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그리는 캘리그라퍼 박윤규 작가
시를 그리는 캘리그라퍼 박윤규 작가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0.05.06 22:59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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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음에 담아둔 시를 손글씨로
그 구절들이 날아와 우리의 마음을 쓰다듬고
지금은 그가 주는 말이 위안과 희망이 된다.
박윤규 시인. 강지윤 기자

박윤규(64)는 시인이다. ‘문예사조’로 등단하여 4권의 시집을 펴냈다. 또한 부산 경남지역에서 활동하는 캘리그라피 작가로 구성된 ‘한글손글디자인협회’회장이다. 한글 손글의 우수성과 아름다움을 알리는 일에 헌신한다.

지금은 부산의 역사와 문화를 담고 있는 테마거리 ‘초량 이바구길’ 168계단 꼭대기에 자리한 ‘공감 갤러리’에 둥지를 틀고 작품활동 중이다. 그의 작품은 시와 손글과 바탕공간이 하나되어 보는 순간 마음을 따뜻하게 감싸안는다. 그가 골라서 쓴 한 구절이 위로가 되고, 눈물을 닦고 일어서게 하는 힘이 되며, 마음 밑바닥을 들여다 보는 우물이 되는 것이다.

꽃샘추위보다 늦은, 사월 추위가 옷깃을 여미게하는 흐린 봄날 ‘공감 갤러리’에 그를 만나러 갔다. 출입구 벽에 걸린 글귀가 먼저 말을 걸어온다.

'오늘도 그대를 사랑하였네?'

-반갑습니다 ‘물고기 공방’에서 ‘시를 읽는 저녁’이후 오랜만에 뵙습니다. 올라 오면서 보니 바로 옆으로 모노레일이 지나고 이 지역에 근대 유산이 많이 남아 있어 관광객이 많이 찾겠습니다. 지금은 조용하지만... 이쪽으로 작업실을 언제 옮기셨는지요?

▶ 3년정도 됐습니다. 동구청에서 연락이 와서 이런 공간이 있는데 갤러리로 사용하면 어떻게냐고? 아마 이 지역을 찾으시는 분들께 우리 것을 보여 주고 싶어서였겠지요. 지금은 조용하지만 주말이나 방학때는 많은 분들이 다녀 갑니다. 외국 관광객들도 많습니다. 그들은 한글을 모르니까 뜻도 모르지요. 그래도 그렇게들 좋아합니다. 그런걸 보며 한글이야말로 최고의 문화 유산이라는 생각이 들어요.

-시를 쓰면서 캘리그라피를 하십니다. 시에 대한 이해와 사랑이 있으니 쓰시는 글귀가 마음을 울리고 감동을 주나 봅니다. 그럼 시나 손글씨는 언제부터 쓰시게 되셨는지요?

▶ 시를 쓰게된 건 대학 국문과에 들어가서였지요. 젊었을 때야 세상 모르고 울컥해서 쓰고 무담시리 좋아서 쓰고...(웃음). 그러다 ‘문학회’를 하나 만들어서 친구들과 시에 대해 밤새도록 토론도 하고 그냥 썼지요. 집사람도 그때 만나고... 또, ‘전통예술연구회’라는걸 만들어서 ‘수영야류’도 하고 꽹과리도 치고 했지요. 그 때부터 틈이 나면 글씨도 쓰기 시작했습니다. 그 후 ‘문예사조’로 등단했습니다.

