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이 데려다준 자유의 맛, 망설임 끝에 들어선 길에 매혹되다
연극이 데려다준 자유의 맛, 망설임 끝에 들어선 길에 매혹되다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1.08.04 1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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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생 후반기에 만났던 연극은 각별한 의미
남 앞에 서기를 주저하고 목소리가 작은 내게 무대에 서는 일은 두려우면서도 즐기는 극복의 과정
생생하게 누군가로 살아보는 경험이 가져다준 선명함

 

세상 어디인들 연극의 무대 아닌 곳이 있으랴. 강지윤 기자.
세상 어디인들 연극의 무대 아닌 곳이 있으랴. 강지윤 기자.

 

오래 살던 동네에서 이사를 했다. 산이 가까우면서 교통이 편해서다. 짐을 정리하고 안정이 되고 나니 시간이 무료하다. 금방 이웃을 사귀는 일도 쉽지 않고 등산도 하루이틀 일이다. 집 가까운 문화센터나 곳곳의 강의들을 검색하다 보니 눈에 확 들어오는 제목 하나.

‘나도 배우다’. 얼른 금정문화회관으로 달려갔다. 분기별로 진행되는 수업은 벌써 3~4년째며 무대에 올린 작품도 서너편이나 되는 ‘시민연극모임’이었다. 문턱에서 두려움이 뒷통수를 잡는다. 망설이는 나를 보고 담당자가 친절히 말해준다. 지금 수업을 하고 있으니 한 번 들어보고 결정해도 된다고. 두근대는 가슴으로 살짝 문을 열고 들어서니 10여 명의 사람들이 둥글게 모여 앉아 각자 앞에 놓여진 보면대 위에 대본을 두고 독회(讀會)를 하고 있었다. 각자가 맡은 배역을 실감나게 읽는 중이었다.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마음은 이미 정해졌다. 나도 배우수업을 해야겠다고.

살면서 답답하고 갑갑한 적이 한 두번이던가. 주어진 역할을 묵묵히 하면서도 다른 인생을 살아보고 싶다는 마음이 간절했던 적이. 그래서 그랬는지 모른다. 영화로 책으로 다른 시공간을 넘나들었는지도. 이제 짧은 순간이겠지만 다른 인생을 경험할 기회가 생겼다. 벌써부터 가슴이 설렌다.

단원들은 30대 초반부터 정년 퇴임한 선생님까지 직업도 성별도 나이도 다양했다. 두 달 후 무대에 올릴 작품이라 배역이 정해졌다. 그 날부터 나도 자리 하나를 차지했다. ‘세상에서 가장 아름다운 이별’의 대사가 없는 간호사역이었다. 대사는 없지만 막상 무대에 오르니 몸이 뻣뻣하게 긴장되고 머릿속이 하애졌다. 무대 소품도 준비하고 다른 사람의 대사와 연기를 현장에서 자세히 지켜보는 것만으로도 큰 공부가 되었다.

자기 자신이라는 캐릭터를 벗어 두고 극 중의 인물이 처한 환경과 심정으로 옮겨 가는 일은 결코 쉽지 않아 보였다. 게다가 상대 배우와 대사를 주고 받으며 긴장을 끌어올리고 극을 이끌고 마침내는 관객의 마음을 붙들어 감동과 자극, 공감을 끌어내는 일은 열정과 헌신 없이는 불가능해 보였다. 역할의 비중이 크고 작음, 어느 누구도 중요하지 않은 배역은 없어 보였다. 주인공을 맡은 정은 씨는 대학 동아리 활동의 기억 때문에 극단을 찾아 들었고, 현동 씨는 다른이의 권유로 찾아든 극단에서 재능이 폭발했다. 저분은 연극을 하지 않았으면 저런 끼를 어떡하고 살았을까 싶었다. 제 나름의 이유로 극단을 찾았다가 자신의 재능을 발견하기도 하고, 누군가는 공부하는 대본 속 짧은 대사에서 인생의 참맛을 느꼈다고도 했다. 난생 처음 무대에서 자신을 드러내 보이는 일에 대한 두려움과 해냈다는 성취감, 이번에는 뜻대로 되지 않았지만 더 잘 해보고 싶다는 각오, 더러는 자신의 재능 없음을 탓하며 떠나기도 했다.

한 작품이 끝나고 나면 각자 생업을 가진 분들이라 드나듦이 있었고 지도하시는 선생님은 완급을 조절하며 몸 풀기, 발성, 호흡, 대사 연습에서부터 더러는 긴장이 극대화된 일인극(모노드라마)수업, 고전극 독회, 연극 관람 등 다양한 방법으로 끊임없이 자극을 주었다.

김순영 작가의 ‘삼류배우’가 무대에 오를 때는 꽤 비중이 있는 역할을 맡게 됐다. 대사를 외우는 일도 만만치 않았다. 집에는 식구들이 있고 이웃이 있으니 대본을 들고 산으로 올라갔다. 마이크를 쓰지 않는 연극의 특성상 무대 뒤까지 대사가 들리기 위해서는 뱃속에서 소리를 끌어내어야 한다. 인적이 드문 곳에서 연습하다가 민망했던 적도 한두번이 아니다. 무대 위에서 스텝이 꼬이기도하고 상대에게 대사를 던져 주어야 진행되는 대화 중간에서 대사를 까먹기도 한다. 막이 끝날 때 암전 속에서 배우가 들고 나와야 할 소품을 잊고 나와, 다음 장면에서도 생뚱맞게 소품이 무대에 남아 있기도 하였다.

인생의 후반기에 만났던 연극은 나에게 각별한 의미를 지녔다. 남 앞에 서기를 주저하고 목소리가 작은 내게 무대에 서는 일은 두려우면서도 즐기는 극복의 과정이 되었다. 혼자라면 독파하기 어려웠을 희곡들을 만나 수많은 인물들이 처한 상황, 그들의 기쁨과 고통의 실체에 맞닥뜨렸다. 연극이나 영화를 보면서 공감력과 감정이입의 밀도가 깊어졌음을 느낀다. 관객이나 독자의 입장에서 영화나 연극 책을 읽는 것과는 차원이 다른 일이었다. 생생하게 누군가로 살아보는 경험이 가져다준 선명함이었다. 이런 저런 이유로 멤버들은 흩어지고 배우수업은 끝이나도 연극을 하면서 만난 오래된 친구들은 이따금 함께 연극을 보거나 밥상을 앞에 두고 끈끈한 우정을 다진다. 누가 알겠는가 언젠가 의기투합하여 무대에 서는 일이 다시 있을는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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