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최인호 '문장의 무게'
[장서 산책] 최인호 '문장의 무게'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3.11.08 15: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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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저자 최인호(崔仁虎)는 1968년 강원도 양양에서 태어나, 연세대학교 국어국문학과와 동대학원 석사과정을 졸업했다. 현재 메가스터디 강사이자 작가다. 2015년에 출간한 ‘부유하는 단어들’은 제4회 한국독서검정능력시험 대상 도서로 선정되었다.

저자는 고전이라는 ‘책’이 아닌 고전의 ‘한 문장’을 통해서도 가물어가는 우리의 정신과 영혼에 단비를 뿌려줄 수 있다는 생각으로 이 책을 썼다. 저자가 인용한 고전 작품 속의 문장과 그 문장에 대한 사유를 소개한다.

1. 내가 이룩해 놓은 것은 고독뿐이다. (《일기》, 프란츠 카프카)

(1) “나는 오히려 혼자 있어야 한다. 내가 이룩해 놓은 것이라곤 고독해진 것뿐이다.”

무엇이 카프카를 그렇게 고독하게 만들었을까? 왜, 그는 자신에게 고독을 명령했을까?

이 문장에서 나는 역설을 보았다. 카프카를 고통 속으로 밀어 넣은 것은 ‘고독’ 그 자체가 아니라 사람에 대한 그리움의 열병이었다는 것을. 그는 그리움을 파괴하기 위해 고독을 불러들였고, 그렇게 고독은 그가 되었다. 그는 유대인 그리고 폐결핵이라는 두 가지 질병을 앓고 있었다. 그 두 가지는 운명의 낙인인 양 그를 떠나지 않았다. 그의 핏속에 고독이 단단한 씨앗으로 들어앉아 있었다. 그것들이 그의 불안을 만들었다.(13쪽)

(2) 우리는 모두 벌레다. 누에고치의 애벌레다. 자신의 심연에 가득 찬 고독을 토해내지만 그것은 결국 자신을 사람들로부터 차단하는 단단한 벽, 고독이 될 뿐이다. 우리는 누군가에게 질문한다. 하지만 답은 오지 않는다. 모두 질문만 할 뿐이다. 질문은 누에고치가 토해내는 실이다. 대답을 얻지 못한 질문들은 나를 감싸며 조여 오는 고독이 된다. 그래서 우리는 방 안에서만 존재해야 하는 세계다.

그 속에서 우리는 운다. 이유 없이 하루에도 몇 번씩 운다. 하지만 아무도 울음소리를 듣지 못한다. 고독이 소리를 먹어버리기 때문이다. 애벌레의 주름은 그 소리를 먹고 자란다. 그렇게 불안은 고독으로 깊어지고 늘어만 간다.(15쪽)

2. 사랑은 은유로 시작된다. (《참을 수 없는 존재의 가벼움》, 밀란 쿤데라)

너무나 투명한 언어들이 여기저기 날아다닌다. 투명한 것은 무게가 없다. 그것들은 참을 수 없을 정도로 가볍다. 속이 훤히 들여다보이는 언어들, 그것들은 깨지기 쉽다. 깨진 것은 사라지는 것이 아니다. 그것은 파편이 되어 상대의 가슴에 뿌리를 내린다. 그런 사랑은 아프다. 상처투성이다. 하지만 상대의 마음이 보이지 않을 때, 볼 수 없을 때 사랑은 깊어진다. 애매한 단어들 속에는 시간의 거리가 들어있다. 그 단어, 은유적 단어를 풀어야 하는 고뇌의 시간이 사랑의 길을 만들어준다. 그 길 위에는 단어가 주는 애매함만큼이나 예측할 수 없는 다양한 감정들이 혼재해 있다. 하지만 어떤 감정도 나쁜 것은 없다. 애매한 것들이 갖는 개방성은 오히려 사랑하는 이를 정형의 틀 속에 가두려는 고집스럽고 악마적인 본능과 싸울 수 있는 힘이 되어 주기 때문이다. 애매한 언어, 명백해 보이지만 쉽게 읽을 수 없는 몸의 유혹이 시적 은유로 그녀에게로 걸어간다.(25쪽)

3. 인간은 파멸당할 수 있어도 패배할 수는 없다. (《노인과 바다》, 헤밍웨이)

(1) 무엇이 우리를 파멸시킬까?