그는 1956년생이다. 남해에서 태어나 부모님은 부산으로 나가고 훈장을 하던 조부님께 4살때부터 천자문을 배웠다. 그 때를 그는 이렇게 회상한다. “글을 모르던 어른들이 지게 작대기로 논두렁에 이리저리 그리면 내가 읽어 주고 했지요. 후에 부산에서 철공소를 하는 아버지를 따라 부산으로 나왔습니다. 대여섯 살때부터 일하시는 아버지 옆에 쪼그리고 앉아 나도 용접을 하고 했습니다. 부산으로 나오니 옆집에 붓글씨를 쓰는 분이 있었는데 길거리에 책상을 놔두고 글을 써 주는 모습이 그렇게 부럽더라구요”

지금의 그가 시를 읽고 쓰고, 나무에 목각하고, 등이나 모시 캔버스 돌에다 글을 쓰고, 많은 사람과 함께 나누는 일은 어린 시절에 그가 경험한 모든 일에 뿌리가 닿아 있어 보였다.

졸업후 그는 학교에 근무하게 된다. 50~60명 동료 중에서 상장을 쓰고 차트를 만드는 일 등, 손글씨를 써야할 일은 언제나 그의 몫이었다. 일은 잘 하는 한 사람에게만 밀려들었다. 심지어는 수업을 대신해 줄테니 대신 글을 써 달라는 일도 부지기 수였다. 그의 말처럼 “글은 쓰면 쓸수록 늘지 되돌아 가지는 않는법”이었다. 그러한 일들이 그의 공부가 됐다.

 

* 부산진 문화원 시절, 사진작가 최민식 선생님과의 인연들도 있었다.

부산진 문화원으로 자리를 옮겨 사무국장으로 일했다. 많은 강의를 만들어 주민들과 연결하자 멀리 대구와 지방에서도 강의를 들으러 왔다. 대한민국 국가 기록원 1호이신 최민식(1928~2013) 사진가도 모셨다. 모두들 환호하고 강의실은 수강생으로 넘쳐났다. 최선생님이 일본서 돌아와 부산의 자갈치시장 부근에서 길거리의 부랑자들, 가난한 이들의 삶을 흑백의 사진에 담으면서 왕성히 활동 하실 때였다. 최선생님의 작품을 여러장 받아 알고 지내던 시인들에게 한 장씩 나눠주고 이 사진을 주제로 시를 써보자. 이렇게 하여 UN공원에서 ‘평화 사진 전시회’도 열었다. 최선생님과의 각별한 인연이 소중한 지 말수 적은 그가 이야기를 이어간다. 일본서 독학으로 사진 공부하다 한국에 들어온 선생님이 가난한 사람, 팔다리 없는 사람, 넝마주이, 부랑자들을 사진 찍었는데 이 사진들이 북한으로 넘어 가서 이게 한국 실상이다하고 해외 매체에 발표 되니까 ‘보안사’에 끌려 가서 조사도 받고 하셨지요. 돌아 가시고 그의 작품 13만 점과 그가 쓰던 카메라 볼펜까지 모조리 ‘국가 기록원’으로 들어 갔습니다. 역대 대통령, 김수환 추기경을 제외하고 개인자격으로 들어간 유일한 분이 최민식 선생님이지요.

 

그의 작업실. 강지윤 기자
그의 작업실. 강지윤 기자

그 후 그는 자신의 평생의 일을 위해 금정산 자락 대천천변에 ‘물고기 공방’을 연다. 부산의 북쪽끝 북구에 화명신도시 2만가구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서였다.

 

*물고기 공방시절 그는 매달 마을 주민들과 시인들이 함께하는 ‘시를 읽는 저녁’을 열었다.

신도시에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면 상가가 열리고 마트 병원 약국 학교등 주민 생활 편의시설이 들어선다. 오래 전부터 있어 왔던 토박이 마을 주민들과 새로 들어선 아파트의 주민이 한자리에 앉을 기회는 좀처럼 없다.

그 무렵 그는 오래된 마을 벽돌집 이층에 ‘물고기 공방’이라는 작업실을 연다. 바닥을 다듬어 좌식 탁자 예닐곱 개가 놓이고 사방 벽에는 그의 작품들이 분신처럼 걸렸다. 한 켠에는 간이침대를 들이고 숙식이 한 공간서 이루어지는 요즘식으로 말하면 원룸이었다.

