맑은 물이 굽어 도는 곳에 정자와 숲이 어우러져 거창의 정자를 대표하는 명소
퇴계 선생 등 시인 묵객들의 발길을 멈추게 한 거창의 글이나 문학소재 대상
건계정 위쪽 산마루에는 거열산성이 있어 역사, 지리, 군사상의 요충지 역할
양산이 한 줄기 물로 묶여
빠져 나갈 문 없는 듯한데
쌓이고 쌓인 바위 절벽 속에서
차고 찬 물이 솟아난다
흥 솟아 노래도 하고 싶고
그윽한 곳 낙원 열어 살고파라
흐르는 강 막을 길 없노니
흐르는 물 임하여 누구와 의논할까.(건계정 퇴계 이황)
조선 중종 38년(1543년) 정월 초4일 퇴계 이황 선생이 거창에서 12㎞ 떨어진 영승마을에 살던 처외숙 전철 공과 장인 권질 공을 찾아 머물다가 안동으로 돌아가는 길에 건계정을 지나며 경치에 감탄하여 읊은 시다.
덕유산과 기백산에서 발원하여 거창군 북상면에서 소정천과 합류한 거창 위천(영호강)은 마리면 소곡마을 일대에서 직각으로 굽이쳐 북으로 흐르다가 이후 다시 남동 방향으로 크게 굽이치면서 방향을 틀어 건흥산과 망덕산 사이를 빠져나간다. 건계정은 이러한 하천의 곡류로 인하여 하식애와 포인트바가 형성된 경남 거창읍 상림리 745-2번지에 위치한다. 이곳 절벽 위의 산마루에는 거열산성이 있어 삼국시대 신라 화랑의 말발굽 소리가 들리는 듯하고, 당나라군을 섬멸하였던 거열주 대감 아진함과 군사들의 모습이 그려지는 등 예로부터 역사 지리 군사상 요충지였다.
중국 남당조에 건주(建州)자사를 지낸 자조는 장씨의 시조이고, 북송대의 염계(濂溪) 주돈이는 성리학의 시조이다. 조선말 대표적 유학자이며 독립 운동가 면우 곽종석(1846-1919)이 여기서 '건(建)' 자와 '계(溪)' 자를 가져와 선조의 고향을 잊지 말라는 의미로 ‘건계정’이라 이름을 짓고, 고려 문하시중 판삼사사 아림군 세적비의 기문을 지었다. 두 세대가 지나 정자가 퇴락하자 후손들이 1970년에 중수하여 현재의 모습을 유지하고 있으며, 지금까지 거창 장씨 종중에서 수리하며 관리하고 있다.
정자는 건계정과 장씨 정려 및 비석 등의 유적으로 구성되어 있다. 건계정은 정면 3칸과 측면 2칸으로 겹처마 팔작지붕의 기와집이다. 자연 암반 위에 건축하여 아래 기둥이 암반의 높낮이를 따라 자연스럽게 설치되어 있다. 정자 안에는 용 문양과 대금을 불며 비천하는 선인과 호랑이·산수화 등을 그려 두어 신선 세계를 연상케 한다. 정자 안에는 조정희의 ‘건계정기’를 위시하여 후손들과 유림의 기문과 상량문 4편, 문인 27명의 한시가 걸려 있다.
정려 안에는 두 개의 정려비가 있다. 왼쪽 정려는 1592년 선조가 의주로 피난할 때, 적의 선봉을 피하여 임금을 업고 10리 길을 안전하게 호종한 공로로 장만리에게 내린 정려이고, 오른쪽 정려는 1593년 2차 진주성 전투에서 경상 우도 병마절도사 최경회 장군 휘하에서 끝까지 성을 지키다 전사한 공로로 장헌부에게 내린 정려이다. 정려는 본래 거창읍 대동리 비선 거리에 있었으나 도로 확장 공사로 1994년 건계정 경내로 이전했다.
고려 문하시중 판삼사사 아림군 세적비는 건계정 건물 오른쪽에 있다. 비문 내용은 거창 장씨가 송나라에서 고려로 귀화하게 된 내력과 충헌공 장종행, 아림군 장두민, 승지로 증직된 장만리, 참의로 증직된 장헌부, 이괄의 난에 인조를 호종한 만호공 장일남(章逸男), 무신란에 창의한 장봉익(章鳳翼) 등 공신들의 공적을 전하고, 옛 장득상(章得象)에게 주금당(晝錦堂)이란 독서당이 있었듯이 아림군에게는 건계정이 있어서 후손들이 선조의 업적을 잊지 않고 추모하며 대대로 자손이 창성하기를 기원한다는 내용을 담고 있다.
건계정은 천연 암반 위에 세워 자연 그대로의 아름다움을 최대한 살린 건물로, 전통적으로 자연 친화적이면서 도교적 건축 기법을 적용했다. 정자 내부에도 신선 사상을 표현하는 그림을 그려 두어 그 지향점을 찾아볼 수 있다. 고려 후기 한·중 교류사를 살펴볼 수 있는 역사성을 지니고 있으며, 귀화하여 우리나라에 동화된 성씨의 후손들이 자연을 사랑하고 국가에 기여한 업적을 살펴볼 수 있는 문화 자료로 의의와 가치가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