아마도, 그것은 우리의 ‘성공’이 아닐까 싶다. 이것이 사실이라면 인간은 모순의 존재이리라. 우리는 ‘성공’을 위해 망망대해 위로 나만의 ‘작은 배’를 띄운다. 항구로부터 멀어지고 바다가 깊어질수록 그만큼의 성공도 커질 것이라는 희망의 끈을 우리는 놓지 않는다. 배를 심하게 흔들어대는 풍랑조차도 더 큰 물고기를 잡기 위한 동반자일 뿐이라며 스스로 위로한다. 이들은 보통의 사람들이 깊은 바다까지 나가려 하지 않는다는 것을 알고 있다. 그래서 늘 혼자 배를 띄운다. 아마도 그들에게 친구는 파도를 일으키는 바람과 어둠을 지켜야 하는 달이 전부일지도 모른다. 그렇게 그들은 바다 위를 홀로 떠다녀야 한다.(71쪽)

(2) 외로움이 시간의 주름을 만들 때 성공은 서서히 우리 곁으로 다가온다. 외로움은 성공을 다룰 수 있는 성숙함과 안목을 시간의 주름 속에 깊이 감추어 두었던 것이다. 노인의 이마 위에 깊게 파인 주름과 그물처럼 갈라진 손가락의 굳은살이 커다란 청새치를 낚아 올리는 것처럼 말이다. 성공은 외로움을 견딘 순간에만 찾아온다는 것을 노인은 잘 알고 있었다. 그래서 그는 “희망을 버린다는 것은 어리석은 일이야. 더구나 그건 죄악이거든.”이라고 중얼거리며 외로움을 견디고 또 견뎠다. 외로움과의 긴 싸움이 아주 강한 낚싯바늘을 만들었던 것이다. 하지만 그렇게 긴 외로움의 끝자락을 물고 올라온 성공의 희열, 그것은 찰나일 뿐이다. 그것이 찰나의 순간이라는 것을 알면서도 우리는 그 순간에 눈물이 흐르는 것을 막을 수 없다.(73쪽)

(3) 성공은 오직 나의 것이기 때문에 누구도 그것을 함께 지켜주려 하지 않는다. 누군가 성공을 함께 지켜 주리라고 기대하는 어리석은 사람은 없을 것이다. 타인은 성공을 지켜주는 존재가 아니라 호시탐탐 그것을 빼앗으려는 상어 떼라는 것을 누군들 모르겠는가. 성공이 큰 만큼 외로움과 불안도 커지고 그것을 빼앗으려는 적들의 수도 함께 많아진다. 청새치의 진한 피 냄새를 맡고 달려드는 상어 떼처럼 말이다.(75쪽)

(4) 그렇게 우리의 파멸은 시작된다. 청새치의 살이 모두 뜯겨나가는 것뿐만 아니라, 삶을 지탱해주던 작살을 빼앗기고 노마저 부러져버린다. 청새치를 지키기 위한 싸움은 청새치를 잡기 위한 싸움보다 더 큰 고통이 따르는 법. 그것이 자연의 이치일 것이다. 청새치를 잡는 싸움에는 목숨을 걸 필요가 없을지라도 청새치를 지키는 싸움에는 반드시 목숨을 걸어야 한다.

