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75)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75)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8.01 10:0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그간 마음속에 의문으로 품었던 이야기가 아들의 입으로부터 터진 봇물처럼, 소설을 쓰듯 줄줄이 흘러나온다. 장황한 이야기가 끝을 맺을 즈음 옆자리에서 가만히 듣고 있던 팔촌인지 몇 촌인지도 모르는 동갑내기 친척이 진지하게 물었다.

“그럼 아재요!”하고는 맨 정신에 그 여자와 잠자리를 같이 한 적이 있느냐는 것이다. 살을 섞어 합궁을 하고 찐하게 살 냄새를 맡아 봤느냐는 것이다. 그 대목에 이르자 아들도 머뭇머뭇 얼버무리기만 한다. 하긴 어느 날인가 딱 한번 맨 정신으로 살을 섞기는 섞었다.

햇살도 수굿한 오후나절 아들이 방문을 열자 그녀는 천성대로 이불 위에 큰대자로 가로누워 세상모르게 오수를 즐기고 있더란다. 그러자 내 마누란데 싶어 갑자기 욕정이 끓어오르더란다. 고자도 내시도 아닌 멀쩡한 사내로 억눌려온 시간을 보상받으려는 생각에 순식간에 눈이 뒤집히더란다. 그러자 아들은 옳다 거니하고 삼일 굶은 과객 앞의 밥상인양 여겨 쾌재를 불려 단숨에 옷을 벗겼다는 것이다. 하지만 그 다음이 문제였다. 그녀를 만난 지금까지 그렇게 화가 났다 슬픈 표정의 얼굴로 변덕이 죽 끓듯 하는 모습은 처음이었다. 늘 산후조리가 잘못되었다며 징징거려 평소 몸에 손도 못 타게 하는 것도 이상했지만 아무 때나 부부의 정을 나눈 것이 무어에 그리 슬펐을까? 아득바득 핏줄을 이어받은 아기까지 낳았다는 여자의 행동치고는 너무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쩔 줄 몰라 넋이 나간 듯 한참이나 멍하게 앉았던 그녀가 도끼눈으로 새파랗게 치켜뜬다. 고양이 앞의 쥐 신세다. 굶주린 늑대가 여우의 탈을 쓴 모양으로 눈에서 불꽃이 튀기는 형상이다. 가슴이 섬뜩하고 등줄기에서 식은 땀이 흐른다. 참아 마주 볼 수가 없어 고개를 숙이는데 손톱을 고추 세워 얼굴을 파버릴 듯 앙앙불락이다. 오금이 저리는 통에 있는 정은 물론 없는 정까지 만정이 떨어지는 느낌이다.

그날 이후 한방에 기거한다는 자체가 지옥이나 다름없었다. 엄연한 부부지간이건만 한 이불을 덮는다는 자체가 어불성설로 아들은 윗목에, 그 여인은 아랫목에서 따로따로 잔다는 대목에 이르자 친척은 곧장 지독한 꿍꿍이를 품은 여자라고 했다. 처음부터 재산이 많은 집안의 사내를 물색하여 노려오던 중 아재를 대상으로 삼았을 것이라 했다. 씨앗도 불분명한 아이를 등에 업고는 계획적으로 들어왔다는 것이다. 꼴에 정절을 지킨다고 아재가 잠자리에서 정신 줄을 놓은 것은 그년이 술잔에 미리 풀어놓은 미혼약 때문이고...!, 지금껏 들은 이야기를 종합해 볼 때 틀림없다는 사실에 아들도 절로 고개가 끄덕거려진다.

지금껏 안개가 잔뜩 낀 것 같은 머릿속으로 찬바람이 싸하게 인다. 순식간에 들어나는 청명한 하늘처럼 맑아지는 기분이더란다. 순간 생각이고 자시고가 없이 자리를 박차고 일어난 아들이 급하게 어머니의 허락 득한 후 바람처럼 집을 향해 달렸다. 달리는 내내 생각에 잠겼다. 하인리히의 법칙처럼 소소한 그녀의 일상이 진즉에 오늘을 예견했음에도 무심코 넘겨온 자신을 탓했다. 시어머니를 하인 부리듯 부리는 것도 그렇고, 가정주부가 집안일은 뒷전으로 놀고먹는 것도 그렇고, 아이를 두고 유난히 유세를 떠는 것도 그랬다. 무엇보다도 이유 없는 외출을 의심했어야 했다. 주기적으로 집을 나서면 두세 시진은 행방이 묘연했다. 그때마다 어미라는 이유를 들어 아기는 필히 대동했다. 동네 사람들도 죄다 몰랐다. 꼬리를 밟힐 세라 행방을 숨긴 체 그저 황급히 마을을 벗어난다는 것이다. 지금까지의 행동거지를 종합하여 볼 때 머리 속으로 무언가 확연하게 떠오는 것이 있었다. 그렇다고 마냥 한탄만 하고 있을 수는 없었다. 이미 엎질러진 물이요 깨진 쪽박이다.

