50여동의 당우(堂宇),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호남 제일의 대가람 송광사
50여동의 당우(堂宇), 16명의 국사(國師)를 배출한 호남 제일의 대가람 송광사
  • 장희자 기자
  • 승인 2019.09.25 14: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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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0여동 당우(堂宇)를 거느린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 본사, 한국 선종의 대수도도량으로 유서깊은 승보사찰, 통도사, 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


관음전에서 바라본 송광사 전경

송광사는 전남 순천시 송광면 신평리 조계산 서편에 있는 대한불교 조계종 제21교구의 본사로서 이전에는 대길상사, 수선사라고 했다. 한국 선종의 대수도도량으로서 유서깊은 승보사찰이며, 통도사, 해인사와 함께 우리나라 3대 사찰로 꼽히는 절이다.

송광사 임경당 정자

송광사 창건에 대한 정확한 자료는 없으나 신라말 체징이 길상사라는 소규모 절을 지은 것에서 비롯되었다고 한다.

다리위에 지은 청량각 누각

고려 인종 이후 거의 폐허화되었는데, 1200년 보조국사가 수행결사인 정혜사를 지리산 상무주암에서 길상사로 옮긴 다음부터 대규모 수도도량으로 발전했다.

송광사 일주문

고려 희종은 정혜사의 이전과 때를 같이하여 송광산 길상사를 조계산 수선사로 개명하라고 했고, 이후 조선초에 이르기까지 180여년 간 진각 등 15명의 국사를 배출하는 소위 수선사시대를 열게 되었다.

송광사 들어가는 우화루 정문

1395년(태조 4)에 고봉화상이 전당을 중건했고, 그의 뒤를 이은 중인이 1420년(세종 2)에 당우를 증축하는 한편 절의 지위를 높이기 위해 정종의 윤지로 설립된 수륙사를 폐지하고 선종사찰로 복귀했다.

송광사 대웅보전: 현대 한국전통 건축의 수작

그후 수선사를 언제 송광사로 바뀌었는지는 알수 없으며, 임진왜란과 정유재란으로 폐사 직전에 놓인 송광사는 응선과 부휴 등의 노력에 힘입어 명맥을 유지했다.

대웅보전 좌측에 자리잡은 승보전

1842년의 화재와 6.25전쟁 등으로 많은 전각들이 소실되거나 파괴되고 다시 중건되는 우여곡절을 겪었지만 현재 한국 선종을 이끄는 중심사찰의 역할을 하고 있다.

대웅보전 우측에 자리잡은 지장전

6.25전쟁 전의 가람배치는 의상의 법계도와 같았다고 하며, 현존 당우로는 국사전(국보 제56호), 하사당(보물 제263호), 약사전(보물 제302호), 영산전(보물 제303호) 등 50여 동이 있어 대가람의 면모를 짐작하게 해준다.

송광사 관음전: 고종황제 황실 기도처

송광사에 있는 중요문화재로는 목조삼존불감(국보 제42호), 혜심고신제서(국보 제43호), 고려고문서(보물 제572호), 경패(보물 제175호), 금동요령(보물 제176호), 등이 있다

1093년 간행된 대승아비달마잡집론소(보물 제176호), 1095년에 간행된 묘법연화경찬술(보물 제206호)과 금강반야경소개현초(보물 제207호), 대반열반경소(보물 제90호), 묘법연화경관세음보살보문품삼현원찬과문(보물 제204호), 영산전목불좌상 등이 있다.

침계류와 폭포계곡
송광사 하면 떠오르는 빼어난 절경 능허교와 우화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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