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0.06.12 17:00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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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생을 바다위에서 살고 단 한번도 육지에 발을 내딛지 않은 사람
배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사라져간 피아니스트의 이야기
우리들은 88개의 유한한 건반 위에서 무한한 음악을 만들수 있어.....

영화 ‘피아니스트의 전설’(The Legend of 1900, 1998)

2020년 1월 1일 한국에서 재개봉된 영화다. 1998년 제작되어 2002년 개봉되었다가 18년만에 재개봉하면서 ‘리마스터링’(예전 오리지날 음악이나 영화를 새롭게 디지털로 복원하여 음질이나 화질을 개선하는 일) 작업을 거쳤다.

이탈리아에서 제작. 시칠리아의 시골 꼬마 토토와 늙은 영사기사 알프레도의 따뜻한 우정을 그려낸 ‘시네마 천국’으로 우리들에게 오래토록 기억되고 있는 감독 ‘쥬세페 토르나토레’가 이 영화에서도 감독을 맡았다. ‘시네마 천국’을 비롯해 수많은 영화음악을 만들어 왔던 ‘엔리오 모리꼬네’가 음악감독을 맡아 영화의 몰입도를 끌어 올려준다.

주인공 나인틴 헌드레드 역을 맡은 ‘팀 로스’와 맥스역을 맡은 ‘프룻 테일러 빈스’의 연기 앙상블도 일품이다.

원작은 ‘알렉산드로 바리코’의 ‘노베첸토’(NOVECENTO)이다. 평생 단 한 번도 육지에 발을 딛지 않고 배 위에서 태어나서 자라고 사라져간 천재 피아니스트 나인틴 헌드레드의 남다른 일생을 그린 영화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포토. 캡처

영화는 후줄근한 옷차림의 한 중년 사내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된다. 젊은 시절 오로지 트럼펫 연주에만 관심이 있었던 그는 유럽을 오가는 여객선의 트럼펫 연주자로 한 시절을 살아왔다. 평생을 함께 해온 분신과도 같은 악기를 팔기 위해 악기상에 들른 그에게 주인은 터무니 없이 값을 후려친다. 6파운드 10실링. 20불은 받아야겠다는 그에게 주인은 야멸차게 대꾸한다. 그 돈으로 식사부터 먼저 하러 가는게 낫겠다고. 아무리 무명 연주가가 연주하던 거라도 그건 내 인생이죠. 당신은 오늘 역사의 한 부분을 산 거요.

문을 향해 가던 그가 뒤돌아서 묻는다. 마지막으로 한 번만 불어도 될까요? 자신의 인생을 걸었던 트럼펫. 연주를 듣던 주인의 눈빛이 흔들린다. 어디선가 오래된 음반을 가져와 들려준다. 똑 같다고. 이 곡을 연주한 피아니스트가 누구냐고. 아마도 모를 겁니다. 이름을 말해도. 실제 세상에서는 존재하지 않은 존재일지도 모르지요. 이렇게 영화는 시작된다.

유럽에서 출발해 신대륙 미국을 향해 가는 증기선 버지니아호는 여행자들과 이민자들로 가득하다. 멀리 미국땅이 보이자 배에 탄 모든 이들은 열광하며 아메리카! 아메리카! 탄성과 환호를 내지른다. 드디어 꿈과 희망의 나라, 기회의 땅에 도착한 것이다.

썰물처럼 승객이 빠져나간 객실 바닥을 엎드려 기어 다니며 혹 돈 될 만한 물건이라도 떨어져 있나 살피던 화부 데니 부드만은 소득이 없자 쌍욕을 해댄다. 그때 피아노 위에 놓인 바구니가 눈에 띈다. T.D. 레몬이라 적힌 카드와 함께 두고간 아기. 누군가 배에서 아기를 낳아 버려 두고 간 것이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포토. 캡처

1900년 1월 1일 새해 첫날 뜻밖의 선물을 받은 그는 동료들의 야유와 조롱에도 아기에게 ‘데니 부드만 T.D. 레몬 나인틴 헌드레드’라는 길고 긴 이름을 붙여준다. 증기선을 움직이는 동력인 석탄과 열기, 거칠고 위험한 환경과 노동자들 사이 배의 밑바닥에서 그는 사랑과 정성으로 나인틴 헌드레드를 기른다. 아이는 유리창을 통해 바깥 세상을 바라보고 석탄 창고 천장에 매어둔 요람에서 잠도 자고 글자도 배우고 세상도 배운다. 마마가 뭐야? 그건 경주하는 말. 고아원은? 그건 아이가 없는 어른을 가두는 곳이지. 아이가 새로운 글자를 읽고 뜻밖의 질문을 할 때마다 파안대소하며 기뻐하던 그는 나인틴 헌드레드가 8살이 되었을 때 사고로 배에서 죽는다. 아이는 이제부터 호적도 비자도 보호자도 없는 투명한 존재로 세상을 살아가게 되었다.

