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51)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51)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1.15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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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이고 자시고 간에 한달음에 부엌을 찾은 그는 부엌칼부터 찾아 들었다
잠자던 사내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이부자리를 들치는데 몹시 낯익은 얼굴이다
잠결에 언뜻언뜻 환영인 듯 호롱불 앞에 앉았던 할머니!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이르다 뿐입니까? 당연히 그리하셔야지요! 그럼 이 길로 집으로 돌아가는 즉시 집안 곳곳, 잘 보이는 곳마다 참을 인(忍)을 써 붙여놓고는 여하한 일이 발생하더라도 어금니를 깨물어가며 죽기 살기로 참아야만 합니다. 그래야만 고래 힘줄같이 질긴 전생의 악업으로부터 피해갈 수 있습니다” 점쟁이의 말에 따라 집으로 돌아온 그는 문설주란 문설주는 물론 벽이란 벽에는 온통 ‘忍’자로 도배를 하다시피 써 붙이고는 볼 때마다 마음을 다잡는다. 그 때문인지 세월이 순조롭게 흘러가고 있었다.

그러던 어느 날인가? 바깥 볼일일 일찍 끝나 집으로 돌아온 그의 눈앞으로 뜻밖의 광경이 펼쳐진다. 그때 그는 이 기막힌 광경 앞에 온몸으로 치를 떨었다. 그가 안방으로 들어와 본 모습은 평소 정숙하고 절개가 있다고 자부하던 부인이 외간남자와 한 이불을 덮고는 깊은 잠에 떨어져 있었다. 이불 아래 누운 작자의 상투 끝이 이불 밖으로 삐죽이 튀어나온 모습으로 보아 함께 누운 작자는 외간남자가 분명했다.

이 판국에 참을 수 있는 자가 과연 몇이나 될까? 눈에서 불똥이 튀는 데는 참을 수가 없었다. 평소 참을‘忍’자를 금과옥조로 여겨 심신을 갈고 닦았지만 나약한 인간이라 그런지 갈피를 잡을 수가 없었다. 생각이고 자시고 간에 한달음에 부엌을 찾은 그는 부엌칼부터 찾아 들었다. 그런 그의 눈앞으로 시렁 밑으로 붙인 ‘忍’자가 보인다. 순간 속으로 참아라! 참아라! 하는 울림이 가슴 가득 들끓었건만 도저히 참을 수가 없었다. 바람을 피웠다는 사실 하나만으로도 죽어 마땅하거늘 어찌 이럴 수가 있단 말인가? 백주(白晝), 대낮에 보란 듯 외간남자를 안방까지 끌어들여 사랑놀이라니 도저히 참을 수가 없다고 생각한 그는 곧장 안방으로 뛰어들었다. 분노에 겨워 부엌칼을 높이 쳐들어 이불속으로 깊숙이 찔러가려던 찰나 이번에는 벽으로 붙인 ‘忍’자가 눈앞에서 선명하다.

새삼 ‘忍’자를 보고는 망설일 때 머릿속으로부터 천사가 나타나 ‘참고! 또 참아라!’ 은밀하게 속살거린다. 그러기에는 부화가 머리끝까지 치켜 올랐다. 머리 높이 치켜든 부엌칼이 섬뜩한데 이번에는 악마가 나타나 망설이는 마음을 부추여 단숨에 찌르라고 연신 부채질이다. 어떻게 한다. 이대로 찔러 말아! 실타래처럼 뒤엉켜서 갈등이다. 그와는 달리 잠시 행동을 멈춘 그가 잠시 생각에 잠겼다. 심한 갈등 속에 마침내 높이 치켜든 부엌칼을 맥없이 내렸다. 그때 잠결에 이상한 낌새를 느꼈는지 잠을 깬 부인이 눈을 동그랗게 뜬다. 반가움에 겨워 당장이라 품에 안길 듯 말을 더듬는다.

“여~ 여보~ 다~ 당신! 언제 왔어요! 그리고 무섭게 손에든 부엌칼은 다 뭐예요?” 눈을 비비며 상체를 일으킨다. 적반하장도 유분수라고 외간남자를 끌어들여 바람을 피운 주제에 어떻게 이렇게 뻔뻔할 수가 있단 말인가? 너무나 기가 막혀 말까지 더듬는다.

“다~ 당신이 나~ 나~ 나에게 어떻게 이~ 이럴 수 있단 말이요!” 부인을 쏘아붙이는데 가슴 뜨거운 눈물이 핑 돈다. 사지를 부들부들 떨며 천장을 올려다보는데 노란 눈 가득하게 ‘忍’자가 선명하다. ‘수신제가치국평천하(修身齊家治國平天下)’라! 집안 단속도 마누라 단속도 제대로 하지 못한 내가 후일 돼지 목에 진주 목걸이라고, 정승이면 어떻고! 판서가 다 무엇이란 말인가? 다 부질없는 것, 부엌칼을 움켜쥔 손에 스르르 근육이 풀어지고 있다.

