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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전기부터 600여 년의 역사를 오롯이 간직하고 있는 조선시대 대표적인 계획도시로, 성곽, 중요민속자료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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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리의 고장으로서 가야금병창, 판소리 등 유무형의 자원이 잘 보존되어 있으며 성내에 주민이 거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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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시대 마한땅, 백제때 파지성, 고려때 낙안군 고을터 이며, 조선시대 성과 동헌(東軒), 객사(客舍), 임경업군수비, 장터, 초가가 원형대로 보존되어 성과 마을이 함께 국내 최초로 사적 제302호에 지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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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 태조 6년(1397) 왜구가 침입하자 이 고장 출신 양혜공 김빈길 장군이 의병을 일으켜 토성을 쌓아 방어에 나섰고 300년 후 인조4년 (1626) 충민공 임경업 장군이 33세때 낙안군수로 부임하여 현재의 석성으로 중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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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른 지역 성(城) 과는 달리 넓은 평야지대에 1∼2m 크기의 정방형의 자연석을 이용하여 높이 4m, 너비 3∼4m, 성곽 총 길이가 1천4백십m로 동내, 남내, 서내 등 4만 1천 평에 달하는 3개 마을 생활 근거지를 감싸안은 듯 네모형으로 견고하게 축조되어 400년이 가까운 지금도 끊긴 데가 없고 웅장하기 이를 데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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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성 안에는 98세대가 실제 생활하고 있는 살아 숨쉬는 민속고유의 전통마을로서 민속 학술자료는 물론 역사의 산교육장으로 가치를 인정받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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동문을 비롯 서, 남문을 통해 성안에 들어서면 사극 촬영장이 아닌가 하는 착각에 빠져들며 용인, 제주 민속마을 같이 전시용이나 안동 하회마을과 같이 양반마을도 아닌 그저 대다수의 우리 서민들이 살아왔던 옛 모습이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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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 시가지에서 서쪽 22㎞ 거리의 읍성 민속마을은 6만8천여평으로 초가는 초라한 느낌마저 들지만 조상들의 체취가 물씬 풍겨 친근한 정감이 넘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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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부 지방 독특한 주거양식인 툇마루와 부엌, 토방, 지붕, 섬돌 위의 장독과 이웃과 이웃을 잇는 돌담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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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장이와 호박넝쿨이 어우러져 술래잡기 하며 뛰놀던 어린 시절 고향을 연상케 하며 마당 한켠엔 절구통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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