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44)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44)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11.27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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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전히 몸인 메인 고모다. 시아버지가 병석을 털었다고 맏며느리가 쉬 집을 비울 수는 없었다
좌우 양옆으로는 부드럽게 흘러내린 산등성이가 호위병으로 둘러싸고 있다
시어머니가 눈을 홉떠서는 노려보는 통에 고모는 전신으로 짜르르 소름이 돋았다
9월 30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30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결국에 식구들의 면면을 살펴보면 누구 하나 다정다감하게 말을 붙여 대화를 나누는 사람이 없다는 것이다. 고모부와 고모도 처음 결혼할 때와 마찬가지로 정이 있는 것도 또 없는 것도 아닌 듯 어정쩡한 상태다. 둘의 사이를 자세히 들여다보면 쇼윈도 부부만 같다.

그렇게 해를 넘겨 설을 쇠고 나니 곧장 정월 대보름이다. 액막이로 달집에 소원을 빌고 부럼을 깨물고 나니 우수를 지나 곧장 봄이다. 고모는 또 할머니가 그립다. 마음이 콩밭에 머문 탓일까? 아침에 일어나 마당으로 내려서는 고모의 눈이 머무는 곳은 오늘도 어제처럼 고갯마루다. 오늘에야 갈까? 내일에야 갈까? 벼루는 고모는 당분간 할머니를 찾는 발걸음을 미룰 수밖에 없었다.

해토머리를 지난 어느 따뜻한 봄날을 맞아 터를 보러 나갔다가 돌아온 시아버지가 잦은 여정에 시달리고 지쳤는지 급기야 쓰러지고 만 것이다. 어디를 어떻게 다녀왔는지 나갈 때

“내 다녀오리다” 보폭 당당하게 대문을 나섰던 시아버지가 해거름 무렵에 집으로 돌아오는 중 대문간에서 맥을 놓았다. 지푸라기로 만든 허수아비가 봄비에 녹아나듯 쓰러진 것이다. 풀 먹인 바지저고리가 후줄근한 것은 그렇다 치더라도 가시에 긁히고 못에라도 찔렸는지 종아리 군데군데로 생채기가 선명하여 핏발이 서렸다. 시아버지의 때아닌 사고, 집안에 변고가 생기고 보니 맏며느리의 입장으로 볼 때 감히 집을 비울 수가 없었다. 시아버지를 부축하여 집안으로 들이는 고모는

“시아버지께서는 저 지경이 되도록 왜? 저토록 많은 터를 두고 얼마나 더 욕심을 부리고 싶어서 이러는 걸까? 그만하면 되었다. 만족을 모르고 어디를 어떻게 돌아다니며 터를 보았을까?” 궁금증이 시시때때로 불쑥불쑥 일어났지만 보이지 않은 집안의 서슬로 혼자 속앓이다. 입도 벙긋하지 못한다. 그나마 다행인 것은 왕진 온 의원의 처방전에 따라 약을 지고, 다려서 잡수신 후 나흘 만에 자리를 털고 일어났다는 것이다. 하지만 여전히 몸인 메인 고모다. 시아버지가 병석을 털었다고 맏며느리가 쉬 집을 비울 수는 없었다. 갑갑증을 참을 길 없던 고모는 기분 풀이 겸 봄볕 따스한 날을 맞아 뒷산을 올랐다.

산을 오르는 길은 할아버지의 산소를 가는 길처럼 기시감으로 가득했다. 숨이 차올 즈음 걸음을 멈춰 뒤를 돌아보는 발아래로 봄을 깃든 펑퍼짐한 들판이 연초록으로 한량없이 넓다. 그곳을 터전으로 육십여 남짓한 집들이 옹기종기 들어앉은 마을이 정겹다. 그림 같은 풍경에 취해 몽롱한 눈길로 둘러보는 산길 주변으로 봄꽃들이 화사하게 치장 중이다. 뱀딸기는 빨갛게 멍울져 붉고, 점점이 떨어진 단추 모양의 민들레는 노랗게 깊이를 더 해가는 중이다. 가구 수만 많다고 할 뿐 고모는 고모가 살아온 동네만 같다고 여겨졌다.

여기 산은 어떻고 재 너머 산인들 어떨까? 사람들은 저기 저 소나무 가지 사이로 보이는 저 기와집이 내 집이라는데! 나는 왜? 이 집도 내 집이 아니고 저 집도 내 집이 아니라 여겨질까? 고개를 갸웃하던 고모가 오래전에 올랐던 산길을 다시 오르는 듯 서슴없이 재촉이다. 토끼와 꿩이 다녔을 뻔한 길섶을 양손으로 헤쳐가며 위로 오른다. 뚜렷한 목적도 없이 오르는 산길은 어느새 연두색으로 풀어내는 중에 양지꽃도 점점이 노랗게 노랗게 재롱잔치다. 봄의 환상 때문일까? 어느결에 저만치로 아버지가 마중이라도 나와 손짓하는 착각에 사로잡힌 고모다.

“아버지 아버지가 어떻게 거기에 계세요! 진짜 내 아버지! 우리 아버지가 맞나요?” 고모는 그간 오매불망 보고 싶어 했던 아버지를 만났다는 기쁨 때문인지 발걸음도 가볍게 사뿐사뿐 오른다. 신기루를 좇는 나비처럼 나풀거린다. 얼굴도 기억나지 않는 아버지! 아지랑이 속으로 아른아른 모습을 보였다가 녹아나는 모습이 지친 사막에서 만난 오아시스처럼 반갑다. 일장춘몽인가? 어느 한순간 신기루로 사라진다 해도 양팔을 활짝 벌리고, 양손을 내밀어

“아버지!” 넘어질 듯 달려가 덥석 안겨 엉엉 울고 싶었다.