“내가 뭘요!” 반문하는 부인은 뜨악한 표정으로 눈을 동그랗게 뜨더니 옆에서 잠든 외간남자를 향해

“야~ 이년, 이것아 그만 자고 일어나!” 옆구리를 ‘꾹꾹’ 찔러서 쥐어박자 그제야 잠자던 사내가 부스스한 모습으로 이부자리를 들치는데 몹시 낯익은 얼굴이다. 누군가하고 찬찬히 생각을 더듬어서 살펴보는데 잘 잤다는 표정에 사내가

“어~ 형부 왔네! 언니 말로는 늦을 거라던데! 형부는 언제 왔어요!” 양팔을 천장이 낮아라! 늘어지게 치켜 올려 기지개다.

그랬다. 부인 옆에서 함께 잠든 이는 그가 오해한 외간남자가 아닌 처제였다. 남편이 볼일이 있어 집을 비우자 심심하다며 부인은 여동생을 불렀다. 길을 오는 동안 여동생은 아녀자의 몸으로 이래저래 귀찮은 일이 생길까 싶어 남장으로 왔다. 그리고는 피곤을 핑계로 남장을 풀기도 전에 언니 옆에서 잠이 든 것이다. 결국에 그는 한때의 욱하는 마음을 참을 ‘忍’자를 되새겨 살인이라는 악업으로 벗어난다. 후일 점쟁이의 예언대로 벼슬길에 나아갔고 정승반열에까지 올랐다질 않는가?

마님이 볼 때 며느리 사랑이 어째 시아버지만 가능하겠는가? 게다가 사돈 내외마저 돌아가시고 보니 고아나 다름없다. 어렵고 곤궁한 제 식구를 식구가 아니면 누가 있어 감싸줄까? 한데 안사돈의 상(喪)을 끝낸 뒤 친정에서 돌아온 며느리가 식음을 전폐하다시피 방안에만 틀어박혔다. 저렇게 슬픔을 못 이기다가 몸이라도 상할까 싶어 마님은 좌불안석이다. 안절부절 못한다. 이래저래 걱정이 늘어진 마님이 할 수 있는 일이라고 행랑어멈을 닦달하는 것이 전부다.

그즈음 고모는 방안에 틀어박혀서 무엇을 하고 있었을까? 이틀 동안 방안에서 두문불출인 고모는 허름한 보따리 하나를 마주하고 있었다. 오전 나절부터 오후 나절에 이어 다음날 오전까지 뚫어지게 바라보던 고모가 점심상을 물린 뒤 천천히 매듭을 끌렀다. 보따리를 풀고 보니 위로부터 할머니가 입던 옷가지 두어 벌이 가지런하고 그 아래로 허접스러운 종이뭉치가 차곡차곡 쌓여서 일목요연하다.

덕지덕지 내려앉은 찌든 먼질랑은 입으로 호호 불고, 손으로 쓰다듬어가며 조심스럽게 펼쳐서 첫 장을 봐도 내용을 알 수 없고, 다음 장도 보아도 알 수가 없기는 마찬가지다. 혹시 알아볼 수 있는 것이 있으려나 싶어 한 장, 한 장을 조심스럽게 들추어 끝까지도 내려가도 모르기는 마찬가지다. 고모가 느끼기에 맨 위장은 그런대로 체계가 있어 보였지만 밑을 내려갈수록 난해하기만 하다. 그중 제일 밑의 몇 장은 색깔조차 누리끼리하게 빛바랬다. 헤지고 낡아서 곧장 바스러질 듯 먼지가 풀썩 인다. 한데 이상한 이 도형들은 다 무엇이란 말인가? 상형문자인가? 아니면 갑골문자(甲骨文字)나 전서(篆書)? 그도 아니면 미상불 언제 어느 때 소리소문없이 외계인이라도 다녀갔단 말인가? 종잇장 가득 괴발개발에 지렁이가 기어 다니듯 어지러운 연필 자국만 가득하다. 어디가 위며 어디가 아래란 말인가? 빙빙 돌려가며 요모조모 뜯어보아도 도대체가 모르겠다. 지식이 얕아서 인가 해석이 불가하다. 아는 것이 없어서인가 형체조차 헤아리기가 어렵다.

벌써 저녁나절인가? 햇귀가 희부연 봉창을 무람없이 바라보며 곰곰이 생각에 잠기는데 그것은 고모가 병석에 누웠을 적에 할머니가 밤을 잊어가며 작성해 온 종이뭉치다. 틈틈이 짬이 날 때면 꺼내 보며 고개를 갸웃, 생각에 잠겨 물끄러미 내려다보던 서류꾸러미다. 가물거리는 호롱불 아래 몽땅 연필심에 침을 발라서는 종이가 찢어지도록 꾹꾹 눌러서 쓰고, 엄지손가락에 튀튀, 침을 발라 지우기를 반복하던 종이 쪼가리다. 잠결에 언뜻언뜻 환영인 듯 호롱불 앞에 앉았던 할머니! 어느 날은 오는 졸음에 겨워 손등으로 연신 두 눈을 비볐고, 어느 날은 주먹으로 머리를 쿵쿵 쥐어박다가 부지불식간 밖으로 나갔다. 다시 방문을 연 할머니의 얼굴로 물방울이 주렁주렁하다. 잠을 떨치느라 세수 끝인지 치맛자락을 와락 끌어당겨서는 얼렁뚱땅 얼굴을 훔친다. 그렇다고 멈추는 날은 없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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