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서 산책] 김순옥 '초보 노인입니다'
[장서 산책] 김순옥 '초보 노인입니다'
  • 김대영 기자
  • 승인 2024.01.17 16:27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여전히 젊은 채로 '늙음'을 맞닥뜨린 초보 노인의 노년기 선행 학습

저자 김순옥은 1957년 경기도 연천에서 태어났다. 2006년까지 초등학교 교사로 일했다. 1녀 1남을 두었고, 은퇴 후 남편과 함께 늙어가고 있다.

이 책은 제10회 브런치북 출판 프로젝트에서 대상을 수상한 원작 〈나는 실버아파트에 산다〉를 바탕으로 만들어졌다. 목차는 ‘들어가며, 1장 어쩌다 실버아파트로, 2장 실버아파트의 주민들, 3장 실버기의 초입에서, 나가며’로 되어 있고, 1장은 12편, 2장은 14편, 3장은 16편의 에세이로 구성되어 있다. 공감이 가는 글 몇 편을 소개한다.

1. 이곳엔 천사가 산다

여느 세상들과 마찬가지로 실버아파트에도 다양한 사람들이 산다. 이곳에도 심술쟁이 노파, 고집불통 영감님이 많다. 치매가 시작되는 노인이 있고, 홀로 남은 인생의 고독을 이웃과 나누는 멋진 노익장 언니들이 있다. 그리고 이제 실버의 세계에 들어서서 나처럼 버벅대는 젊은 노인들도 많다.

살아가는 삶의 모습과 향기는 여느 세상과 비슷하나 한없이 조용하고 담담한 곳. 왈칵 울음을 터뜨릴 만큼 서러운 일도, 울화통을 건드릴 만큼 화나는 일도, 이치를 따져 가며 목청을 높일 일도, 견딜 수 없이 기쁘거나 슬픈 일도 모두 숙성되는 이곳.

늙는다는 게 이런 건가? 그러나 단순히 늙음이 답은 아니었다. 실버아파트에 살면서 만난, 기도서 여인과 비슷한 사람들이 머릿속을 스쳐갔다. 각각 다른 방식이었으나 남을 이해하고 생각하며 결국에는 사랑하는 마음마저 느끼게 하는 사람들이었다.

아마도 이곳엔 천사들이 꽤 입주해 있는 모양이다.(113~114쪽)

2. 그곳을 떠났나?

낡은 벤치에 앉아 따뜻한 물을 마셨다. 주변은 온통 흰 눈이었는데 눈을 들어 보니 익숙한 짙푸른 하늘이 다가와 있었다. 손그늘로 햇볕을 가리는데 생각지도 않게 실버아파트가 스쳤다. 그것은 아주 느린 모노레일을 타고 보며 지나는 풍경 같았다. 내가 그곳에 살았었다는 사실이 비현실적으로 느껴졌다. 어딘가 모를 곳을 꿈에서 다녀온 느낌이었다.

정말 그곳은 특별한 세계였다. 평범한 사람들이 평볌하게 살아가는 평범한 아파트였음에도 다른 세계였다. 실버들만의 세계.

한겨울의 눈 속에서 실버아파트는 봄밤처럼 포근했으나 아스라했다. 그래, 언제고 떠돌이였던 나는 또 언제쯤 실버아파트를 향해 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도 모르겠다. 내 삶이 지루할 정도로 평안하며 기억이 초저녁처럼 어스름할 때쯤일까. 그곳을 떠나던 마음이 추억으로 되돌아설 때일까. 나와 남편의 나이가 더 이상 도시를 견뎌 내지 못할 때일까.

그곳을 떠나왔어도 아직 그곳을 떠나지 못하고 있는 듯한 개운찮은 느낌은 또 다른 낯섦이었다.(156쪽)

3. 노인이 되는 법

우리가 노인인 걸 우리만 모르는 게 맞는 것 같았다. 아니, 각자 알면서도 모른 척 지나는 것인지도 몰랐다. 어쩌면 노인이 홀대받는 시대이기 때문에 노인이 되어 가는 현실을 애써 외면하고 있는 것일까?

나의 부모 세대가 쉰이면 흔연히 노인의 삶을 받아들였던 것과 달리 나는 환갑을 넘기고도 스스로 노인이란 사실을 남을 통해 알아 가고 있다. 가르쳐 주지 않으면 스스로 알아 가기 어려운 세대인가 보다. 우리는.

어쨌든 그렇게 노인이 되는 법을 배워 간다.(168쪽)

4. 노는 중

우리는 모두 은퇴한 이후의 삶을 살고 있었고, 그 삶 또한 만만치 않음을 알고 있었다. 대개는 한두 가지의 질병에 시달리고, 간간이 찾아오는 우울과 불면에 힘든 하루를 보내며, 직장을 은퇴하고 아이들이 독립한 후 내 존재의 의미에 대해 끊임없이 묻고 가끔씩 절망하기도 하다가 또 스스로 위로해 가며 살아가고 있었다.

무엇인가 하염없이 뒤쫓는 친구가 있고, 맥 놓고 있다가 이것저것 기웃거리는 친구도 있으며 나처럼 하루하루를 아무렇지 않게 노는 친구도 있다. 어떤 선택도 각자의 몫이기에 우리는 기탄없이 떠들다가 각자의 삶으로 돌아갔다.

나이가 들어가는 우리는 각각 자신의 재능대로, 자신의 기질대로 열심히 삶을 견뎌 내는 중이었다. 어떻게 견디는지는 중요하지 않았다. 놀든 일하든 배우든 실패하든 모든 삶은 그 자체로 소중하지 않은가.(195쪽)

이 책은 이제 막 노년기에 접어든 60대 저자의 솔직한 수기이자 노년기에 대한 섬세한 관찰기이다. 입주민이자 관찰자로서 그려 내는 실버아파트의 풍경과 평온하고도 다이내믹한 노인들의 면면은 우리의 예상을 벗어난다. 비슷한 혼란을 품고 노년기에 들어선 ‘젊은 노인’들, 그리고 언젠가는 지나게 될 인생 3막의 여정이 궁금한 모든 이들을 위한 이야기이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