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코로나19 1년] 세계적 유행병이 바꾼 인류의 역사
[코로나19 1년] 세계적 유행병이 바꾼 인류의 역사
  • 강지윤 기자
  • 승인 2020.11.27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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흑사병을 겪으며 14세기 후반 교회와 성직자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식과 태도의 변화였다. 흑사병은 인간으로 하여금 중세의 기독교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에 눈뜨게 하였다. 이로써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되었고 각 지역에서는 여러가지 제도가 정립되었다.

세계적 유행병이 바꾼 인류의 역사

코로나19에 대해 WHO(세계보건가구)에서는 팬데믹(감염병의 세계적 대유행)을 선언했다. WHO설립 이래 세 번째다. 펜데믹은 인류가 정착하여 촌락을 이루고 농경생활을 하며, 가까이 두고 기르던 소, 양, 낙타, 말 등 동물에게 기생한 세균이 가축과 인간을 오가며 널리 퍼지게 되었다. 자급자족만으로 부족한 물건은 교역을 통해 얻게 되고, 이 과정에서 많은 사람들이 밀집했다. 동물과의 접촉, 인구밀도의 증가, 교역확대 등이 맞물리며 임계점을 넘어서며 팬데믹(pandemic)이 되었다. 세계를 공포로 몰아넣고 인류의 생활방식을 바꾼 역사 속 감염병을 살펴보자.

낙타는 사막의 교통수단이자 재산이었다. 피라미드 인근 에서 관과객을 기다리는 낙타와 주인.  강지윤 기자
낙타는 사막의 교통수단이자 재산이었다. 피라미드 인근에서 관광객을 기다리는 낙타와 주인. 강지윤 기자

◆흑사병

인류 역사상 가장 공포에 두렵던 전염병으로 14세기 유라시아 대륙을 휩쓴 흑사병을 들 수 있다. 중국에서 발생했으리라 추정되는 흑사병은 1347~1351년 사이 2천만 명 이상 사망했을 것으로 추정한다. 1346년 흑해연안 도시 카파(Caffa)는 이탈리아 제노바 동방무역의 거점이었다. 서쪽으로 영토를 확장하던 몽골군이, 항복하지 않는 마을 성채에 흑사병으로 죽은 병사의 시체를 투석기로 던져 넣어 흑사병이 번져 나갔다고 전해진다. 공포에 쌓인 제노바가 선박 입항을 거부하자 이 선박들은 마르세이유로 갔다. 입항을 허락한 마르세이유 일부 지역은 주민이 몰살되었고, 유럽인구의 1/3이 희생되는 가운데, 흑사병은 유럽 전역으로 번져 나갔다. 이러한 위기에도 성직자들이 해줄 수 있는 영적인 지도가 없자, 죽음의 공포로 인해 많은 사람들은 지나치게 미신에 의존하고 불건전한 상태에 빠져 들었다.

흑사병을 겪으며 14세기 후반 교회와 성직자의 권위는 실추되었다. 더욱 중요한 것은 인간의 의식과 태도의 변화였다. 흑사병은 인간으로 하여금 중세의 기독교 세계관에서 벗어나 인간의 본질에 눈뜨게 하였다. 이로써 르네상스의 밑거름이 마련되었고 각 지역에서는 여러 가지 제도가 정립 되었다. 수많은 노동인구의 죽음으로 노동력이 부족해지자 임금이 상승하게 되었고 농노들은 소작농, 소지주, 장인으로 독립했다. 흑사병은 엄격했던 사회계층 구조를 흔들어 유럽의 중세봉건 사회를 무너뜨리고 근대 자본주의가 일어나는 요인 중 하나가 되었다. 이탈리아 전역에서는 환자들을 마을 밖에 격리 수용하였고, 사람과 물건을 일정기간 격리하는 오늘날의 검역 개념을 도입하였다.