“아버지 그간 어디를 가셨다가 이제야 오셨어요! 딸내미 시집가는 것도 안 보고 미워요! 미워!” 가슴을 팡팡 두들겨 앙살이라도 부리고 싶었다. 아버지의 환상에 이끌러 힘든 줄 모르고 얼마나 더 올랐을까? 고모의 눈앞으로 제법 그럴싸한 풍광이 살며시 들어와 깃든다. 그건 전혀 뜻밖이었다. 문득 고모가 선 자리에서 좌우를 둘러 보는데 흡사 할아버지의 산소 자리와 비슷해 보였다. 풍수지리에 대해서 문외한인 고모의 눈에도 보통 편안한 자리가 아니었다. 할아버지의 산소를 두고 할머니는 자랑삼아 입버릇처럼 말했다.

“내 아버지가 그래도 저승 집 하나는 잘 지은 덕택에 네가 살아난 게야! 꼴값을 떠는 의사도, 입만 살아있는 떠버리 무당도, 돈 바구미 의원도 못 살린 너를 네 아비가 당대발복으로 살려낸 거야! 이래 봬도 이 자리가 남들이 부러워하는, 인근을 들어 최고로 꼽는 명당자리야!” 엄지를 세워가는 할머니 말에

“흥~ 묘터 하나 잘 잡는다고 사람이 어떻게 죽고 살아! 묘터가 명약도 아닐 진데! 엄마도 이제 나이가 들었나? 남들처럼 총기가 흐려 망령이라도 났나!” 속으로 비웃는 고모는 반신반의, 고개를 갸우뚱 전후좌우를 살펴서 눈여겨 보아둔 덕택이었다. 아닌 게 아니라 뒤를 돌아보자 주봉이 듬직해 보이는 것이 그럴싸하게 지키고 섰다. 좌우 양옆으로는 부드럽게 흘러내린 산등성이가 호위병으로 둘러싸고 있다. 앞을 볼라치면 넓은 들판을 가로질러 시퍼렇게 물줄기가 감돌아 흘러서 나가고 그 너머로 우뚝 솟은 산이 높지도 낮지도 않아서 새의 둥우리처럼 지기(地氣)의 아늑한 기운을 포근히 품어 갈무리하는 모양새다. 고모가 잔설이 녹아 뽀송뽀송한 잔디 위에 앉고 보니 다른 곳과는 달리 바람결마저 잠들어 안락하기 그지없다. 그날 이후 친정 나들이에 나서기 전, 두 달여 동안 고모는 두어 차례나 더 산을 올랐다.

4월 말경에 이르러서야 고모가 그간 참았던 친정 나들이에 나서는 날을 맞아 공교롭게도 시아버지도 터를 찾아서 길을 나섰다. 시어머니는 여전히 세상과 담을 쌓은 듯 두문불출로 방구들만 지키고 앉았다. 고모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반갑다 여겨 할머니를 찾았건만 할머니는 전에 없이 변덕을 부려 노여움을 나타내고 있었다. 고모가 가만히 헤아려보니 그동안 습관처럼 2~3개월 만에 나섰던 친정 나들이가 시아버지의 사고로 인해 근 5개월여 만의 발걸음이다 보니 할머니의 미움 살이 깊어지다 못해 지쳐 보였다. 그러고 보면 할머니가 고모를 두고 오지 말라고, 오지 말라던 당부는 그저 말뿐으로 마음속으로는 늘 고모를 기다리고 있었던 모양이다. 할머니와의 습관적인 해후를 끝낸 고모가 시집으로 돌아와 보니 눈앞으로 뜻밖의 사건이 전개되고 있었다.

고모가 마을을 다녀오듯 가볍게 친정을 다녀왔다면 시아버지는 그게 아니었다. 새벽녘에 진지를 뜨는 둥 마는 둥 집을 나간 시아버지는 사월의 길어진 해만큼 늦게야 집으로 돌아왔다. 그것도 나갈 때는 멀쩡하게 제 발로 걸어났다면 들어 올 때는 산송장처럼 늘어져서 소작인의 등을 빌어서 왔다. 어디를 얼마나 헤매다가 왔는지 모양새가 상거지 꼴에 풀을 먹이고 숯불에 달군 다리미와 인두로 정성껏 다려 한껏 멋을 낸 입성이 폐포파립이나 다름없이 헤졌다. 언덕을 굴렀는지, 아니면 산비탈에서 넘어졌는지 그도 아니면 가시덩굴을 정신 나간 사람처럼 헤맸다가 왔는지 무릎과 종아리로는 상처가 깊어 피가 흐르고 있다. 그때만큼은 시어머니도 방을 나와 안절부절 못하며 발을 구른다. 어찌 이런 일이! 마당이 비좁다며 바장거린다. 급하게 행랑아범을 불러 의원을 청해 치료를 마치고야 겨우 안정을 찾아가는 집안이다. 그 과정에서 시어머니가 눈을 홉떠서는 노려보는 통에 고모는 전신으로 짜르르 소름이 돋았다. 말은 안 해도 이 모두가 며느리를 잘못 들인 때문이라 꾸짖는 듯 보여 가슴이 섬찟하다. 입이 열 개라도 할 말이 없는 고모는 다음날로 행랑어멈을 불러서 물었다.

“도대체 시아버지께서는 어디를 어떻게 터를 보려 다니시길래 저 지경인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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