비가와도 뛰지 않는다는 양반이란 허울을 집어 던져 도망가는 노루새끼모양 눈썹이 휘날리도록 뛰었다. 자신의 어쭙잖은 행동으로 인해 집안의 재물이 일거에 사라진다는데 이것저것 가릴 이유가 없었다. 약 10여리(4Km)의 길을 거친 숨을 몰아쉬며 단숨에 달려와 보니 예상했던 대로 대문이란 문짝은 양팔을 활짝 벌린 듯 열려있다. 커다랗게 입을 벌려 속을 게워내듯 바람 길만 숭숭하다

마음이 급한 아들이 허겁지겁 집 안 밖을 돌아본 후 어머니의 방문을 열고는 털썩 주저앉았다. 그때 아들의 눈에 들어 온 광경은 문갑이면 문갑, 장롱이면 장롱, 화초장을 비롯하여 문이랑 문은 죄다 열려있다. 입이 찢어져라 활짝 열린 문을 통해 이불이랑 옷가지는 죄다 삐져나와 방안이 비좁도록 흩어졌다. 그렇다고 마냥 퍼질러 앉아있을 수많은 없는 노릇이다. 다시 집 안 밖을 찬찬히 둘러보는데 다른 곳은 손을 탄 흔적 없이 말짱하다. 불행 중 다행이다 싶었다. 그래도 혹시나 해서 열어본 그녀의 방은 황량하다. 주인이 떠난 방은 이부자리와 베개가 방 한가운데를 차지하여 동그마니 남아 있을 뿐이다.

저녁을 맞아 식구들이 모인자리에서 잃어버린 것이 무엇 무엇인가 하나하나 살펴 보건데 시어머니의 패물 전부와 생활하는데 소용되는 약간의 지전만 행방이 묘연하다. 없어진 얼마간의 돈과 패물은 당연히 그 몹쓸 년이 죄다 가져가버린 것이다. 그 와중에 시어머니는 무엇이 그리도 신나고 즐거운지 연신 입이 벌어져 싱글벙글 웃는다. 아들이 생각하건대 근자에 이르러 일어난 일련의 사건으로 인해 어머니가 실성이라도 했는가 싶었다. 만면가득 웃음을 머금고 방안을 휘둘러 분주하게 손길을 놀리는 어머니를 두고

“어머니는 이 마당에 무엇이 그리도 기쁘세요?”하고 묻자

“그럼 기쁘지 않고? 이제야 만장 같은 집구석이 내 마음 대론데...!, 상판대기(얼굴을 속되게 이르는 말)새파란 년을 며느리 모시는 모진 시집살이도 오늘로 끝나고!, 오늘일까? 내일일까? 좌우간 미구에는 마음 놓고 내 며느리를 들일수도, 내 손자를 불러 올 수도 있는데 이 아니 기쁜 일이더냐?”

“그건 낭중일이고! 어머니는 잃어버린 돈과 패물이 아깝지도 않으세요! 때때마다 밥상을 차려 받친 그 년이 밉지도 않으세요!”

“이놈아~ 그걸 말이라고! 이 세상에 재물 싫다는 사람이 어디 있다던! 그리고 그 찢어죽일 그년이 나를 종 부리듯 부리고 우리 집 재산을 거덜 낼 꿍꿍이를 생각한다면 머리채를 죄다 뽑아들고, 살점을 도려내어 어금니로 잘근잘근 씹어도 시원찮지! 하지만 어쩌겠나! 그 깐 패물 몇 점과 푼 돈 얼마쯤이야 내 며느리와 손주에 비견하면 아무것도 아니지 않느냐? 옛말을 들어 비유하지면 조족지혈이지~ 암~! 조족지혈...! 다 늙어서 손가락이랑 팔목, 모간지(‘목’의 방언)를 들어 치렁치렁 끼고, 주렁주렁 차고 모간지 뿌려지게 걸어서 치장할 일도 아니고, 허연 백발에 비녀야 나뭇가지면 어떻고 또 꺾어진 부지깽이면 또 어떠랴...! 죽을 때 가져갈 재물도 아니 것만...! 어쨌거나 지금 내 기분은 독방에 갇혀 바퀴벌레를 잡아먹어가며 목숨을 연명하던 빠삐용이 야자열매로 엮은 뗏목이 둥실 떠있는 바다로 뛰어들어 자유를 얻은 기분만 같아 날아갈 것만 같구먼!”하며 못쓸 년이 없어진 것만 좋아라 속 시원해 한다. 방바닥을 들어 난장판으로 흩어진 옷가지를 차곡차곡 갈무리하는 손끝으로 신바람을 낸다.

사랑방은 어째 멀쩡한가 싶어 추리를 해 보건데 그 몹쓸 년의 게으름이 일을 그르친 것으로만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가족들이 죄다 잔치 집으로 떠났을 때 곧바로 계획한 대로 일을 추진했었더라면 문제가 없었을 터였다. 남아도는 시간에 집안을 속속들이 뒤집어 알뜰하게 재물을 탐했다면 하루아침에 알거지가 될 뻔도 했다. 한데 천우신조인지 집안이 비어 쥐 죽은 듯 조용해지자 그녀는 천성대로 아침잠에 빠져버린 것이다. 한데 마냥 어리석었던 아들이란 녀석이 주위의 조언 덕택인지 그때만큼은 머리가 팽글팽글 돌아가는 통에 만사를 제쳐 득달같이 달려온 것이다. 그때 뒷산 높은 곳에 앉아 망을 보던 그녀의 진짜 서방이 아들의 달리는 모습에 깜짝 놀라 다급하게 부엉이 울음소리로 위험을 알려온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