◆콜레라

물은 생명의 젖줄이자 생활의 터전이다. 인레호수 위의 수상가옥.  강지윤 기자
물은 생명의 젖줄이자 생활의 터전이다. 인레호수 위의 수상가옥. 강지윤 기자

콜레라는 1817년 인도의 캘커타에서 처음 발생했다. 캘커타는 수많은 사람들이 밀집하여 살아가는 도시로, 중요 도로와 철도 항로의 기착 점이었다. 한 마디로 전염병이 발발해 번져 나가기 좋은 환경이었다. 콜레라균은 인체에 들어오면 잠복기를 거쳐 독소를 증식한다. 극심한 설사, 구토, 발열, 탈수 끝에 목숨을 잃는다. 이때 환자 몸 밖으로 나온 세균이 수원(水源)으로 흘러 들어가 그 물을 마신 사람에게 전염된다. 1차 대유행 때 동북아로 번진 콜레라로 한양에서만 사망자가 13만 명이라는 기록이 있다. 1830년 이후 2차 대유행 때는 유럽 대륙을 거쳐 영국, 이민선을 통해 미국, 캐나다, 멕시코, 이슬람권까지 번져갔다.

이처럼 번진 원인은 당시의 도시 환경이 극도로 열악했기 때문이다. 유럽에서 가장 큰 도시였던 런던은 인구가 백만이 넘었으며 말과 개, 고양이 등 동물들의 수도 많았다. 사람과 동물의 배설물이 거리에 흘러 넘쳤고 수세식 화장실의 오물은 템즈강으로 흘러 들어갔다. 시민들이 그 물을 먹고 있었으니 수인성 전염병은 폭발적으로 퍼져 나갔다. 1866년에는 6주 만에 5천 명의 사망자가 나왔다. 19세기 후반, 런던시 당국은 세계에서 가장 진보된 위생시설과 상하수도를 체계적으로 건설해 나갔다. 다음번 콜레라가 다시 유행했을 때 피해를 본 유일한 지역은 상하수도 망이 완전히 갖춰지지 않은 지역뿐이었다. 런던의 사례를 본 미국, 일본 등도 근대적 위생시설을 마련해 갔다. 1883년 코흐가 콜레라균을 발견하고 나서 상수도원의 염소 소독이 이루어졌고, 1893년 백신이 개발되어 예방접종이 가능해졌다. 콜레라균도 숙주를 너무 많이 죽이면 자신도 살아남기 어렵기 때문에 적당한 정도로 병을 일으키는 정도로 진화해 갔다. 인류와 콜레라균과의 공존에 거의 200년이 걸린 셈이다.

◆스페인 독감

스페인 독감은 3.1운동 직전, 1918~1919년 여름에 발생해 1년 반 동안 세계 인구의 1/3이 감염된 인플루엔자 바이러스로, 가장 짧은 기간에 가장 많은 사망자를 발생케 한 전염병이다. 1918년 당시 조선 인구가 1천700여만 명 이었는데 감염자는 750만, 사망자는 14만 명에 이른다. 일제 강점기 시절 위생수준이 좋지 않았던 조선에서, 일제의 방역법은 위생시설을 만들기보다 감염차단과 감시에만 몰두했다. 여기에 분노한 조선인이 3.1운동을 일으키는 원인 중 하나가 되기도 했다.

스페인 독감은 1차 세계 대전중 군인들에게서 퍼져 나가기 시작했다. 초기에는 감기 증상을 보이다가 폐속에 피거품이 차며 폐렴이 되어 환자의 몸에서 산소가 빠져 나간다. 젊은 인구의 사망률이 높으며 20~45세가 전체 사망자의 60%를 차지하였다. ‘에곤 쉴레’나 ‘구스타프 클림트’ 등의 예술가들도 이 스페인 독감으로 사망했다. 2차 유행으로 스페인 독감이 번져 나갈 때 불과 몇 달 만에 몇 천만 명이 희생되리라는 것은 예측하지 목했다. 1차대전 전사자(1천500만 명)보다 스페인독감 사망자(1천700만~5천만 명)수가 더 많은 셈이다. 1차 세계대전은 서둘러 매듭지어졌고, 평화조약이 맺어졌다. 이 일을 계기로 독감예방 접종이 자리 잡았다.

안식일, 간절한 표정에  정성이 담긴 신자의 모습. 조지아 정교 교회강지윤 기자.
안식일, 간절한 표정에 정성이 담긴 신자의 모습. 조지아 정교 교회. 강지윤 기자

역설적이게도 감염병 대유행은 방역과 의학발전을 이끌었으며, 오염된 물로 인한 인류의 희생은, 세계 주요 도시에 위생시설과 상하수도 시스템이 정비되는 계기를 만들었다. 의학의 발달로 인류를 괴롭히던 질병은 어느 정도 예방과 치료가 가능해졌으며, 수많은 사람의 희생 뒤에 살아남은 사람들은 그 토대 위에 새로운 문명을 열어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