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48)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48)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12.25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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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아가 너를 믿는다. 저 달이 기울기까지는 기어이 내 품으로 돌아오리라고!
저승길에 들면 염라대왕 면 전서 따따부따 죄를 따지기도 전에 유황불 지옥행이다
마음의 티끌이야 되겠지만 문제는 본인의 의사가 더 중요하단다,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첨성대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아이고 애~ 새아가~ 아서라~ 그 일이라면 이 시에미 몫이지! 죽으면 썩이질 몸뚱이를 아끼고 놀려서 뭣하게!” 집안일에 손이라도 보탤라치면 복중 태아만 신경 쓰라며 손사래다. 그 와중에 밤마실 놀이에 재미가 붙어 달이라도 중천 뜰 참이면 마당 가장자리에 나와 무람없이 서성거린다. 어느 골목서 며느리의 뽀얀 얼굴이 보일까 싶어 안달 난 표정으로

“애야~ 며늘 아가야~ 이 시에미가 욕심이 많아 네게 씻을 수 없는 죄를 지었구나! 세상 이치에 따라 네게 아들을 맡겼건만 여태도 품 안의 자식으로 알았구나! 못나도 지지리도 못나서 지난날 시어머니에게 받은 설움을 잊지도 않고는 내 기분마저 보태 갖은 악담으로 네게 화풀이를 했구나! 미안쿠나! 한데 이 시간까지 너는 당최 어디를 갔느냐? 이 밤을 두고 그 누가 입에 담아 뭐라고 하든 내 마음은 철석이다. 나는 새아가 너를 믿는다. 저 달이 기울기까지는 기어이 내 품으로 돌아오리라고! 그래도 혹시 싶어 밤잠을 잊고 네 너를 기다리느라 애간장은 봄눈 녹듯 소리 없이 녹아나고, 심장은 절로 벌렁벌렁, 애가 달아서 제명에 못 죽을 것 같구나! 애~ 새아가야!” 하현달이 서산으로 기울 때까지 마당이 비좁다 바장거리다간 눈물 촉촉하게 회한에 젖는다.

그렇다고 평소 음전하다고 동네 자자하게 칭찬을 들어오던 처녀가 딴마음을 먹을 리는 만무했다. 배를 탔던 날을 기억으로 해마다 정성으로 제사상을 차린다. 천도제(薦度祭:죽음의 부정을 풀고 죽은 사람의 넋을 위로하여 저승으로 인도하기 위해서 행하는 제례)에 이어 긴긴밤을 뜬눈으로 지새 온 나날을 보상으로 지아비에 대한 그리움을 눈물로 달래가며 처연하게 상주 노릇이다. 이 모두는 임신을 덕택으로 서방을 잡아먹은 재수 옴 붙은 년이란 손가락질에 시집에서 쫓겨나지 않았다는 것과 남동생이 마을 처녀와 사귀는 바람에 여전처럼 마을에서 살 수 있었다는 것이다. 이후 아낙네들이 주저리주저리 읊어내는 이야기의 중심은 마을의 자질구레한 일상사로 방향을 튼다. 꼬리에 꼬리를 문다. 대부분이 마님을 두고 험담이다. 헐뜯느라 입이 아플 지경이다. 없는 가운데서는 나라님도 욕한다는데 마음껏 살을 붙여가며 게거품이다.

이야기 중 양념처럼 섞이는 주된 내용은 먹고 살기 힘들다는 푸념이다. 엎친 데 덮친 격으로 어느 집은 아이는 수개월째 시난고난 자리보전이건만 의원에게 보이지를 못해 병명조차 모른다는 것이다. 수중에 가진 돈이 없다 보니 엄두를 못 내는 실정이란다. 남의 일이 아니라 꼭 내일 같다며 한목소리다. 또 옆집 아이는 풀뿌리 죽으로 연명을 하다 보니 얼굴 전체가 싯누런 것이 황달기를 보여 맨정신으로는 차마 볼 수가 없을 지경이란다. 이런저런 이야기 끝에 마님을 들어 원망은 물론 냉혈한이라 인정머리라곤 눈곱만큼도 없다는 말을 줄줄이 늘여놓는다. 마을 아낙네들로부터 이런저런 험담을 듣고 있노라니 참담하기 그지없다. 그렇게 한참을 수다 끝에 아낙네들은 저마다 치맛자락을 훌훌 턴다. 한바탕 입방아로 수다를 떨었더니 속은 시원타며 일터로 돌아갔다. 하지만 쉬 자리를 뜨지 못하는 마님이다. 한참이나 혼이 나간 듯 담벼락에 기대어 이마를 짚고 섰다.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어디서 날아왔는지 참새 한 마리가 경박한 날갯짓으로 담장을 넘는 소리에 마님은 겨우 정신을 차릴 수가 있었다.

어떻게 왔는지도 모르게 방으로 돌아온 마님이 멍하게 앉았는데 도대체가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인간 백정도 아니고 나로 인해 몇 명이나 생목숨을 잃었단 말인가? 그동안 음으로 양으로, 입방정으로 지은 죄가 쌓이고 쌓여 태산을 넘어 보인다. 미구에 저승길에 들면 염라대왕 면 전서 따따부따 죄를 따지기도 전에 유황불 지옥행이다. 덕적(德積)을 쌓아도 모자랄 판에 연일 악업을 쌓고 있다는 생각에 갈피를 잡을 수가 없다. 결국에 멀쩡한 두 집안을 알량한 질투심 때문에 풍비박산을 낸 꼴이다.

