밀양의 임진왜란 호국성지 삼랑진 작원관(鵲院關)
밀양의 임진왜란 호국성지 삼랑진 작원관(鵲院關)
  • 장희자 기자
  • 승인 2020.10.14 1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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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시대 동 · 남 육로와 남 · 북 수로의 요충지로서 교통과 국방의 2대 관문 중 하나.
작원진 나루터로 출입하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하던 원(院), 관(關), 진(津)의 기능 수행.
임진왜란때 밀양부사 박진 장군이 300여명 인솔 결사항전하며 나라를 굳건히 지킨곳
역사적의미와 중요성으로 문화재자료 제73호, 자손 호국사상 고취해 주는 산 교육장
위령탑에서 바라본 작원관과 낙동강 모습. 경부선으로 열차가 지나가고, 저 멀리 낙동대교가 보인다. 장희자 기자

경남 밀양시 삼랑진읍 검세리 산101번지에 있는 작원관(鵲院關)은 앞쪽으로는 만어산 우곡리 계곡에서 흘러들어온 물이 우곡천을 이루어 낙동강과 합류하고, 뒤쪽으로는 천태산자락이 낙동강과 만나면서 절벽지를 이루는 곳이다. 원래 작원관은 이곳에서 700~800m 아래쪽 천태산 노적봉 아래에 있었다.

고려 고종 때 최초로 왜적의 침범을 방어하기 위하여 영남 중앙국도 관문으로 건립되었으며이후 동 · 남 육로와 남 · 북 수로의 요충지로서 문경의 조령관과 함께 동래에서 서울을 연결하는 교통과 국방의 2대 관문 중 하나였다.

김해와 밀양 등 낙동강 유역에 창궐하던 왜구의 침공을 방비하던 요새지였던 작원관은 작원진 나루터로 출입하는 사람들과 화물을 검문하던 원(院), 관(關), 진(津)의 기능을 수행했다. 작원관은 육지로는 양산과의 경계이며 서울로 북상하는 교통 및 국방상의 첫 번째 요새지이다. 또한 낙동강을 사이에 두고 김해를 바라보는 수로이기에 동서의 요충을 이루는 곳이기도 하다.

작원관 건물은 한남문이라 적힌 성문이 있고 성문 위에는 공운루라 적힌 누각이 있다. 장희자 기자

작원관은 임진왜란 당시 밀양부사 박진 장군이 작원관지에서 침범해 들어오던 소서행장의 군대를 막기 위해서 제일 방어선을 구축하고 결사 항전한 곳이다. 박진 장군은 군사 300여 명을 인솔하여 활과 돌로 무장한 병사를 배치했다. 항전 10여일 지난 후에는 300여명의 군사가 거의 전사한 임진왜란 격전지로 유명한 곳이다.

전투에 패한 후 폐허로 남아 있다가 일제 강점기에는 경부선이 지나면서 완전 해체됐으며, 1936년에는 낙동강 대홍수로 그 터조차 사라지고 말았다그러다가 1980년대 향토사학자 경운(耕雲) 송만술(宋萬述) 선생이 주축이 되어 터 보존과 성곽 복원 등 역사적 의미를 되찾기 위한 노력이 시작되어 작원관 터는 1983년 7월 경남 문화재자료 제73호로 지정됐다. 이어 1995년 마침내 성문과 성루가 옛 모습을 되찾게 됐다. 이와 함께 1939년 유래를 알리기 위해 본래 터에 세운 비석들도 현 위치로 옮겨 세웠으며, 2014년 6월 공원화 사업을 완료했다.

작원관지 가장 높은 곳에 임진왜란때 목숨을 바친 300여 명과 밀양부사 박진의 영혼을 위로하기 위한 위령탑이 조성되어 있다. 장희자 기자

성문은 남쪽을 막는다는 뜻으로 한남문(捍南門)이란 이름을 얻었다. 성루는 공운루(拱雲樓)이다. 영남의 이름난 역원(驛院)과 관방(關方)이 옛 명성을 회복한 것이다.

작원(鵲院)이라는 지명의 유래에 대해 두 가지 전설이 전해지고 있다. 신라 때 어느 임금이 만어사 행차를 위해 이곳 나루터를 건넜을 때 깎아지른 절벽 위에서 수많은 까치들이 지저귀며 임금 일행을 맞이하여 까치원이라 하였다는 설이 그 하나다두번째는 김유신 장군이 이곳에서 백제의 군사를 맞아 싸울 때 백제의 왕이 위기에 몰리게 되자. 부왕을 따라 종군한 공주가 금까치로 변해 날아다니며 신라 진영을 교란시켰고. 백제의 왕은 이를 틈타 위기를 모면하였으나 금까치는 김유신 장군이 쏜 화살에 맞아 검세 쪽으로 날아갔다고 한다. 이후 금까치가 날아간 마을을 금새라 했고 이 곳을 까치원이라 했다.

작원관은 역사적 고증과 복원의 열의를 가진 삼랑진의 뜻 있는 청년들이 자손들에게 호국사상을 고취해 주는 산 교육장이 되기를 바라는 마음으로 오래 전부터 항전 첫날인 음력 4월 18일에 임진왜란 호국영령들에 대한 위령제를 봉행해 왔었는데, 공식적인 행사는1994년 삼랑진읍 연합청년회인 양지회에서 제 1회 위령제를 봉행하였고, 1996년 이후 작원관이 재건립된 후 작원관보존위원회에서 위령제를 지내고 있다.
작원루 비각 안에는 작원대교비, 작원진석교비, 작원관문기지비, 3개의 비가 세워져 있다. 장희자 기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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