어느날 출입이 금지된 선실에 몰래 올라간 아이는 전혀 다른 세상을 훔쳐본다. 아름다운 음악과 춤 즐거움이 있는 세상을! 그 후 어느날 밤 승객들이 피아노 소리를 듣고 몰려온다. 어두운 무대에서 연주하는 나인틴 헌드레드를 감동 어린 표정으로 감상하는 승객들로 만원을 이룬다. 그 순간 이후 그는 피아니스트로 살아가게 된다.

트럼펫을 불어 이민국을 통과한 맥스는 여객선의 트럼펫 주자가 된다. 그러나 사흘만에 폭풍을 만나고 배는 집채 같은 파도에 이리저리 휩쓸리고, 두려움과 멀미로 기진맥진한 맥스는 초주검이다. 그때 멀미약을 주겠다는 누군가를 만나 따라 나선다. 피아노 앞에 앉은 그는 피아노의 고정쇠를 풀고 자신의 옆자리에 앉으라고 한다. 미끄러지는 피아노를 타고 천연스레 연주하는 그 옆에서 맥스도 차츰 진정이 되기 시작한다. 신이 나기 시작한다. 천장의 샹들리에는 춤을 추고 세상은 요동치며 빙글빙글 돌아가는데 둘은 음악에 빠져든다. 미끄러지는 피아노가 벽을 들이받는 대형사고를 치고 둘은 배 밑바닥으로 쫓겨난다. 석탄 더미에 누운 두 사람.

이 배에서 평생 석탄이나 푸다 죽을 거야 한탄하는 맥스 튜니. 뉴올리언즈의 겨울은 아름다워. 3월이면 안개가 몰려오고 집들은 지붕이 사라지지. 모든 것의 윗부분이 사라진거야. 어떻게 그걸 알아? 묻는 맥스에게 나인틴 헌드레드는 '난 이 배에서 20년 동안 단 한번도 내린 적이 없어'라고 답한다. 비로소 그들은 속내 이야기를 하는 오직 하나의 친구가 된다. 그는 자신의 영감과 상상으로 세상을 바라보고 그의 손 끝에서 흘러 나온 음악은 그가 원하는 곳으로 사람들을 데려 가게 되는 것이다.

그들 인생의 황금기를 보낸 버지니아호 무대에서 나인틴 헌드레드와 맥스는 재즈를 연주하며 수많은 순간들을 함께한다. 홀을 가득 메운 승객들은 그가 인도한 음악에 몸을 싣고 여행을 떠난다. 매번 종착지가 다른 여행지로. 그의 음악적 영감은 어디서 나온 걸까. 매 순간 그 자리에 함께한 사람들을 하나씩 관찰하면서 그 느낌을 즉석에서 연주하는 나인틴 헌드레드. 수녀가 되고 싶은 매춘부, 젊은 정부와 남편을 해치우고 열쇠를 갖고 도피하는 늙은 여인, 아메리카를 처음 본 남자의 반응..... 그가 바라보는 세상은 음악이 되어 피아노 위를 떠다니고 청중들은 감동으로 폭발한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포토. 캡처

당시 재즈를 처음 만든 명인이라 자처하는 ‘젤리 롤 모턴’이 소문을 듣고 배에 오른다. 나인틴 헌드레드와의 대결을 통해 자신의 입지를 으스대고 싶은 마음에서다. 젤리의 등장에 모두가 넋이 나간다. 긴장과 위기, 겸손과 자만, 익숙한 걸음과 첫 발걸음, 담배 한 개비를 물고 양주를 들이켠 그가 피아노 앞으로 다가온다.

재즈를 발명한 분이시죠? 악수를 청하는 겸손한 손을 물리치고 자리를 비켜 달라는 젤리. 담배 한 개비가 다 타기 전에 멋진 연주가 끝난다. 그는 일어나 피아노 앞으로 가서 ‘고요한 밤’을 연주한다. 허망하게 바톤을 넘기자 젤리의 음악은 상승 곡선을 그린다. 그때 친구 맥스가 와서 말한다. 모두 네게 돈을 걸었다고. 난 이제 평생 석탄이나 푸게 될 거라고. 나인틴 헌드레드는 눈물 어린 눈으로 말한다. 나도 저 사람에 걸고 싶어.....