“어이구 인애야~ 인애야~ 청춘이 구만리 같은 너를 두고 나는~ 나는~ 이 일을 어떡하면 좋단 말인가?” 이 일을 어떻게 해야 하나 그래! 중얼거리는 마님이 궁리에 궁리를 거듭해 보건만 할 수 있는 일이라곤 아무것도 없다. 사는 곳을 알지 못하는 인애는 그렇다 치더라도 한시가 바쁘게 아픈 아이 집으로 돈을 보내고, 황달기가 완연한 아이 집안으로 양식을 보내야 하는데 방법도 길도 모른다. 일자무식의 자신에게 스스로 기가 차다. 지금껏 세상을 살면서 무얼 보고 무얼 배웠던가? 그럴싸한 집안을 동경으로 시집이라 와서 사람들 위에 군림하여 위세만 부린 꼴이다. 세상살이 이치를 몰라도 너무 모른다는 생각이다. 어제까지만 해도 세상을 달관한 듯 보였으나 우물 안 개구리와 다름없다는 생각이다. 우물을 둘러친 둘 무더기 위로 보이는 한 줌 하늘이 전부로 알고 산 죄업이라 눈앞이 깜깜하다.

구업으로 쫓아낸 두 집만 해도 그렇다. 소문을 좇는 중에 영감이 늦바람을 피운 줄로만 알았다. 귀가 얇아 남자들이란 문지방 넘을 힘만 있고, 숨결만 붙었다면 통나무에 치마를 걸쳤다 할지라도 뭇여자라며 찝쩍거린다는 속성에 현혹된 때문이다. 나중에 알고 보니 영감은 영감 나름대로 적선을 한답시고 마을을 살펴보는 중에 일어난 우연이었다. 그 우연을 늦바람이라 곡해하여 몇 사람이나 생목숨을 끊었단 말인가?

“어~휴 ‘인애’ 아버지! 인간 같잖은 이년이 속이 좁아도 이렇게도 좁아터져 당신의 진실한 사랑을 저버린 것도 모자라 사지로 몰아넣었습니다. 그런 이년이 후안무치에 인면수심이지 어찌 사람이라 할 수 있을까요? 오롯하게 먹을 것만 밝히는 암사마귀와 무엇이 다를까요?”

처녀 적, 죽은 ‘인애’ 아버지와 마님과는 연인사이었다. 혼기 찰 즈음 마을 앞, 작은 시내를 사이에 두고 둘은 눈이 맞았다. 집안 형편도 엇비슷하여 무난히 한가정을 이루라 꿈에 젖었다. 마을 사람들도 둘의 만남을 두고 천생연분이라며 음으로 양으로 지원사격을 아끼지 않았다. 한데 사람의 한 치 앞을 그 누구라서 예견하여 알 수 있을까?

둘의 사랑이 한창 무르익던 어느 날 마님 앞으로 뜻밖의 청혼이 쇄도했다. 남쪽으로 간 제비가 박 씨를 물고 오듯 날아들었다. 매파가 가지고 온 청혼을 접한 집안은 그야말로 난리가 났다. 어떻게 이런 일이 가능할까 싶었다. 인근을 통틀어 최고의 부잣집에서 생면부지, 한미한 집안의 처녀를 며느리로 맞고 싶다는데 어찌 아니 그러하겠는가?

당장에 대소 가내의 일가친척 중 행세깨나 한다는 어른들이 소집되어 한자리에 모여 않았다. 이미 정해진 답에 구수회의로 머리를 맞대 의논에 의논을 거듭한 결과 청혼을 뿌리칠 수가 없다는 것이 중론이다. 한때의 불장난은 끄면 그만이란다. 몸을 허락한 것도, 또 임신도 아닌데 무엇이 문제냐는 것이다. 그까짓 손목 정도야, 입술 정도야 지금 세상에서 흠이 될 것이 없단다. 깨끗한 물로 뽀드득뽀드득 씻으면 그만이란다. 마음속의 티끌로야 남겠지만 문제는 본인의 의사가 더 중요하단다, 하지만 마님도 싫지 않은지 미소만 방그레 지을 뿐 뜨뜻미지근한 반응이다. 부모의 결정에 전적으로 따르겠다는 표정으로 야릇한 미소다. 이미 결론을 예상하여 마음속으로 계산을 끝냈다는 듯 여유로운 표정이다. 농사일에 찌든 농투성이 마누라보다는 백번은 났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전에 없이 수다가 늘고 일일이 동무를 찾아가는 발걸음조차 꽃길을 걷는 듯 상큼하여 가볍다.

들려오는 소문 등을 종합해 볼 때 둘의 애정이 태산같이 높고, 바다처럼 깊어 보여 강하게 거부할 것이란 상상에서 조심스럽게 안심이다. 딸의 행복을 위한다는 알량한 구실을 무기 삼아 부모의 과한 욕심이 멀쩡한 딸내미를 잡을까 싶어 마음이 불안하고 염려스러웠는데 쉽사리 결정이다. 그러자 기다렸다는 듯 마님은 그날로 이별을 통보다. 일말의 양심은 있어 직접 만난다기보다 인편을 통하는 방법을 썼다. 적삼을 자른 천 조각에 오색실을 가위로 잘라 고이 싸서 보내는 것으로 마음을 접으라며 홀가분하게 털어버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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