때우는 외에는 다른 방법이 없단다. 몇 번을 물어도 대답은 한결같다. 이는 전생에서 부인이 현재의 남편을 닦달한대서 고스란히 받는 업보라 돌이킬 수가 없다고 했다.

낙담으로 풀이 죽어 집으로 돌아온 여인은 그날도 멍석말이를 당하듯 어김없었다, 사지가 피멍으로 도배를 하듯 오지게 두들겨 맞았다. 눈앞에서 불이 번쩍이고, 전갈자리와 까마귀자리, 사수자리가 수시로 겹친다. 사방에서 날아드는 무자비한 주먹세례 앞에 어찌 아니 그러하겠는가? 그날로 며칠을 고민 끝에 여인은 낫을 챙겨 들고는 산을 올랐다. 산을 오른 여인은 고모처럼 햇순으로 가늘고 곧은 싸리나무로 골라 베었다. 하산 길에 칡덩굴을 함께 걷어온 여인은 곧장 싸리비를 만들어 대문간에 세워 놓고는 남편이 오기를 기다렸다. 이윽고 저녁을 맞아 꼭지가 돌아버릴 정도로 술에 취해 집으로 돌아온 남편이 우격다짐으로 주먹을 내밀 때 황급히 싸리비를 손에다 쥐여준 다음

“그래요! 나는 맞아도 싸요! 맞아 죽어도 싸요! 하지만 앞으로 때릴 양이면 이것으로 분이 풀릴 때까지 마음껏 때려 주세요! 그럼 맞다가 죽어도 원망은 않을께요!” 남편의 눈앞으로 등 짝을 불쑥 들이민다. 호랑이를 잡으려면 호랑이 굴로 들어가라는 속담처럼 제 발로 호랑이 굴로 들어갔다 싶은 여인은 이미 죽을 작정을 한 듯도 했다. 부인의 절박한 사정을 알 리가 없는 남편은 떡 본 김에 제사 지낸다고 싸리비를 팔랑개비처럼 휘두르기 시작이다. 물 만난 물고기만 같았다.

“오냐 이년아! 맞아 죽는 것이 그리도 소원인가 보구나! 맞아 죽으려면 무슨 짓인들 못 할까? 설령, 설령 맞아서 아주 매에 한이 맺힌 모양이구나! 그래 오늘은 어디 한번 오지게 처맞아 죽어 봐라!” 길길이 날뛴다. 발기발기 찢어 죽일 기세로 싸리비를 휘두른다. 한데 이상한 것은 매를 맞은 여인이 남편의 지독한 매질 아래 방실방실 웃고 있다는 것이다. 매를 맞는 것이 무어에 좋아서 웃을까?

사람들이 고문을 무서워하는 것은 못 이기고 못 참아서가 아니다. 영혼은 연기로 흩어지고, 피는 분수로 치솟고, 생살이 찢어지고, 뼈가 부러지는 가운데 끝이 보이지 않는 고통에 절망하는 것이다. 지은 죄라면 실토, 용서를 빌고 상응하는 죗값을 치르면 그만이다. 죄는 미워도 인간은 미워하지 말라고 면죄부가 주어지는 것이다. 하지만 기약 없는 고신(拷訊)은 이와는 다르다. 상대방이 짜 놓은 각본에 따라 동조해야만 하는 자신이 두려운 것이다. 신념은 홍수에 휩쓸린 댐처럼 황폐하고, 의지는 부러진 화살로 쓸모가 없어 허무하고, 정체성은 거지발싸개로 냄새만 지독하여 쓰레기 취급이며, 자존심은 코를 푼 휴지쪼가리처럼 구겨져 가는 자신을 용납할 수 없다는 것이다. 그 지경이면 누구라도 견딜까가 변명이 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진실은 뒷전으로 상대방이 짜 놓은 각본에 동의, 까무룩 정신을 잃고는 거짓을 참 인양 말해 버릴까 싶어 정신적인 고통은 가중되고, 심신은 아득한 심연(深淵)으로 가라앉는 듯 절망한다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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