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운슬링-행복한 가정] 내 이름은 가시나
[카운슬링-행복한 가정] 내 이름은 가시나
  • 시니어每日
  • 승인 2020.08.03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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저는 76세 여자입니다, 어릴 때는 가시나라고 이름도 변변히 없었습니다. 내가 자랄 때는 시골에서 마당 한가운데 큰 바위가 솟아 있었고, 그 돌 옆으로 삽짝이 나 있는 초가집에서 살았습니다. 길옆에는 상추대가 높이 솟아 있었고 배고픈 하얀 나비들이 상추대에 모여들곤 했습니다. 한겨울인데도 우린 이불 없이 지낸 무서운 가난이었습니다. 새끼 꼬다가 짚북데기에 발을 넣고 잠든 기억이 많습니다. 그 집에서 아버지가 송기(소나무 속껍질)를 벗기러 산에 가셨다가 떨어져 고생고생하다 돌아가셨습니다. 오빠가 두 분 있었고 남동생이 하나 있었습니다. 큰 오빠는 신체도 건장했고 키도 컸지만 결혼 후 아기도 낳지 않아 병명도 모른 체 돌아가시고 얼마 있지 않아 올케도 친정으로 떠났습니다.

우리 식구들은 배우지도 못했을 뿐 아니라 입에 풀칠하기가 어려워 논고둥을 한 줌 잡으면 아버지만 삶아 주었던 생각이 납니다. 우린 산골 물에서 가재를 잡아 빨갛게 구워 자랑하듯 길에 나와 우적우적 씹어 먹던 일이 생각나는군요. 그때는 모두가 못살 때라 국수도 귀했던 시절이었습니다. 쑥이나 보리를 맷돌에 갈아 죽을 쑤어 먹던 시절이라 아침 일찍 가지 않으면 호박돌 차지도 어려웠습니다. 나도 시골집에서 시집을 갔는데 가진 것은 아무 것도 없었습니다. 오일장에서 얇은 천을 끊어와 빨간치마 초록 저고리를 만들어 입고 큰 털수건 하나를 뒤집어쓰고 작은 보자기를 지고 가는 고지기(마을 심부름하는 사람)를 따라 걸어서 마을 앞동산을 넘어 시집갔던 생각이 납니다.

나를 시집보내고 친정은 아버지도 큰오빠도 없으니 어머니는 작은오빠와 동생을 데리고 서울로 이사했고, 나도 몇 년을 시골에서 살다가 친정을 따라 서울로 이사했습니다. 서울 생활도 힘들긴 마찬가지였습니다. 오빠를 따라, 소금 장사부터 연탄 장사, 머리카락 장사 등등 안 해 본 장사가 없었고 서울 밑바닥을 헤맸지만 살기는 팍팍했습니다. 어머니도 밀가루로 쑨 죽만 드시고 배부르게 쌀밥 한 번 못 드시고, 작은오빠도 고생만 하다가 마흔을 못 넘긴 채 두 분 다 일찍 돌아갔습니다.

혼자 남은 남동생은 택시기사를 했었는데 얼마있지 않아 조카들을 남겨놓고 자살로 끝을 맺었습니다. 너무나도 슬프고 기막힌 친정의 살아온 길이 꿈길처럼 아득하기만 합니다.

나도 서울로 이사를 했지만 남편은 얼마 있다가 가족을 버리고 집을 나갔고, 나는 혼자 자식들과 함께 살다가 뿔뿔이 헤어져 지금은 장가가고 시집가서 나름대로 살아가고 있습니다. 그런데 남편은 어디서 무얼 하고 살았는지 모르고 있었는데 65세 때 남편이 죽었다고 연락이 왔습니다. 난 눈물 하나 나지 않았습니다. 가지도 않았습니다.

우린 어차피 복도 없는 사람들이라 아이들은 어쩌라고 모든 짐을 힘도 없는 나에게 맡겨두고 나가더니 왜 잘 살지 못하고 죽었다니요? 난 아무 할 말도 없었고 말하면 또 뭐 하겠습니까? 목숨 부지하고 살아가는 것만도 감사하다고 생각하고 있었으니까요.