성공을 잡기 전까지는 성공이 곧 ‘나’일 수는 없다. 하지만 성공을 잡은 후에는 성공이 곧 ‘나’의 실존이 되기 때문이다. 그래서 성공을 지키는 것은 곧 나의 전부를 지키는 것이며, 성공을 빼앗기는 것은 나의 모든 것을 잃는 것이다. 그래서 성공은 죽음을 잉태한다.

특히 ‘고기가 나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 아니면 내가 고기를 데려가고 있는 건가.’라는 노인의 고민처럼, 성공이 우리를 끌고 가고 있다면, 죽음은 조금 더 빠르게 우리에게 다가올 것이다.(77쪽)

(5) 우리가 두려워해야 할 것은 ‘파멸 당하는 것’도 ‘패배하는 것’도 아니다. 그것은 파멸이 없는 삶일 뿐이다. 먼바다를 향해 홀로 출항하지 않는다면, 파멸은 없을 것이다. 그리고 노인처럼 사자의 꿈을 꿀 수도 없을 것이다. 어떤 것도 두려워하지 않고, 밀림을 한가롭게 걸을 수 있는 자유 또한 없을 것이다. 인간에게 패배가 있다면, 그것은 오직 ‘파멸 없는 삶’일 뿐이다.(79쪽)

4. 이 엄청난 혼돈 속에서 분명한 건 딱 하나야. 고도를 기다리고 있다는 것. (《고도를 기다리며》, 사무엘 베케트)

(1) ‘기다린다는 것’, 그것은 기쁨이다. 그것은 미래의 것이며, 결코 과거가 되어 사라지지 않기 때문이다. 반드시 도래할 것이라는 가능성만이 현재에 머무를 뿐, 어떤 것도 갑자기 우리 곁에 머무를 수 없다. 만약, 갑자기 다가온 것이 있다면. 그것은 우리가 기다리던 것이 아니다. 그것은 기다리지 않아도 늘 우리와 함께 하고 있는 것들이다.

갑자기가 아닌 아주 느리게 그리고 어떤 기미도 없이, 어디쯤인가에서 서성이며 오고 있는 것만이 우리가 기다리는 것이다. 그래서 우리를 설레게 하고 우리의 고통을 견디게 하는 것만이 우리가 기다리는 것들이다. 아마도, 혼돈 속의 우리에게 꿈을 꾸게 만들 수 있는 것은 기다림 그것이 유일한 것일지도 모른다.(115쪽)

(2) 그래서 우리는 ‘고도’를 기다려야 한다. 기다릴 수 밖에 없다. 꿈속에서라도 기다려야 한다. 내 속에 문제를, 내 주변의 문제를, 우리의 문제를 기다림으로 위로하고, 기다림으로 꽃 피게 해야 한다. “더 이상 희망이 없다는 것을 안다 해도 기다림은 계속된다”(《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 프루스트). 그래서 기다림의 본질은 초조함이라 말해야 할 것이다. 아니, 초조함이 없는 기다림의 대상은 태양을 동반하지 못한다. 초조함은 결코 슬픔이 아니다. 절망과도 다르다. 슬픔과 절망은 결코 기다림의 앞에 설 수 없기 때문이다.(118쪽)

(3) 그래서 기다림은 우리를 절망 없는 행복으로 이끌 수 있는 것이다. 그 행복은 미래가 마치 우리에게 반드시 선물하기로 약속하기라도 한 듯 착각하는 것에서 시작되며, 우리를 현실에서 떨어져 나올 수 있게 도와준다.(119쪽)

5. 그대가 알아야 할 모든 것들은, 이미 여행을 통해 모두 배웠네. (《연금술사》, 파울로 코엘료)

