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73)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73)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2.07.18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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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의 아린 마음과는 달리 창공으로 둥실 뜬 초승달이 서럽게도 밝다
지워지지 않은 얼룩들이 밥그릇과 국 그릇 등을 들어 수두룩하다
대를 이를 장손을 내치고, 나를 내칠 거냐며 눈을 새파랗게 홉뜬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문득 어둠 속에서 이름 모를 밤새가 떠난 임 생각에 잠긴 새색시의 사창을 두드리듯 울음 운다. 우는 밤새는 임 그리워 운다지만 옛정에 목말라 하는 새색시에게는 심술궂기 짝이 없다. 차라리 눈이나 뜨지 말 것을...!, 가슴을 옥죄듯 애달픈 울음소리에 눈을 뜨고 보니 처녀의 아린 가슴과는 달리 창공으로 둥실 뜬 초승달이 서럽게도 밝다. 구름한 점 없는 밤하늘에서 쏟아져 내릴 듯 초롱초롱한 별무리는 어째서 그렇게나 찬란하던지! 고초당초보다 더 매운 시집살이를 잊어버린 양 정신 줄을 놓아 쳐다보는데 어디선가 봄 향기가 밤바람에 뒤섞여서 앞뒤를 다투어 날아든다. 냉이 돋는 소리가 밤이 부끄럽다 뽀드득거리고 달래의 맵싸한 냄새가 코끝에서 방울방울 터진다.

청매의 상큼한 향기가 바람결을 타는 것으로 보아 계절은 분명 봄이 건만 처녀의 가슴은 남가일몽으로 여전히 동장군이 갈기를 세워 서슬 시퍼런 겨울 한 철, 옷깃을 차곡차곡 여며 가며 그 밤을 더듬어 신작로를 나선 처녀는 다시 길을 재촉하여 휘적휘적 걷는다. 아무리 ‘천망회회 소이불실’이라지만 시어머니의 주장과는 달리 지은 죄가 없는 마당에 이 넓은 세상에 이 한 몸 의지할 곳 그 어딘가 없을까 보다. 차마 떨어지지 않은 발걸음이 방향을 잡아간다. 시집을 향한 반대편으로 그림자를 길게 늘인다.

사람들은 가끔 자신이 건 최면에 자신이 걸려드는 경우가 있다. 등잔 밑이 어둡다고, 눈만 뜨면 마주하고 바로 지척에 있어서 그런가 보다. 물을 대하듯 공기를 마시듯 소중함에 대해서 잊고 사는 경우가 더러 있다는 것이다. 나를 힘들게 하고 질척거린다고 생각하는 사람이 자신에게 얼마나 필요한 지를 잊는 경우가 그런 것이다.

시어머니가 보는 며느리가 최소한 그랬다. 몸을 도외시 하여 적극적이라 더 그랬는지도 모른다. 옷을 달라고 하면 옷을 주고, 배가 고프면 밥을 짓고, 덥다 싶으면 부채질로 더위를 식혀주고, 춥다 싶으며 아궁이가 미어지도록 군불을 지피는 수고를 몰라도 너무 몰랐던 것이다. 나아가 죽으라면 죽는 시늉까지 하는 수족과 같은 존재라는 사실을 간과한 것이다. 그 결과는 생각 이상으로 참담했다.

된장 냄새가 온 몸에 베인 촌구석의 며느리가 집을 떠나면 시어머니는 모든 것이 제자리로 돌아와 마냥 행복할 줄 알았다. 한데 시어머니의 고난은 며느리가 대문을 나서면서 이미 예견되고 있었다. 단지 시어머니 자신만이 마법에 걸린 듯 모르고 있었을 뿐이었다.

사대를 들어 장손을 낳았다는 명분아래 아기를 안고 나타난 여인은 처음과는 달리 그렇게 게으를 수가 없었다. 지금껏 처녀의 수발에 편한 티를 벗고자 처음 며칠간은 나름대로 애쓰는 모습을 보였다. 하지만 깨진 쪽박처럼 본성은 숨길 수가 없었고 손끝마저 맵지를 못했다. 빨래라 한 것은 물에 담갔다가 건지는 수준이고, 밥을 했다고 하면 거지반 태우거나 거지반 죽을 만들었다. 설거지라고 한 그릇에는 고춧가루가 묻은 것이 다반사고, 지워지지 않은 얼룩들이 밥그릇과 국그릇 등을 들어 수두룩했다. 반찬은 싱겁지 않으면 소태처럼 쓰다든가 기름 범벅이다. 무엇하나 마음 놓고 믿고 맡길 수가 없는 지경이다.