오랫동안 시를 쓰고 4권의 시집을 내면서도 그의 마음을 관통하는 하나의 생각이 있었다. 시든 예술이든 생활과 동떨어져서는 안된다. 생활 속에서 삶을 좀 더 풍요롭게 하는 게 예술이 아닐까. 시가 시집에서 뛰쳐 나오고 그림이 액자에서 빠져 나와 사람들과 함께할 때 그게 진정한 예술의 역할이 아닐까. 모든 사람의 마음 속에는 다 시가 있다. 시인과 주민들과 함께하는 자리. 한 달에 한 번이라도 그런 자리를 만들어 보자. 대여섯 명도 좋고 열 명 정도만 와 주어도 좋겠다는 생각이었다.

처음 ‘시를 읽는 저녁’이 열렸다. 미리 연락이 닿은 사람들이 낭송을 자청했다. 시인도 있었고 낭송 모임의 아마추어 회원, 시를 사랑 하는 사람, 호기심에서 참석한 마을 주민 등 많은 이들이 함께 자리를 했다. 매달 마지막 화요일 저녁 7시면 ‘물고기 공방’에서는 ‘시를 읽는 저녁’이 열렸다. 회를 거듭할수록 모임은 성황을 이루었다, 열 명만 돼도 좋겠다던 그의 희망은 30명 40명으로 불어 났다. 늦게 온 사람은 자리가 없어 방을 빙 둘러 섰다. 좁은 현관에 벗어 놓은 신발들이 계단참을 가득 채웠다. 자주 만나게 되니 마을 주민들은 모두 친해졌고 동료 시인들은 새로 펴낸 시집을 들고와 읽어 줬으며 달맞이 고개에 추리 문학관을 하고 계신 한국 추리 문학계의 대부 ‘김성종’ 선생님 ‘최민식’ 선생님등 많은 원로들도 함께 무릎을 맞대고 앉아 시를 읽고 얘기를 나누었다. 박윤규가 강의를 나가는 시쓰기 교실의 70대 할머니는 자신이 처음 지은 시를 낭송하는 자리라 부끄럽다며 볼을 붉혔다.

회를 거듭하며 ‘시를 읽는 저녁’이 성황을 이루고 참석자가 많아질수록 그의 일도 많아졌다. 그날 시낭송자의 시의 제목을 미리 받아 시를 찾고 워드 작업을 하고 프린터로 뽑아 묶어 소책자로 만들어서 참석자들에게 나눠 주었다. 또한, 초대손님으로 가야금 연주자, 통기타를 연주하는 시인, 앰프까지 설치해 노래부르는 시인 등 수많은 이들이 다녀갔다. 끼와 신명이 가득한 문화의 장이었다. 그런데 불가사의한건 행사에 입장료 같은건 없는 무료라는 점이었다. 참석자들은 떡이며 과일들을 들고 왔고 탁자에는 늘 먹을거리가 풍성했다.

 

- 그래도 참석하는 시인이나 선생님들께 강의료도 드려야 하고 경비도 나갈텐데...

강의료는 내가 작품 하나씩해서 선물하는 것으로 땜빵했지요 허허...지금 있는 공감 갤러리도 방학이나 주말이면 정말 많은 사람들이 찾습니다. 하지만 무인으로 운영하고 있어요. 나도 강의도 있고 일도 있으니 여기 늘 있을수는 없지요.

도자기에 그린 손글씨. 강지윤 기자
도자기에 그린 손글씨. 강지윤 기자

-여기 전시된 작품도 많은데 그게 가능한가요?

작품에 정가표가 붙어 있으니 마음에 드는 작품이 있으면 돈넣는 통에 돈을 넣어 두고 작품을 가져 가지요.

-그럼 여태 한 번도 작품을 그냥 가져간다든지 훼손 되는 일은 없었나요?

어리석은 질문에 현답이 돌아온다.

