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58)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58)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3.04 06:25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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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서방의 자슥이면 다 내 자슥이나 마찬가지
왕편(王篇)이라 읽든 말든 부수와 획수를 모른다면 찾아보는 것도 싶지가 않다
흉악한 범죄라면 지서(支署)에 도둑으로 몰아 신고라도 하고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서류만 해도 그랬다. 남의 손을 타는 게 두려운 것이 아니라 일이 들통 날까 싶어 꼭꼭 숨기라고 당부에, 당부를 거듭한 모양이다. 똥물에 튀겨 죽여도 시원찮을 인간이지만 글을 모르는 난옥으로서는 쉽사리 나설 수도 없는 노릇이다. 까딱 일이 잘못 틀어지면 화냥년으로 낙인찍혀 돌팔매를 맞아 쫓겨날 판이다. 10살이나 연하인 최주사 아낙으로부터 머리칼이 남아나지 않을 것만 같았다. 일주일 만에 겨우 몸을 추스른 난옥은 문제의 서류 뭉치를 보자기에 꼭꼭 싸서는 길을 나섰다.

“다들 왜 그래! 임자 없는 과부라고 괄세를 말어! 내게도 자슥이 있다고! 그래 맞아 자슥이 있지!” 난옥은 그길로 딱 한 번 만난 적이 있는 ‘석주’를 수소문하여 찾아 나섰다. 멀미로 인해 버스 타기를 포기, 40여 리의 길을 걷기로 했다. 비록 밭은 다르지만! 갱변(‘강변’의 방언)의 모래밭이면 어떻고, 산허리 자갈밭이면 또 어때서, 이 밭이면 어떻고, 저 밭이면 무슨 상관일까? 내 서방의 핏줄이면 다 내 자식이나 마찬가지라며 길을 재촉했다.

"피 한 방울 안 섞인 당신하고 내하고 무슨 상관이 있소? 매몰차게 버릴 때는 언제고 지금에 와서 자슥이라고 찾다니! 낯짝도 두껍소!" 하며 밀어낼 참이면 어머니가 남겨준 유산을 내밀어 하루에 한 끼만 먹어도 좋으니 같이 살자며 애원이라도 할 참이었다. 그 정도는 능히 가능할 것이라 혼자 생각에 고개를 끄덕이고 있었다.

그 순간 난옥은 땅이 무어에 중요하며 돈이 무엇에 중요할까 여겼다. 지금까지 목숨줄이라 여겨 악착같이 붙잡았던 재산이 한순간 허무하다 여겼다. 그런 한편으로 그 자식이라면 땅을 고스란히 찾아 줄 것이라 믿었다. 설령 찾아서 제 아비 모양 소 장사 밑천으로 홀라당 털어 넣어도 아깝지 않다 여겼다. 자식이 부모 돈 좀 쓴다는데 무엇이 문젤까 싶은 것이었다. 이 모두가 글을 못 배운 자신 때문이라 탓하며 헌털뱅이 버스가 뽀얗게 먼지를 끌고 가는 뒤를 졸래졸래 따라 걷고 있었다. 실바람에 허리를 굽혔다 펴는 살살이꽃[코스모스(cosmos)'꽃의 비표준어]이 하느작거리는 옆을 스쳐서 나풀나풀 걷는다.

“일자무식한 년이 애꾸눈처럼 한쪽 눈으로 허옇게 백태 낀 자슥한테 꺼정 소박을 맞으면 서러워서, 서러워서 어떡하게!” 야들야들 묻는 코스모스꽃에게

“못 배운 까막눈의 지집년 인생이 다 그렇지 뭐!” 살랑살랑 손을 흔들어 답하며 또박또박, 잰걸음이다.

새삼 내려다보는 이름 세 글자에 자신이 생긴 고모는 한발 더 나아가 셈을 배우고 싶었다. 가감승제 정도는 배우고 싶었다. 기하급수적인 개념은 차치하더라도 산술급수 정도는 배우고 싶었다. 고모부도 지금껏 겪어본 고모의 굳은 심성 앞에 따따부따 이설을 달 수가 없어 선선히 승낙이다. 다음 날부터 고모는 ‘+, -, ×, ÷’의 공부에 전념했다. 그로부터 머잖은 날에 구구단을 달달 외운 고모는 한발 더 나아갔다. 한문 공부를 위해 천자문 책을 구했다. 행랑아범을 통해 어렵게 구한 천자문은 뜻과 훈이 달려 있었다. 문장 풀이가 행간마다 있어 한글만 깨쳤다면 혼자서도 능히 배움이 가능한 그런 천자문이었다. 하지만 한문이란 것이 근본적으로 한글과는 달라 복잡하고도 다양하여 어렵다. 게다가 글자마다 뜻도 여러 가지다. 옥편(玉篇)을 왕편(王篇)이라 읽든 말든 부수와 획수를 모른다면 찾아보는 것도 쉽지가 않다. 쓰는 것조차 균형감각은 물론 획의 순서에 의한 것이라 고모부의 세세한 지도는 필연이다. 시간과 하고자 하는 의지 앞에서 고모부는 게으름을 피울 수가 없었다. 그런 한편으로 고모는 한문 공부에 병행하여 소설책을 구해 읽기 시작했다. 주로 읽는 소설은 춘향전, 심청전, 흥부전, 유충렬전, 박씨전, 별주부전, 구운몽, 사씨남정기 등이었다. 한번 소설책 속으로 빠져들자 헤어날 줄 몰랐다. 흥미진진한 가운데 소설이란 묘한 매력에 흠뻑 빠져들자 마음의 양식이 날로, 달로 쌓여갔다.

