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43)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43)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11.20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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처녀 적의 내숭은 뒷전으로 어금니가 허옇게 보이도록 질겅질겅 씹겠다. 그지?
안사돈께 심하게 꾸중을 들은 끝에 소박이라도 맞았는가 싶어서 눈이 아찔할 지경이다
행랑어멈조차 집안 식구 수마다 왜 그러는지 내력을 모르겠단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할머니 사후 언제까지나 응석받이로 살 것 같았던 고모의 마음속으로도 심적인 변화가 획기적으로 일었던 모양이다. 고아란 생각에 젖어 지독한 가슴앓이를 겪으며 새로운 삶을 꿈꿨던 모양이다. 게다가 항간에 떠도는 소문에 의하면 지난 연말에 즈음하여 면사무소를 통해서 상당한 재물을 불우이웃돕기에 성금으로 내놓았다고 하질 않는가?

인근 사람이면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 그 소문은 이미 널리 퍼진 상태다. 거짓말이 지구 반 바퀴를 돌 동안 진실은 신발 끝을 반쯤 멘다고 한다. 하지만 그간의 사연을 품은 세월이 허위허위 재를 넘고, 너울너울 소나무꼭대기를 날고, 실바람으로 불어와 풀잎을 눕혀서는 호랑나비의 날갯짓으로 산골짝을 속속들이 누비는 바람에 어느 날부터는 삼척동자라도 능히 아는 사실이다. 연말을 맞아 불우이웃돕기 선금에 쌀섬을 선뜻 기부한 사실에 사람들은 고모를 들어 인자하고 후덕하기가 관세음보살을 닮았다고 않은가? 소문으로만 들어봐도 고모가 변해도 너무 많이 변한 것은 틀림없어 보였다. 시집가기 전 고모의 손을 꼭 잡아 삶이 곤궁한 이웃 돌보기를 내 몸같이 하라던 할머니가 같이 기뻐할 수가 없다는 점이 아쉬울 따름이다.

시집에서의 고모의 일상은 쓸쓸하고 허전함 그 자체였다. 고모부의 외사랑에 못 이기는 척 결혼에 응했지만 살가운 애정 따위는 애당초 없었다. 초례청을 거둔 이튿날부터 고모는 고루거각(高樓巨閣)의 동쪽 편, 널찍한 방을 신혼 방으로 둥지를 틀었건만 할머니와 살을 부대끼며 살던 초가삼간만 못했다.

시집살이란 늘 그렇듯, 고모도 처음 얼마간은 부엌에 들어 식사 시중에 정신이 없었다. 한데 어찌 된 노릇일까? 제법 손에 일이 익어갈 즈음의 어느 날이었다. 이유를 불문, 마님인 시어머니의 엄명으로 칼로 자르듯 끊어지고 보니 외롭고 쓸쓸함은 더했다.

시름이 깊어 빈방에 덩그렇게 홀로 앉아 있자니 구름으로 찌푸린 날이면 추녀 끝으로 굼벵이가 떨어지고, 겨울철이면 참새가 보금자리를 틀어 깃들던 초가지붕이 눈앞으로 삼삼하게 그립다. 장마철을 맞아 비라도 내리는 날이면 줄줄이 새는 지지랑물과 빗방울을 받아내고자 올망졸망한 옹자배기와 함지박을 방안 가득 받쳐놓은 모습이 그린 듯 정겹다. 떨어지는 빗방울 소리에 잠을 못 이루던 지지리 궁상의 여름밤이 가슴속에서 아련한 향수로 피어오르는 물안개다. 그리워라! 그 세월이 언제 어느 때나 다시 올 수나 있을까? 긴 한숨, 눈물 바람에 방구석으로 오도카니 내쳐진 고모의 눈에 문득 단짝으로 처녀 시절을 함께 보냈던 옥자가 환영인 듯 입을 삐쭉거린다. 있는 것들이 더 하다며 새치름한 표정으로 치뜬 눈이 정겹다.

“끝순아~ 너는 내일부터 부잣집 마님이고 나는 정해진 팔자에 따라 농투성이 마누라에 땀에 담뿍 절어 쉰내나 사방으로 풍기며 궁상으로 살겠다. 그지? 주린 배를 달래고파 새까맣게 파리 떼가 앉았던 꽁보리밥 한 덩이에 쉰 김치를 숟가락 총에 걸쳐서는 한입에 날름 쳐넣겠다. 그지? 처녀 적의 내숭은 뒷전으로 벌레 먹은 어금니가 허옇게 질겅질겅 씹겠다. 그지? 삼 일을 내쳐 굶은 거지새끼처럼 게걸스럽게 퍼먹겠다. 그지! 군둥내(‘군내’의 방언)가 물씬 풍기는 김치가 뭐에 맛있겠냐마는 군침을 삼켜가며 허겁지겁 씹어 삼키겠다. 그지? 양에 차지 않아 공양을 마친 스님이 김치 조각을 행주로 삼아 발우를 씻듯 물로 헹구겠다. 그지? 그마저도 배부르게 먹었으면 좋겠다. 그치?” 끝없는 식탐을 투정으로 부러워하던 옥자가 오히려 행복해 보인다. 가만히 생각해 보는데 이건 시집살이가 아니라 멋모르고 동의한 귀양살이만 같다. 온실 속 어느 지점에 뿌리를 박아 고이고이 자라나는 화초만 같다. 도대체 꿈이란 없어 보인다. 달리 보면 희망을 저당 잡힌 삶만 같다. 특별하게 꿈을 가졌다든가 바라는 희망이 있는 것은 아니지만 그래도 이것은 아니다 싶었다. 시집살이가 이럴 줄 알았더라면 헐벗고 굶주릴지언정 창공을 마음껏 날 수 있는 새처럼 양팔을 포기하는 대신 날개나 가질 걸 그랬나 싶었다.

