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14)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14)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5.01 11:38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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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런 연유로 보자면 이것도 둘만의 인연이라면 인연으로 하늘이 점지해주신 특별한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소신에게 만약 조금이라도 죄가 있다면 온몸을 다 바쳐 충성한 죄일 뿐이 옵니다
그때는 오늘에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점으로 남아 소박의 빌미를 제공할 단초(端初)가 되리라!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3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경주 계림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그대가 나의 얼굴에 난 칼자국으로 인해 흉하다는 핑계로 초야인 이 밤을 들어 소박을 놓는다고 해도 매정타 원망치는 않을 겁니다. 하지만 부부지간으로 맺어진, 이렇게 된 마당에 최소한 그대를 닮은 아이 만큼은 낳고 싶습니다. 그대가 원하지 않는다면 그대의 발길이 닿지 않은 조용한 곳을 찾아 홀로 키우겠습니다. 아버지를 찾아준다는 명분 아래 절대 눈에 띄거나 다시 찾지 않겠습니다” 하고는 색동저고리의 옷소매를 접어서는 눈물을 훔친다. 서러움에 겨운 어깨를 들썩인다. 그 바람에 얼굴을 가렸던 머리카락이 흔들리는 사이로 비스듬하게 그어진 칼자국이 발그스레한 뺨 위로 선명하다.

치기 어린 지난날 내가 무슨 짓을 저질렀던가? 주홍글씨로 남은 칼자국으로 인해 뭇사람들로부터 손가락질과 멸시를 받아온 세월이 가슴을 미어지게 한다. 갸름한 턱선, 뽀얀 피부, 도톰한 입술, 맑은 눈매가 사랑스럽건만 평생을 숨겨서 살아야 한다니 그저 가슴이 먹먹할 따름이다. 그제야 인연이란 게 따로 있구나 싶은 그는 지난날의 잘못을 크게 뉘우치며 말하길

“그대는 어찌 그렇게 나약한 말씀을 하시오! 엄연히 아비가 있건만 어째 아비 없는 자식으로 키우려 하시오! 그간 가슴으로 스민 한기로 인해 동토의 땅으로 어지간한가 보오! 하지만 걱정하지 마시오! 오늘 이후 나는 그대 가슴에서 봄바람이 되려고 하오! 그대가 편안히 싹을 틔우고 꽃을 피울 수 있도록 춘풍이 되려고 하오!” 하고는 어깨를 감싸는데 바들바들 떨고 있다. 초겨울의 찬비를 맞은 참새인 듯 오들오들 떨며 품 안으로 얼굴을 묻는다. 황조롱이의 추격을 피해 무작정 찾아든 뱁새(오목눈이)처럼 어찌할 바를 몰라 그저 훌쩍인다. 그렇게 일각이나 지났을까? 감격에 겨운 듯 고개를 들어 빤히 올려다보는데 그새 양 볼은 눈물로 흥건하다.

“못나고 미천한 소녀에게도 그런 복이 있을까요? 언감생심 가당키나 한가요? 괜한 말씀으로 가련한 소녀를 놀리지 마세요!” 하고 말을 끝낸 그녀가 고개를 드는데 볼 위로 길게 그어진 칼자국이 눈물에 젖어 붉은 기운으로 더욱 선명하다. 문득 가슴이 불에라도 데인 듯 화끈하여 무람없이 천장을 올려보는데 자신도 모르게 눈시울이 촉촉하게 젖는 기분이다.

“아니요! 아니요! 내가 그렇게 실없는 사람으로 보이세요! 신혼초야에 평생을 같이할 부인을 두고 농을 하는 철부지 서방도 있다던가요! 행여 월하노인이 대취하여 그대와 나와의 손목을 인연의 붉은 실로 묶을 사이 없이 잠들었다면 내가 그 실을 찾아서 묶을 거요! 풀어지면 묵고 그렇게 묶고 또 묶어서 절대 풀어지지 않도록 하겠소! 이렇게 초례를 올린 마당에 하늘이 갈라놓을 때까지 절대로 그 끈을 풀어버리지는 않을 것이요. 그러니 걱정하지 마시오! 얼굴이 흉하다는 것 또한 마찬가지요! 그대의 얼굴이 지옥의 나찰녀를 닮아다 할지라도 그대와 더불어 백 년을 하루 같이 해로하여 살 것이요! 나는 오늘의 이 귀중하고도 소중한 인연의 끈을 절대 놓지 않으리다” 하고는 가여운 신부의 어깨를 양팔로 감싸 안아 가슴에 고이고이 품어

“무정한 세월 속에서 몸의 고단함은 장담치 못하겠으나 마음을 다치게 하는 일은 절대 없을 것이요! 절대로!” 하고 중얼거리며 차마 입 밖으로 내지 못한 가슴 아픈 사연을 가시로 품어 평생을 사죄하는 한결같은 마음으로 살았다고 합니다. 하고 이야기를 마친 마님이

“기왕지사 일이 이렇게 된 마당에 이제 어쩌겠습니까?”하는데 할머니는 죄인처럼 그저 고개만 주억거리며

“예~ 예! 저희는 그저 마님께서 시키는 대로 고분고분 따를 뿐입니다”

