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55)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55)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2.11 15:57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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통시글이란 말은 통시(화장실)에 앉아서도 능히 깨 칠 수 있는 글이라며 천시한 데서 생겨난 것ㅆ이다
수면제도 그런 수면제가 없어 천하의 명의가 두 손 두발을 들 지경으로 잠이 쏟아진다
근데요 이상도 하지요! 글만 알았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 보이네요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그날 낮 즈음하여 살포시 방문을 열어 귀를 기울이는 시어머니는 고개를 갸우뚱하고 있었다. 친정 외에는 대문간을 나가는 법이 없던 며느리가 낫을 들고 나갔다. 잠시 후 싸리를 한 움큼 베어 와서는 빗자루라 만들어 대문간에 세워 놓았다. 이는 누가 보아도 이상한 행동이다. 며칠 동안 두문불출로 방에 틀어 앉은 것이 그렇고, 달포가 지나 싸리를 베어 오는 것도 그렇다. 긴긴 병치레와 어미를 잃은 슬픔이 겹쳐 기어이 정신이 이상해졌나 싶었다. 하여간 싸리비는 형태로 보아 마당을 쓸기도 전에 너덜너덜 풀어질 지경이다. 생각 끝에 행랑아범을 불러서 손을 보아두라고 한 것이다. 좋은 징조건 나쁜 징조건 그건 나중 일이라고 생각한 시어머니다. 그런데 대문간에서 제 서방을 만나 싸리비로 이러쿵저러쿵 입씨름을 벌이던 내외가 방으로 들어가더니 기침도 매침도 없다. 그렇다고 아들의 성정으로 보아 따따부따 간섭하여 나설 수가 없다 보니 가만히 방문을 닫고는 고개만 갸우뚱 내저을 뿐이다.

다음 날로 고모부가 공책과 연필 등 지필묵 구해 오자 고모는 본심을 드러냈다. 작정한 듯 글을 배우고 싶다고 했다. 언문이든 훈민정음이든 용비어천가든 그도 아니면 통시(‘변소’의 방언) 글이든 무슨 글이든 글을 배우고 싶다며 결연한 의지를 보인다.

통시 글이란? 세종대왕이 집현전 학자들의 조력을 받아 한글을 창제하고 1446년 반포를 했을 때 대부분의 조정 신료들이 반대했다. 그런 가운데 통시(화장실)에 앉아서도 능히 깨칠 수 있는 글이라며 천시한 데서 생겨난 말이다.

하지만 고모에게 있어서 통시글이든 무슨 글이든 멀고도 멀기만 한 글공부다. 마음을 다잡기도 쉽지 않았다. 할머니가 남긴 종이 꾸러미만 보지 않았다면 감히 생각하지도 못할 시도였다. 그런 만큼 어떠한 난관과 어려움이 있더라도 돌파하리라 수시로 의지를 다진다. 나아가 이 기회를 통해 최소한 이름 석 자 정도는 능숙하게 읽고 쓰고 싶었다.

고모의 확고한 신념을 확인한 고모부가 글 선생을 추천했건만 극렬하게 머리를 가로젓는다. 심하게 머리를 가로젓는 고모는

“왜~ 왜? 왜 그래요! 가르쳐 주기 싫어서 그래요!” 얼굴을 붉혀 정색하는데야 고모부는 다시 토를 달지 못했다. 고모도 글공부를 앞두고 당연히 생각해 보았다고 했다. 하지만 그다지 좋은 방법이 아니라는데 결론을 내렸다.

글을 배운다는 핑계로 외간 사내를 집안으로 끌어들이는 건 어림도 없다고 생각했다. 좋든 나쁘든 그러할 경우 본인들은 철저하게 선을 그어 행동했다고 치더라도 반드시 구설수가 따르리라 여겼다. 다른 방법으로 서당도 아니 생각한 것은 아니라고 했다. 하지만 불치하문(不恥下問)이라고 코흘리개 아동들과 같이 공부하는 것은 그렇다고 치더라도 훈장님과의 불편함을 어떻게 하냐는 것이다. 지주댁의 작은 마님이란 호칭 하나만으로도 주눅이 들것은 자명한 사실로 그 피해는 고스란히 순진한 학동들에게 돌아간다고 생각할 때 그럴 수는 없다는 것이다.

다음 날로부터 막연한 가운데 고모의 글공부가 시작되었다. 난생 처음 대하는 글공부라 그런지 모든 게 낯설고 두렵다. 가만히 앉아 책장만 넘기는 모습을 빗대어 누가 공부를 두고 세상에서 가장 쉽다고 했던가? 보고 또 보고, 듣고 또 들어도 눈 한번 깜짝일 동안 까맣게 잊는다. 고개만 들어도 머릿 속이 하얗고, 문지방을 넘을 때는 연필이 왜 손에 들려 있는가에 이유를 따졌다. 게다가 천하장사도 항복을 선언했다는 눈꺼풀이 내려앉아 천근만근으로 책만 들면 하품이 줄줄이 늘어져 장사진이다. 혼자 있어서 망정이지 목젖이 훤히 보이도록 입이 떡 벌어지는 모양새가 세상없는 꼴불견으로 굳이 잠을 청할 필요가 없다. 수면제도 그런 수면제가 없어 천하 명의가 두손 두발을 들 지경이다. 책장을 펼치기도 전에 병든 달구새끼마냥 꼬박꼬박 존다. 가끔 삼경을 지나 까무룩 졸릴 때면 귀밑머리를 호롱불에 그슬었다. 병석에 누웠을 적 새벽녘이면 가끔 풍기던 노르끼리한 중에 고소하고도 이상야릇한 냄새의 근원을 그제야 알 것 같았다. 생각 같아서는 금방이라도 문을 박차고 나갈 기세지만 고모는 끈덕지게 물고 늘어졌다. 잘 훈련받은 사냥개가 멧돼지의 목 아래에 있는 급소를 한입에 덥석 문 형상이다. 할머니가 신부수업이라며 붙잡아 놓으면 이 핑계 저 핑계로 줄행랑을 놓고, 주저앉혀 놓으면 갖은 짜증으로 문을 박차던 때와는 확연히 다른 모습이다.