터앝으로 내려놓은 유월의 햇살마저 한몫 거들어 고모의 찹찹한 마음을 희롱하는 기분이다. 햇살이 솜털 인양 부드러워서 더 그렇게 느껴졌는지 모른다. 툇마루에 걸터앉아 화단 중앙으로 핀 샛노란 양국화(겹삼잎국화)에 눈길이 머무는데 서글프기 그지없다. 한참을 멍하게 앉았던 고모가 자석에 이끌리듯 대문을 나서서 길을 재촉이다.

고갯마루에 올라서자 발아래로 떨어진 단추 모양의 올망졸망한 지붕들이 부푼 빵처럼 둥글둥글 정겹다. 잿빛으로 빛바랜 초가지붕들이 성냥갑으로 점점이 눈으로 들어와 제각기 ‘왜 이제야 와’ 너울너울 손짓하여 부르는 듯하다. 부추이지 않아도 눈물이 핑 돌아 눈시울이 붉다. 저기 저곳에 내 사랑하는 어머니가, 오라버니 있다는 사실에 마음 든든하다. 정든 풍경에 취해 언제 외로웠냐 싶다. 마냥 지켜보아도 지루하거나 지겹지가 않은 풍경이다. 정겨운 풍경에 몸과 마음을 내던져 흠뻑 빠져들고 싶은 심정이다.

잃어버린 귀중품을 찾은 모양 발걸음을 멈춘 눈길 아래로 딱새 한 마리가 포르르 날아 저만치로 몸을 감추는 모습이 꿈결만 같다. 깊이를 더해가는 유월의 햇살 아래 한껏 살이 오른 나뭇잎은 저마다 좋아라고 바람결에 몸을 실어 팔랑팔랑 몸을 뒤집어가며 춤춘다. 푸르다 못 해 진녹색으로 변해가는 돌담길 사이로 등허리는 구부러지고 머리는 희끗희끗한 할머니가 마당을 가로질러 걷는 듯도 하다.

지싯지싯 삽짝을 들어서는 고모를 대하는 할머니는 반가움보다는 가슴이 철렁 내려앉은 기분이다. 고모와는 달리 시집을 간다고 꽃가마를 타고 떠난 지가 얼마나 되었다고 벌써 친정 나들인가 싶다. 나 죽거든 오라는 말을 귓등으로 흘려들었단 말인가? 그만큼 당부하고 애원했으면 시집을 내 집으로 여겨 지근덕하게 눌러앉아 살아야 하건만 그새 친정을 찾은 고모가 진정 야속하기 짝이 없다. 안사돈께 심하게 꾸중을 들은 끝에 소박이라도 맞았는가 싶어서 눈이 아찔할 지경이다. 친정 나들이에 나선 딸이 하도 반가워 버선발로 한달음에 맞기보다는 걱정이 태산이다. 오만가지 생각이 꼬리에 꼬리를 무는데 고모는 철부지처럼 그저 반겨 웃을 뿐이다,

고모의 처음 3~4년간의 시집살이는 친정 나들이가 대부분이었다. 그해 6월에 이어 9월, 12월에 걸쳐서 고모는 친정 나들이에 나섰다. 처가와 뒷간은 멀어야 좋다는 말처럼 나지막한 재를 사이에 두고 친정이 있다 보니 생긴 해프닝 같은 것이었다. 하지만 시어머니가 볼 때 며느리의 그와 같은 행동은 영 달갑지가 않았다. 매서운 눈초리로 지켜보는 시어머니는 입을 뗄 듯, 말을 할 듯. 어물어물 거리만 할 뿐이었다. 한 번쯤은 회초리를 들고, 눈물이 쏙 빠지도록 나무랄 법도 하건만 마음속으로 심하게 인내하는 듯하다. 무슨 연유에선지 직접 행동으로 나서지 않고 있었다. 흰꼬리수리가 먹음직한 숭어를 눈앞에 둔 듯, 송골매가 튼실한 장끼를 눈앞에 두고는 단단히 벼르고 형세다. 어느 결정적인 시점을 집요하게 노리는 듯도 보였다.

내막을 모르는 사람들이 밖에서 볼 때, 고루거각에 색색이 구색을 갖은 입성에 비린 반찬으로 때를 넘기는 가족의 모습이 화려하게 보일지는 모른다. 하지만 속을 알고 보면 콩가루 집안이나 다름없다. 고모가 2~3개월마다 친정 나들이에 나선다면 시아버지는 두 달이 멀다 하고 터를 본다며 집을 비웠다. 그런 가운데 시어머니는 방구들을 짊어지고는 문밖출입을 접고 있다. 고모부이자 김 서방은 장가를 든 후 줄었다지만 여전히 한량노름에 빠져 있다. 행랑어멈조차 집안 식구 수마다 왜 그러는지 내력을 모르겠단다. 큰 마님을 대할 때면 말 한번 붙이기조차 무서워 늘 가시방석에 앉은 기분이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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