▶내가 세상을 믿으면 세상도 그렇게 답합니다.

시를 읽는 저녁은 공방이 산성마을 작업실로 옮겨가며 더 이상 계속할 수 없었다. 힘이 들때도 있었지만 보람이 더 컸다. 대신 다른 시인에게 ‘시 읽는 저녁’을 부탁했지만 몇 회 안돼서 끝이 나고 말았다.

 

* 작품활동과 전시회 열다.

산성마을 작업실에서 작업할때 노무현 재단에서 연락이 왔다. 우리들에게 ‘감옥으로부터의 사색’이라는 책으로 잘 알려진 신영복 선생님, 판화가 이철수씨등 10여 명이 함께하는 전시회에 작품을 내어 달라는 것이었다. 봉화마을에서 작품전이 열렸다. 다음해는 박윤규의 작품만으로 한 번 더 전시회를 열었다.

-캘리그라피와 서예의 다른점은 어떻게 설명하면 좋을까요?

▶서예가 정해진 서체를 따라 틀속에서 자신의 개성을 드러내는 것이라면 캘리그라피는 좀 더 자유롭게 자기표현을 한다고 할까요. 사회가 다양해지면서 글씨에도 개성을 담고 싶어하지요. 본인의 글씨도 쓰다 보면 조금씩 바뀌게 되고 어느 누구의 글씨도 똑같이 쓸 수는 없지요. 그게 묘미이자 매력이기도 합니다.

-전시회 말고 외부와 협업하신적이 있으신지요?

▶부산 mbc 창사 50주년 기념 특별 기획 이중국가’에서 타이틀부터 모든 작업을 제가 했고요. ‘처음약속’이란 소주, 요즘은 ‘초중고 다 행복학교’ 작업을 하고 있습니다.

-가족 얘기, 작품하면서 기억에 남는 일화가 있으시면 들려 주시지요?

▶집사람(그의 아내 이선형은 ‘현대문학’으로 등단하여 3권의 시집을 낸 시인이다)은 요즘 손주 돌보느라 서울 오르락내리락하고, 며칠 전 내려왔다 딸하고 실컷 얘기하고 오늘 올라갔습니다. 손주가 둘 있는데 그 녀석들이 너무 귀여워요. 자주 못 보는게 아쉽지요"라고 했다. 손주 얘기에 얼굴이 환해지는 그의 표정에는 사랑이 가득 담긴다. 한 번은 행사장에서 글을 써 주는 프로그램이 있었어요. 젊은 아가씨가 다가 오길래 생각한 글귀가 있으면 불러 보랬지요. 없대요. 가만히 보니 심약해 보여요. ‘두려워 마라 별것 아니다’ 이렇게 써 주었지요 글귀를 한참 보고 있더니 눈물을 뚝뚝 흘려요. 고맙다고 말하고 갔습니다. 그럴때 내가 정말 고맙지요.

캔바스에 손글씨.  강지윤
캔바스에 손글씨. 강지윤 기자

- 앞으로 전시회 계획이 있으신지요?

▶5월21일~30일까지 ‘한글손글디자인협회’회원 10명과 함께하는 전시회가 경남 양산 통도사 일원에서 열리기로 되어 있습니다. 현장에서 글씨 써주기도 하고 할 거니까 가족과 함께 나들이 하기에도 좋을 겁니다.

이번 전시는 코로나 100일의 길고 긴 칩거와 두려움 불안 우울을 날려 버릴 좋은 기회가 될 것 같다. 이제 우리도 지친 마음을 위로 받고 싶고 지나간 시간에서 소중한 것이 무언지를 아는 성찰의 시간도 가졌다. 신록 가득한 고찰에서 마음을 활짝 열고 위안과 행복의 언어들을 다시 만나 보자. 가족 친구와 함께하기 좋은 기회가 될 것이다. 물론 사회적 거리는 유지하면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