세 번째 장. 방금 들은 젤리의 곡을 암보로 똑같이 연주하는 나인틴 헌드레드. 비로소 잠에서 깨어난 듯 자신의 페이스를 찾아간다. 마지막 배틀에서 젤리의 손은 신들린 듯 건반 위에서 춤을 추고 나인틴 헌드레드는 맥스에게 담배 한 대를 청한다. 사람들의 야유가 들리고 불 붙인 담배를 두고 그의 연주가 시작된다. 혼신의 힘으로 무아의 경지를 헤매며 건반과 손이 하나가 된 음악. 인간의 경지를 벗어난 극한. 애무하듯 휘몰아치는 피아노 소리에 곡이 끝나고도 좌중은 물을 끼얹은 듯 고요하다. 모든 사람의 표정은 넋이 나간 듯 얼어붙어 있다. 불붙은 담배는 아직 반너머 남았다. 젤리의 입에 담배를 물려 주는 것으로 배틀은 끝이 났다.

피아니스트의 전설 포토. 캡처

선창으로 보이는 소녀에 대한 단 한 번의 사랑과 그 사랑이 오롯이 담긴 음반의 운명. 단박에 운명을 알아 보고 그의 뺨에 입술을 대고 멀어져가는 소녀. 오랫동안 배 위에서 음악과 함께 행복했던 그는 단 한 번 육지에 내리고 싶어한다. 맥스는 그를 위해 낙타털 코트를 벗어주고 그는 모두에게 인사하고 배웅을 받으며 트랩을 내려선다. 한 걸음 한 걸음. 그러나 눈 앞의 마천루와 빌딩숲을 바라보던 그는 더 이상 발을 내딛지 못한다. 트랩의 반도 못 내려가던 그는 쓰고 있던 모자를 벗어 힘껏 날려 보낸다. 그리고 돌아서 왔던 길을 되짚어 배로 돌아간다. 

1933년 9월 상륙허가증과 체불 임금을 받아들고 맥스는 배에서 내려온다. 그후 버지니아호의 폐선 소식을 듣고, 그는 틀림없이 배에 남아 있을 친구를 찾아 나선다. 이제 쇳덩이에 불과한 쇠락한 뱃전에서 그가 축음기에 음반을 걸고 바늘을 올려 놓는다. 나인틴 헌드레드의 사랑이 담긴 음반을 낚시처럼 드리우고...

더 이상 희망이 없어 보이는 폐허의 녹슨 쇠기둥 아래서 마주앉은 두 사람. 어떻게 지냈냐는 맥스의 물음에 그는 대답한다. 그동안 곡을 만들었어. 아무도 춤추지 않을 때도, 전쟁 중에도, 폭탄이 떨어질 때도... 이 배는 다이너마이트 산이야 곧 폭파될 거라고. 배에서 내려가자 처음부터 다시 시작해 보자고. 세상은 너의 말에 위로받고 열광할거야.

나인틴 헌드레드는 답한다. "트랩 위에서 본 도시는 멋있었지만 나는 세상의 끝은 보지 못했어. 세상에는 너무나 많은 길이 있어. 그 많은 길들 중 어떻게 하나를 선택하겠어. 피아노의 건반은 88개로 유한하지만 우리는 무한한 음악을 연주할 수 있지. 그렇지만 무한한 건반이 주어진다면 난 음악을 만들 수 없어. 그 많은 길들 중 어떻게 하나를 선택하겠어. 난 이 배에서 태어나고 자랐어. 세상은 날 스쳐 지나가곤 했지. 한꺼번에 2천 명씩. 난 이 배에서 행복을 연주했어. 난 이렇게 사는데 익숙해. 육지는 내게 너무 큰 배야. 내가 연주할 수 없는 음악이고. 난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았어. 맥스 네게만 빼고. 힘들겠지만 날 용서해. 난 안 내려."

마지막 작별을 하고 껴안는 두 남자. 마지막으로 맥스가 내려오고 트랩은 거두어진다. 그의 가늘고 긴 열 개의 손가락이 허공을 가르고 건반을 누른다. 그의 맑은 두 눈. 버지니아호의 폭파.

맥스의 이야기를 듣고난 악기상 주인은 문을 열고 나서는 맥스에게 트럼펫을 돌려준다. 이게 필요할 거라고. 좋은 이야기는 낡은 트럼펫보다 낫다고. 적적하고 흐릿한 길을 돌아 맥스가 트럼펫을 끼고 사라진다.

두 시간이라는 짧은 시간동안 긴 여행을 했다. 있을 법하지 않은 누군가의 인생을 들여다보고 세상을 바라보는 시각 하나를 얻는다. 더 크게, 더 높이가 아니라 더 작고, 더 낮은 곳에 숨겨진 사금파리 하나를 주워 햇볕에 비춰 자세히 들여다 보기. 그 속에서 무지개를 찾을수 있으리라는 믿음을 갖게 하는 영화다.

곳곳에 숨겨진 보물 같은 캐릭터들이 보여 주는 인간미와 그들의 모습을 잘 그려낸 연기자들과 음악이 어우러져 감동을 주는 마스터피스다. 좋은 이야기는 낡은 트럼펫보다 낫다는 이야기가 긴 여운을 남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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