꿈을 좇아 여행을 떠나는 것이 그리 쉬운 일은 아니다. 꿈을 좇는다는 것은 현실을 버리는 것이다. 이곳 그리고 지금을 부정하고, 너머 그리고 다른 시간을 갈망하는 순간 우리는 몽상의 세계 속에 나타난 독사의 이빨에 물리게 될 수도 있다. 붉은 피를 흘리며 우리는 죽어갈 수도 있다. 그래서 꿈을 좇는 것, 여행을 떠나는 것에는 언제나 두려움이 앞선다. 익숙하지 않은 것들 속에서 떨고 있는 시선, 알 수 없는 표지판 위에서 고민하는 발걸음, 불쑥 다가오는 손들에 대한 불안감이 우리 여행을 가로막는다. 하지만 두려움과 함께 떠나야 하는 것이 우리의 운명이다. 두려움 속으로 끊임없이 던져지는 불안한 존재. 볼 수 없고, 단지 느낄 수만 있는 운명의 표지들에 의지해 조금씩 사막을 항해할 뿐이다. 만약, 두려움이 우리를 더 괴롭게 만든다는 것을 알게 된다면, 꿈을 향한 우리의 항해는 파도에 쉽게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127쪽)

6. 진정한 배움이란… 할 수 있는 것만 알면 되는 것이 아니라… 어쩌면 해서는 안되는 것까지 알아야 하는 것이다. (《장미의 이름》, 움베르토 에코)

(1) 책, 그것은 미궁이다. 작가들이 복잡하게 만들어 놓은 문장들은 미노스의 미궁이며, 우리는 그 속에서 헤매고 있는 테세우스일 것이다. 식인괴물 미노타우로스를 죽이고 다시 빠져나올 수 있게 도와준 그 실타래는 어쩌면 영원히 우리에게는 주어지지 않을 수도 있을 것이다. 테세우스와 달리 우리는 그 실타래를 우리가 스스로 찾아야 하기 때문이다. 우리는 조심스럽게 계단을 밟고 더 깊은 곳으로 내려가야 하며, 알 수 없는 방들을 지나면서 숨겨진 수수께끼를 풀어야 미궁에서 탈출할 수 있다. 책 속에, 미궁 속에, 삶의 미로 속에 우리는 갇힌 것이다.

지나온 흔적들을 되새기면서 지금의 나를 확인하는 것만이 앞으로 나아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다. 흔적을 놓치는 순간 흔적만 읽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나아갈 길, 그리고 돌아갈 길을 잃어버리게 된다. 흔적은 시간이 만든 유일한 실타래이기 때문이다.(209~210쪽)

(2) 우리의 삶도 미로다. 우리를 늘 갈림길 위에 서게 하고, 잘못된 길로 인도하기도 하며, 거울에 반사된 허울에 현혹되어 오던 길을 되돌아가게 만들기도 한다. 결코, 곧게 뻗어 선명하게 우리 앞에 나타나는 길은 없다. 안개 속에서 조금씩 그리고 흐릿하게 형체를 드러내는 길들만이 우리를 기다린다.

그래서일까? 어쩌면 미로 같은 삶 속에서 ‘눈’은 필요 없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든다. 안개 속을 걷기 위해서는 ‘눈’보다 ‘흔적’을 기억하는 성찰이 더 필요할 뿐이다. 내가 한 번도 가보지 않은 미로, 혹은 아직 결정되지 않은 미래의 길을, 가지 말아야 할 길 조차도 갈 만한 길이라고 속삭이는 것, 그것이 삶으로서의 책이다.(218쪽)

(3) 책을 펴는 순간, 문장들이 책 밖으로 나와 안개 속을 유유히 걸어간다. 나는 거저 그들이 남긴 발자국을 보며 걷는다. 움베르토 에코가 눈이 먼, 도서관장인 호르헤 루이스 보르헤스의 수많은 문장의 미로 속으로 들어가 결국 《장미의 이름》을 만들었듯이 말이다.(219쪽)

7. 함께 말할 만한데 말하지 않으면 사람을 잃고, 더불어 말할 만하지 않은데 말하면 말을 잃는다. (《논어》, 공자)

말은 과연 누구의 것일까? 나의 것인가 아니면 타자의 것인가.