“웬걸요? 미래의 사돈께서는 그렇게 겸양하실 필요가 없습니다. 돌이켜 생각해 보는데 한 아이는 고집과 아집으로 똘똘 뭉쳐 이 어미의 가슴을 숯검정으로 태우고 또 한 아이는 지독한 병치레로 어미의 속을 새까맣게 태우다가 사돈의 극진한 간호에 끝에 간신히 목숨을 부지한 것으로 볼 때 둘 간에는 특별한 연줄이 있나 봅니다. 그것도 부부의 연으로 말입니다. 모나고 덜떨어진 것으로 봐서 틀림이 없어 보입니다. 흔히들 부부를 두고 비익조라 하질 않습니까? 반쪽짜리로 만나 한 몸으로 거듭나듯, 서로가 부족한 부분을 채워가며 살아간다고들 하질 않습니까? 그런 연유로 본다면 이것도 둘만의 인연이라면 인연으로 하늘이 점지해주신 특별한 인연이 아니겠습니까? 그렇게 아름다운 인연으로 양가가 사돈지간으로 맺어진다면 상하구별이 따로 있겠습니까?” 하는데 할머니가 마님을 쳐다보며 생각하길

말로야 사람은 누구 없이 귀하여 상하구별이 따로 없다지만 그것은 있는 자가 선심으로 같이 먹고살자며 거지 동냥 그릇에 엽전 한 닢 던져넣듯 말뿐이라며 고개를 강하게 흔들어 부정이다. 괜히 마님의 말에 부화뇌동하여 미래에 대한 티끌만큼의 오점을 남겨놓을 수는 없다고 생각하는 할머니다.

옛날 임금님의 순행 길에서 어느 복숭아밭을 지날 때였다. 때는 초여름으로 가지가지마다 주렁주렁 매달린 복숭아가 특유의 짙은 향기를 풍기며 탐스럽게 익어가고 있었다. 달콤한 향기에 취한 임금님이 자신도 모르게 군침을 삼키자 옆에 섰던 신하가 쪼르르 달려가 냉큼 따서는 한입 베어 먹고는

“임금님 복숭아가 농익어 더없이 달고 시원합니다. 소신이 먹어 본 결과 독이 없어 안심하고 드셔도 되겠습니다” 하고는 권한다. 그 모습에 좌우로 시립하고 있던 대소신료들이 깜짝 놀라

“무엄하게도 임금님이 드시는 음식에 입을 대다니!” 하고 생각만 할 뿐 그 누구도 나서는 신하가 없었다. 임금님이 총애하는 신하를 두고서 목숨이 두 개가 아닌 이상 어쩔 수 없었다. 하지만 사랑이 움직이듯 사람의 마음도 시시각각 변해 적과 아군이 뒤바뀌는 일이 비일비재하다. 더군다나 군신(君臣) 간에서 충(忠) 빠진다면 더욱 그렇다.

십 년의 세월이 흐르면 강산이 변하고, 겁의 시간 속에 바위가 부서져 모래가 되듯이, 물처럼 변화무쌍한 세월 앞에는 임금님이라 해도 어쩔 수가 없다.

몇 년의 세월이 유수같이 흐르자 간신(奸臣) 중에서도 군주가 어떤 말을 하더라도 아첨만 하는 유신(諛臣)에 사리사욕을 위해 공명정대함을 버린 간사한 자인만큼 사필귀정, 시류를 피해갈 수는 없었다. 입안의 혀처럼 달콤한 말로 사랑을 독차지하던 그도 어느 한순간 임금님의 눈 밖에 났다. 그가 임금의 눈 밖에 나자 사태는 급변했다. 군신 사이의 간극(間隙)이 점점 틈을 벌리자 기회다 싶은 신하들의 탄핵 상소가 탑 전에 산더미 같이 싸인다. 아무리 임금이라 해도 벌떼처럼 일어나는 신하들의 목소리를 무한정 왜면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추국 장에 끌려 나온 그를 향해 임금님이

“네~ 이놈! 네~ 죄는 네가 알렸다” 는 추상같은 호통 아래

“임금님 천부당만부당하옵니다. 소신은 임금님의 그와 같은 분부는 받자올 수가 없습니다. 부디 거두어주십시오! 소신은 죄가 없습니다. 소신에게 만약 조금이라도 죄가 있다면 온몸을 다 바쳐 충성을 다한 죄일 뿐이 옵니다”

“저런 무례하고 발칙한 놈을 봤냐! 지난날 너는 복숭아를 두고 짐을 기만하지 않았느냐?”

“기만이라니요! 소신은 다만 임금님을 위해 잘 익은 복숭아를 정성으로 골랐고 독의 여부를 알고자 기미(旣味 : 식사를 하기 전에 같은 음식을 다른 사람이 먼저 먹어보는 일) 차 조금 맛보았을 뿐이 옵니다. 한데 그때는 맛있다며 잘만 잡수시고 오늘에 이르러 그 죄를 추궁하다니요! 소신은 그저 억울할 할 따름이옵니다”

“억울~ 억울이라고! 그때는 짐이 네놈의 감언이설에 녹아나 무엇에 쓰인 탓이고, 아울러 멀쩡하게 나무에 매달린 과일을 두고서 무슨 독을 운운하느냐? 그건 네 놈이 이타심도, 충성심도 없음은 물론 간신이라는 명백한 증거일 뿐이다” 라며 형장으로 끌어냈다질 않는가?

오늘은 마님이 며느리를 들인다는 성급함에 마음이 태평양처럼 한량없건만 시간이 지나면 그 마음도 본심으로 돌아가리라! 미움이 농익으면 저주로 얼룩지리라! 그때는 오늘에 있었던 이런저런 이야기가 오점으로 남아 소박의 빌미를 제공할 단초(端初)가 되리라! 진중치 못하고 세 치 혓바닥을 함부로 놀린 경박한 나의 행동이 미구(未久)의 어느 날에는 딸의 행복을 망치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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