춘향전에서는 남녀의 애틋한 사랑을 배웠고, 심청전에서는 진정한 효를, 흥부전에서는 권선징악을, 사씨남정기를 통해 여인들의 끝없는 질투와 야망이 주는 허무를 배웠다. 더불어 흥부가 19남매의 이름을 짓는데 일남이, 이남이라 할 때 재미있다는 생각에 피식 웃는 중에 아기를 갖고 싶다는 생각 들었다. 여자라는 허울을 벗고 어머니가 되고 싶었다. 그러기 위해서는 할머니 이야기 중의 홍윤성은 아니 된다고 생각했다. 생각으로만 그칠 것이 아니라 이참에 아예 실천을 마음먹은 고모는 그날로 행랑아범을 불러 귓속말로 무언가를 은밀하게 당부했다.

그런 다음 날부터 동네에서는 약값이 없어 의원을 찾지 못하는 집으로 생시처럼 돈이 생기고, 양식이 떨어져 황달기가 돌던 아이 집으로 하늘에서 떨어진 듯 양식이 생겼다. 뜻밖의 사태를 맞아 마을 사람들은 너나없이 어안이 벙벙했다. 이만한 돈과 양식이라면 지주댁 말고는 없다고 추리하지만 도통 감이 잡히질 않는다. 당연하다고 생각은 했건만 쭉쭉 뻗어나던 신작로가 이유 없이 끊어진 것처럼 추리는 딱 거기까지였다. 심증은 가지만 꼭 집어서 이야기할 수가 없었다. 지금까지의 경험으로 보아 큰 마님을 절대 아니라는 것이다. 돈이라면 광에서 썩어나도 남 주기 싫어 벌벌 떠는 데 있을 수 없다는 것이다. 그렇다고 작은 마님 즉, 고모도 아니라는 것이다. 지금껏 경험으로 보아 절대 그럴 일이 없다는 것이다. 그럼 누구일까? 돈 한 푼에도 벌벌 떠는 마님이 아니라면 당최 누구란 말인가. 작은 마님도 아니라는 것에서 연결고리가 끊어져 버린다.

차선으로 기어이 고모를 염두에 두었건만 가당찮다며 고개를 가로젓는다. 신혼 초부터 친정 나들이에 혼을 뺏기더니 어느 날부턴가 다 늦은 공부를 한답시고 두문불출이니 그만한 생각도 여유도 없다는 게 동네 사람들의 공통된 의견의 일치다. 게다가 수중에 그만한 돈이 있을 리가 없다는 것이다. 단지 그즈음 행랑아범의 동네 출입이 잦다는 것과 수시로 주모와 수작으로 대포 잔을 기울인다는 외에는 별다른 점이 없어 민심만 뒤숭숭, 요동칠 뿐이다.

어느 날은 답답한 마음에 작정한 동네 사람 몇몇이 행랑아범을 불러 다그쳐 보았건만 금시초문으로 백지장을 본다는 듯 발뺌이다. 가끔 컬컬한 목도 축일 겸 심심풀이로 마을은 다녔지만 절대 본인은 아니란다. 흉악 범죄라면 지서(支署)에 신고라도 하고, 치도곤이라도 쳐보겠지만 어려운 이웃을 도운 선행에 그럴 수도 없는 노릇이었다.

그런 일이 있고 나서 며칠이 지난 어느 날 행랑아범을 불러다 앉힌 마님이

“이보게 정서방! 자네 근자에 이르러서 술을 자신다며?”

“예~ 마님! 근데 그걸 어떻게 아셨어요? 그러니까 그게 다 늙어서 부끄럽게도 그것이!”

“늙으면 어때서, 그리고 어떻게 알긴, 다 아는 수가 있지! 그건 그렇다 치고 내 자네를 나무라려고 이러는 것이 아니네! 자네라고 술 좀 자시면 아니 되는가? 그런 의미에서 자~” 지전 뭉치 한 다발을 정서방 무릎 앞으로 밀쳐놓는데 정서방이 물끄러미 내려다보더니

“마님 저는 이 돈을~”

“아무 말 말고 넣어 두었다가 대포값에 보태던지, 하여간 요긴할 때 쓰시게나~! 이건 자네가 애당초 우리랑 약속한 것과는 별개라네!”

“설령 그렇더라도” 고개를 주억거리는 행랑아범의 정색을 보는 듯 마는 듯

“아무 말 말고, 그리 알고 나는 일어나네!” 마님이 자리를 뜨는데 은근히 지전을 품 안으로 갈무리하는 행랑아범이다. 이 역시 한사코 밀어낼 것이라는 마님의 예상과는 뜻밖이었다. 그깟 돈 몇 푼이 아까워서가 아니었다. 처음 이 집에 왔을 때 눈물로 하소연하던 그 날의 절박한 사연이 생각났기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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