‘나’라는 공간에 잠시 머물다 누군가를 향해 걸어나와 가던 길을 아무렇지도 않게 떠나가 버리는 것을 보면 누구의 것도 아닌 것처럼 보인다. 하지만 나의 말이라고 생각한 말, 나의 입을 빌어 불어내는 소리가 의미를 만들어 타자에게 건네지는 순간, 그것이 타자의 영혼을 흔들어놓았다면 그것은 타자의 것이 아닐까 생각되기도 한다. 또한 타자에게로 향했던 말들이 다시 내게로 되돌아와 나의 온몸에 생채기를 내기도 하는데 그렇다면 그 말은 내 것이라고 말해야 하지 않을까?

그래, 그렇다면 말은 나의 것이면서 나의 것이 아니고 타자의 것이면서 타자의 것이 아닌 것이라 해야 한다.

말들은 떠들고 말들은 숨이 차다. 말이 멈추는 곳은 어디에도 없다. 시간이 잠들 때도 말은 깨어있다. 나를 향한 말이든 나를 빗겨가는 말이든 내 귀는 잠들어서는 안 된다. 그래야 나의 말이 생기고 그것이 사람을 만들고, 그렇게 세상이 만들어지기 때문이다. 이때 나의 말은 내가 만드는 것이 아니다.

공자가 말했듯 ‘함께 말할 만한 사람’의 말이 나의 말을 만들고 그럴 때 사람은 모이고 말은 커진다. 춘추전국시대, 말이 너무 많았다. 하지만 그 수많은 말들은 ‘말할 만한 사람’들에게 향하지 못한 탓에 허공을 맴돌다 산산이 부서지거나, 진실을 포장하고 거품처럼 키워 세상을 혼돈 속으로 밀어 넣는 거대한 무기가 되곤 했다. 말과 사람이 넘쳐나는데 ‘말할 만한 사람’은 없었고 그래서 할 말도 없었던 것이다. 공자에게 ‘말할 만한 사람’은 누구였을까?(275~276쪽)

8. 나는 내가 사유하는 동안에만 존재한다. (《성찰》, 데카르트)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며 살아야 하는가? 아니면 우리는 무엇을 생각하고 있는가? 아마도 우리는 생각을 하고 있지만, 그것은 생각이 없는 생각일지도 모르겠다. 생각이 나를 존재케 한다는 데카르트의 말에 의한다면, 우리는 생각을 위해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생각에 따라 우리의 존재가 결정되어야 한다. 분명 그렇다. 무엇을 생각하느냐에 따라 우리의 존재는 달라진다. 우리는 이미 결정된 존재가 아니다. 샤르트르는 ‘세상에 던져진 존재’라고 하지 않았던가. 그냥 아직 그 무엇도 아닌, 어머니의 뱃속에서 자유롭게 헤엄치던 그 모습과 결코 다르지 않은 순수의 덩어리에 지나지 않는다. 즉 누군가에 의해 ‘결정되어버린’ 존재가 아니라 오로지 ‘나’에 의해 ‘만들어질’ 가능성으로서의 존재인 것이다. 그래서 우리는 생각하는 순간, 순수에서 벗어나 생각의 크기나 무게만큼 혹은 방향대로 무언가로 만들어진다.

하지만 우리는, 과연, 나를 만드는 생각을 하고 있는 걸까. 혹여 나의 존재를 파괴하는 생각의 노예가 되어 있지는 않은가? 그 생각의 존재부터 의심해야 할 것 같다.

이 책에서 저자는 ‘고전 작가’와의 대화, ‘고전 작품 속의 인물’과의 대화, 혹은 ‘작품 속의 인물’이 되어 하나의 문장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이 책을 읽는 독자들도 그들과 대화하거나 노래할 때 진정 고전의 한 문장 속으로 들어갈 수 있으며, 그 길은 독자들을 새로운 우주의 세계로 안내해 줄 것이다.(337~338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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