보다 못한 시어머니가 별수 없이 살림살이의 전면으로 나설 수밖에 없었다. 뒷방늙은이에서 갓 시집온 새댁도 아니고 새로운 시집살이의 시작이다. 그 결과 다 늙어서 새파랗게 젊은 년의 며느리에게 밥상을 차려 받칠 입장이고 보니 진짜 내 손자를 낳았나 싶을 정도로 의심스럽다. 정을 붙여 살림을 살 며느리라면 이렇게 성의가 없지는 않다는 것이다. 없고 없다고 해도 이렇게 솜씨가 메주인가 싶은 것이다. 아무래도 술집 작부로 연년하던 년이란 생각에 믿을 수가 없다는 것이 솔직한 심정이었다. 이 사내 저 사내의 품을 헤픈 웃음으로 거쳐 온 년의 말을 어떻게 온전하게 믿을 수 있을까 싶었다. 기왕지사 이리 된 것 행동거지라도 고분고분하여 시부모라도 착실하게 섬긴다면 모르겠거니와 늙은 시어머니를 두고 아예 몸종 취급이다. 착하고 순종적인 며느리를 얄팍한 꼬임에 빠져 쫓아낸 죄라 하기는 억울하기도 하고 분한 것은 차제하고 이런저런 의심이 늘어만 간다. 한번 의심이 들자 돌이킬 수가 없었다. 뭉게구름처럼 의심에 의심이 꼬리를 문다. 그런 날에는 문득문득 소박을 놓아 내쫓은 며느리가 더없이 그리웠다. 어느 때는 눈물겹도록 보고 싶었다. 그런 와중에도 그녀는 틈틈이 집안의 대를 이를 핏줄이 낳았다고 아득바득 우기고 든다. 하지만 맨 정신으로는 도저히 믿을 수가 없었다.

참을 수가 없었다. 그냥 참고 지내기에는 복장이 터져버릴 지경이다. 급기야 억울하고 원통한 마음에 아들을 불러 사실을 따져서 물었다. 아들 역시 마찬가지다. 지금껏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잤지만 젖통 한번 재대로 만져보질 못했다고 했다. 그럼 아기는 어떻게 된 거냐고 묻자

술집에서 만났는데 잠을 잘 때마다 기억이 없다고 했다. 전주에 좀 취하긴 했지만 정신을 잃을 정도는 아니었다고 했다. 한데 그녀가 잠자리라 금침을 펼쳐놓은 방에 들어 합환주라 보아둔 술잔에 입을 데는 순간 기억이 없어진다는 것이다. 그리고 다음 날 새벽을 맞아 머리가 어지러운 가운데 비몽사몽 잠을 깨고 보면

“간밤에는 왜 그리 짓궂게 굴었어요! 잠 한숨 못 잤잖아요!”하며 알몸으로 돌아 앉아 머리를 빗고 옷매무새를 가다듬는 등짝을 본 기억 밖에 없다는 것이다. 시어머니가 그 말을 듣는데 여전히 기가 막힌다. 도대체 살을 섞었다는 건지 아니면 아니라는 건지 말만 들어서는 모르겠다는 것이다. 그래도 한 이불을 덮고 잠을 잔 사실은 부인할 수가 없는지라 강력하게 부정도 못할 처지다. 그것도 여자와 알몸으로 한 이불을 덮었다는 데는 고개를 숙여 수긍할 수밖에 없었다.

그즈음 친정으로 소박을 맞아 쫓겨 간 며느리로부터 손자를 났다는 소문이 동네를 들어 풍문처럼 떠돈다. 소문을 접한 시어머니는 갑자기 마음이 들뜨기 시작했다. 소문을 가지고 온 사람을 붙들어 앉혀 몇 번이고 되묻는 시어머니는 쫓겨 간 며느리가 몸을 풀어 낳은 손자야말로 진짜 내 손자가 틀림이 없다 여겼다. 이는 누구도 부인할 수 없는 내 손자라는 것이다. 손가락으로 꼽아 헤아려보아도 틀림이 없다는 것이다. 며느리가 소박을 맞아 집을 떠난 지 여덟 달하고 반삭 남짓, 즉 여덟 달하고 이십 여일 만에 낳은 아이라 부정을 하고 싶어도 할 수가 없다는 것이다. 임신초기라 그런 기미가 없어 쫓아 보내긴 보냈는데 그새 핏줄을 잉태하고 있었는가 싶어 한편으로는 신통방통하단 생각도 들었다. 반면 미움에 미쳐 날뛰느라 그런 기미를 전혀 알아차리지 못한 시어미란 생각에 가슴을 차곡차곡 칼로 저미도록 후회스럽다. 그러자 근본도 알 수 없는 손자에게서 정이 떨어지고 얼굴도 모르는 손자가 자꾸만 눈앞으로 아른거려 삼삼하다.

참다못한 시어머니는 아들을 닦달하여 먼 길을 보냈던 것이다. 그렇다고 가만히 들어앉아 손을 놓고 있을 여인이 아니었다. 여자들의 스치듯 느껴지는 촉감은 무서웠다. 무언가 불길한 예감에 휩싸인 그 여인은 시어머니에게 앞으로 어쩔 거냐고 앙앙불락 따지고 들었다. 온갖 구실을 붙여 꾸역꾸역 친정으로 쫓아 보낸 며느리를 이제 와서 불려 들이는 이유가 도대체 뭐냐는 것이었다. 대를 이를 장손을 내치고, 나를 내 칠거냐며 눈을 새파랗게 홉뜬다. 바싹 약이 오른 이리처럼 시어머니를 향해 허옇게 송곳니를 드러낸다. 여인의 표독한 모습에 찔끔한 시어머니가

“애야! 그럼 어떡하니 우리 집안의 귀한 핏줄을 이어 받았다는데...! 어떻게 내 몰라 하여 밖으로 내돌려 키울 수는 없잖느냐! 엄연하게 내가 할민데...!”하고는 큰 죄를 지은 양 이번 한번만 너그럽게 봐달라며 때 아니게 며느리 면전에 두 손을 모은다. 어쨌든 아기는 남기고 다시 소박을 놓는다고 구실아래 살살 구슬려 입을 막고는 가마를 딸려 아들을 보냈던 것이 일이 요상하게 틀어져서 빈 가마로 돌아온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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