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꽃 피어날 추억] (80) 벼 수확과 보관 방법
[꽃 피어날 추억] (80) 벼 수확과 보관 방법
  • 유병길 기자
  • 승인 2022.11.01 21:4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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타작한 벼를 뒤주에 넣거나 가마니에 담아서 보관하였다.
벼를 보관하던 뒤주의 옛 모습. 유병길 기자

 

1950년 ~70년대 가을에 누렇게 익은 벼가 황금물결을 일렁이면 농부의 마음은 부자가 되었다. 모내기, 논매기 등 힘들었던 일들을 다 잊게 하였다. 된서리가 내려 벼가 마르면 온 식구가 대장간에서 두드려 만든 조선낫을 들고 벼 베기를 하였다. 가정실습을 한 어린아이들도 일손을 도왔다. 60년대에는 무거운 조선낫 대신 얇은 철판으로 만든 가벼운 왜낫이 공급되어 벼 보리 밀을 베었고, 나무를 할 때는 조선낫을 사용하였다.

볏단을 세어서 말리던 발가리의 모습. 유병길 기자

 

상주 김천 등 북부 지역에서는 벼를 베면서 큰 단으로 묶었다. 벼를 어느 정도 베면 어른들은 양쪽 옆구리에 볏단 한 단씩을 끼고 벼 이삭 부분을 붙이고 힘을 주며 바닥을 치며 볏단을 세웠다. 다음에 두 단을 가져와서 벼 이삭이 앞의 벼 이삭을 감싸며 계속하여 볏단을 세우는 것을 ‘발가리 친다’ 하였다. 발가리를 잘 치면 바람이 세게 불어도 넘어지지 않았고 비가 와도 볏단 속으로 물이 들어가지 않았다. 발가리 양쪽 끝을 괭이로 바닥을 파서 표시를 하였고, 발가리의 볏단을 세어 100단에 벼 한섬이 나온다고 추정하여, 그해의 생산량을 예상하기도 하였다.  

벼를 말리면서 보리 파종 등을 하였다. 발가리 친곳은 나중에 보리를 갈았다. 가을걷이가 거의 끝나면 마른 볏단을 소 걸채에 싣거나 지게로 운반해 마당에 큰 볏가리를 만들었다. 타작할 때는 볏가리를 헐어서 볏단을 새끼로 감아 어께위로 들어 올렸다가 쳇돌에 내리쳐서 탈곡하였다. 50년대 후반 동네에서 발로 밟는 탈곡기 계를 모아 공동 구입하였고, 돌아가면서 사용하여 너무 편리하였다.

타작한 벼는 지게 끈을 돌에 묶어 비스듬하게 지게를 세우고 키를 올려 놓았다. 삼태기에 벼를 담아 키 앞에 내리면서 한발 뒤에선 사람은 자리 가운데를 밟고 자리 양쪽 끝에 막대를 감아서 잡았다. 팔을 벌렸다가 앞으로 오므릴 때 나오는 바람에 먼지를 날려 보내고 깨끗한 벼를 뒤주에 넣었다. 벼가 가득하면 뒤주 문 늘 판자를 하나하나 끼우면서 뒤주를 채웠다. 뒤주가 없는 농가는 가마니에 넣어 마루 구석이나 방에 보관하였다. 나무로 만든 풍구가 많이 공급되어 편리하였다. 70년대 초 경운기가 공급되면서 들에서 타작하면서 집안에 먼지가 안 난다고 좋아하였다.

 벼를 베면서 작은 단으로 묶어 주던 바인더의 모습.  유병길 기자

 

77년 바인더가 공급되면서 낫이 벼를 베던 일을 하였는데, 부잣집의 몫이고 보통 농가에서는 낫을 사용하였다. PP포대가 공급되고 추곡수매를 하면서 가마니가 사라졌다.

80년대 벼를 베면서 탈곡하는 콤바인이 공급되었다. 콤바인은 물벼를 수확하므로 건조에 애로가 있었다. 곡물건조기가 공급되면서 쉽게 건조를 하였다.1990년대 초 시군단위에 미곡종합처리장(RPC)이 설치되었다. 물벼를 수매하여 건조, 저장, 도정, 포장, 판매 과정을 일괄처리하는 시설이다. 농가의 노동력 부족 해소, 미곡의 품질향상 및 유통구조를 개선하는 것을 목적으로 한다. 편리한 쌀농사 시대를 열었다.

범용콤바인으로 수확한 벼를 3톤을 실을 수 있는 농산물 적재함 비우는 장면.   유병길 기자

90년대 후반에는 범용콤바인 공급으로 30kg의 포대에 일일이 담았던 벼를 1,000kg, 500kg 포대에 담게 되어 노동력을 줄여 더 많은 면적의 벼를 탈곡할 수 있게 되었다. 요즘은 3,000kg 담을 수 있는 농산물 적재함이 보급되어 더욱 편리하다.

 

탈곡기와 풍구의 모습. 유병길 기자

 

벼농사가 기계화되면서 낫, 볏단바가리, 탈곡기, 풍구, 뒤주, 바인더 등 많은 농업용 기구가 사라지게 되었다.

쌀 소비가 줄어들고 재고 물량이 늘어나면서 쌀농사의 문제점으로 대두되고 있다. 아침밥을 먹는 등 쌀소비 촉진으로 쌀값 하락을 막아 우리의 먹거리인 쌀농사를 지켜야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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