나이가 이 정도 많고 얼마 남지 않은 인생이고 보니 가끔 친정어머니도 아버지도 오빠들도 동생도 또렷하지는 않지만 자꾸 보고 싶습니다. 지금 저는 빌딩 청소 일을 하고 있습니다만, 가끔 알지 못할 눈물이 흘러 같이 일하는 동료들을 놀라게 하고 있답니다. 아니다, 아니다 하지만 내 속에는 슬픔만 가득 쌓여 있어 누가 무슨 말만 해도 눈물이 자꾸 나는가 봅니다. 나는 진정으로 웃어본 적이 없는 것 같습니다. 창피합니다. 얼마 남지 않은 내 삶. 며칠이라도 웃으며 살고 싶습니다. 아니 단 하루라도.

 

조언 드립니다:

참 어려운 시절을 지나왔습니다. 어릴 때 아버지의 슬프디 슬픈 죽음, 믿었던 큰오빠는 알지 못할 병으로 돌아가시고, 먹을 것은 없고 일찍 돌아가신 어머니의 고달픔이 느껴집니다. 지금은 아닐 수도 있지만 그 당시 여자는 친정이 잘 살아야 기를 펴고 살던 시기였는데 그렇지 못했으니 그런 것도 한이 되어 맺혀 있는 것 같습니다. 가난에 찌든 생활, 몸서리나지요?

못 사는 친정이긴 하지만 어머니가 서울에 계시니 편하게 살 생각은 아예 하지 않았지만 입에 풀칠이라도 하려고 서울로 올라 가셨는데 가는 곳마다 평탄한 길은 없었으니 얼마나 괴로웠겠습니까?

그것도 그렇지만 남편조차 온 가족들을 남겨 두고 아이들처럼 집을 나갔으니 얼마나 당황했겠습니까? 살아 온 길이 평탄할 수는 없지만 고생만 한 것 같아 남의 일 같지 않습니다. 내일처럼 공감이 갑니다. 사람이 살아간다는 게 굽이굽이 자갈밭이요 가시밭 같다고 하더니 우리 내담자의 삶이 그렇지 않나 싶어 마음이 몹시 아픕니다. 아마도 어릴 때부터 겪은 수많은 슬픈 사연이 마음속에 지금까지 잠재되어 있어 눈물이 시시때때로 흐르나 봅니다. 가득 찬 그릇에 넘치는 물처럼 서러운 마음에 찬 눈물이 누가 말만 해도 나도 모르게 눈물로 흘러넘치는 것이 아닌가 생각됩니다.

우리는 깊은 자기 성찰 즉 자기를 돌아보고 봄으로 지난날을 반성하며 성숙해가는 것이 아닙니까? 지금의 딱한 처지를 인정하며 새로운 삶의 방향을 재설정하는 것입니다. 나는 도대체 누구인가? 나는 지금 어디 어느 위치에 있으며 어디로 가고 있는지를 진지하게 생가해 보는 것입니다. 생각하는 대로 살아갈 것인가? 그냥 그냥 되는대로 살아갈 것인가? 곰곰이 생각해 보시고 깊은 통찰력으로 자기 성찰을 통해서만 성숙한 삶이 가능할 것입니다.

나이도 적지 않고요. 사람은 누구나 외롭고 때때로 슬프기도 합니다. 혼자 사시니 아무 거리낌이 없지 않습니까? 종교 시설이나 산에 가서 마음에 있는 슬픔의 밑바닥까지 모두 걷어내면 어떨까요? 원하신다면 저는 교회를 권하고 싶습니다. 제가 외롭고 서러울 때 교회를 찾아 도움을 받았듯이 우리 내담자도 많은 도움이 되지 싶습니다. 끝으로 부탁드리고 싶은 것은 종교를 한 번 더 깊이 생각해 보시길 바랍니다.

유가형(시인·대구생명의전화 지도상담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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