그로부터 얼마나 시간이 흘러갔을까? 시나브로 고모의 끈질김 앞에 그 어렵다는 글이란 것도 서서히 항복을 선언하나 보다. 어느 날부턴가 고모의 눈으로 무언가가 아른아른 들어오기 시작이다. 어른거리던 형체들이 또렷하게 모습을 보이기 시작이다. 자음과 모음의 조합이 자연스럽게 어우러지기 시작이다. 희열이 벅차올랐다. 날개를 달아 날아가는 기분이었다. 세상이 달리 보이기 시작한 것이다. 며칠 못가 고모의 입안으로

‘가, 나, 다, 라!’ 글자가 혀끝으로 익어지는가 싶더니 어느 순간 한마디 두 마디로 발전해 나갔다. 종래는 문장으로 변해간다. 한 문장, 한 문장을 더듬더듬 암송하여 음미하는 고모는 가슴이 터질 듯 기쁨으로 가득했다. 산 정상에 올라 ’야호‘ 목청껏 소리소리 지르고 싶다. 지렁이가 기어가듯 구불구불하던 연필심으로부터 공책에 한 자, 한 자가 정성이 되어 글자로 아로새겨진다. 괴발새발의 글자가 하루가 다르게 가지런해져 간다. 그 소식은 행랑어멈을 통해 시어머니에게로 시시콜콜 전해지고 있었다. 며느리가 글을 깨쳤다는 소식을 전해 들은 시어머니는 행랑어멈의 손을 잡아 특별히 신경을 써달라는 부탁, 부탁에 눈물을 글썽이며 일구월심으로 그저 부탁에 부탁이란다. 면벽을 친구삼아 중얼중얼, 관세음보살을 찾는 것으로 들떠서 성근 마음을 삭인다. 그 길 밖에는 달리 방법이 없는 자신을 한스럽게 여기고 있었다. 그런 한편으로 참는 자에게 복이 있다더니 옛말이 하나 그른 것이 없다 여겼다. 눈에서 빗나간 며느리를 나무라지도, 내치지 않는 그 모든 것은 관세음보살의 무한한 자비심과 조상님의 음덕으로 여겨 감사의 기도다. 그즈음 고모부도 지난날의 허송세월 한탄, 공부가 소홀했다며 고모 옆에서 나란히 책을 펼치는 모습이 나날이 늘어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아침나절이다. 고모는 하얀 백지 위에 연필심에 침을 묻혀서는 꾹꾹 눌러서 ’최 끝순‘이라 큼지막하게 적어 놓고는 조용히 내려다보고 앉았다. 그때 등 뒤로부터

“작은 마님! 거기에 뭐라고 쓰셨어요?” 묻는 소리에 돌아다보니 언제 들어왔는지 행랑어멈이 발그레하게 상기된 얼굴로 등 뒤로 바짝 다가섰다. 호기심 가득한 눈길로 내려다보고 섰다.

“근데 행랑어멈은 인기척도 없이 언제 내 방에 들어오셨어요?” 도둑질하다 들킨 모양으로 겸연쩍은 표정이다.

“작은 마님은 무슨 말씀을 그렇게도 섭섭하게 하신다요! 지가요 헛기침을 몇 번이나 했는데 모르고는 그러세요! 온통 글에 정신이 팔려서 못 알아채고선!”

“아~ 저가 그랬나요! 미안해요 어멈!” 손끝으로 글씨를 가리키며

“이거요! 이거 별것 아니고요 ‘최끝순’이라고! 심심해서 제 이름 자 세 자를 써봤네요!”

“그럼 이게 작은 마님 성함으로 ‘최’ 그 뭐시기라 아~ 끝순’이라 쓴 거예요! 참말 이쁘게도 잘 썼네요! 그 날 이래 그렇게 열심이더니 이제 우리글을? 언문을 완전히 뗐나 봅니다”

“글쎄 그게요! 수박 겉 핥기 식으로 대충 그런 셈이네요! 근데요 이상도 하지요! 글만 알았을 뿐인데 세상이 달라 보이네요! 넓고도 커 보여요!”

“신통방통도 하셔라! 같은 세상인데요! 진짜로 달리 보여요?” 알 수 없다는 듯 고개를 갸우뚱

“하여간 이년 같은 돌대가리는 평생을 가도 어려운 일을! 그럼 이제 작은 마님은 읽고 쓰고를 마음대로 하세요!”

“아~ 예~ 하지만 아직은 많이 모자라요! 미숙해요!”

“무슨 그런 겸손의 말씀을! 잘은 모르겠지만, 무식한 이 년이 주제넘게 이런 말씀을 드려도 될런가 모르겠지만” 행주치마에 두 손을 비비다가는 고개를 주억거려 말을 잇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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