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⑫내가 살던 고향은 벼꽃 피는 들판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⑫내가 살던 고향은 벼꽃 피는 들판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09.12 16:54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읍내로 가는 남쪽 앞공굴 큰길, 소 먹이러 가는 빨래터 동쪽 길, 북부학교로 가는 북쪽 길 그리고 고래전으로 가는 서쪽 길,
마을 복판는 놀이터인 미뿌랑이 있었다.

소평마을은 집주인 마음을 닮은 소박한 가옥 쉰 채가 박태기나무에 꽃 달리듯 골목길 따라 사이좋게 붙어 있었다. 골목은 실핏줄처럼 얽혀있어 아이들이 '붙잡을 놀이하기 좋았고 가끔 오는 엿과일식혜(젓갈) 장수는 물건 팔기 좋았다.

하지만 마을을 벗어나면 사방이 논이라서 육지 속 외딴 섬이었다. 모내기를 앞두고 논마다 물이 가득하고, 형산강 범람으로 홍수를 이루고, 보리가 패고 벼가 푸른빛을 띨 때면 정말 섬 같은 느낌이 들었다. 안강읍 소재지에서 2km 정도 떨어져 있고 가깝다는 양동마을, 황새마을도 그 정도 멀었다.

한국전력공사(KEPCO)경주지사에 확인해보니 소평마을에 전기가 들어온 시기는 19711월이다. 동짓달 긴긴밤에 일찍 잠자리에 들어서인지 집집마다 자녀가 많아 마을인구는 어림잡아 300여 명은 되었지 싶다. 북부학교, 황새마을, 육통, 남산, 양동마을은 소평마을보다 늦게 송전됐다.

1989년의 소평마을, 1992년 창마을(창말)로 집단이주 했다. 정재용 기자 그림
1989년의 소평마을, 1992년 창마을(창말)로 집단이주 했다. 정재용 기자 그림

안강 5일장은 49일이었다. 아이들이 장에 간 부모를 기다리는 곳은 곤실댁(마을 평면도에서 1) 앞마당이었다. 거기는 원래 중동댁이 살았는데 뒤(29)로 가면서 타작마당으로 쓰고 있었다. 앞마당에서 마을입구까지, 앞도랑의 마을 쪽은 미나리꽝이었는데 새마을운동 때 도로확장사업하면서 길 넓히는데 들어갔다. 마을입구에서 앞공굴로 이어지는 길을 큰길이라고 불렀다. 큰길 따라 똑바로 나가면 바깥공굴이 나오고 거기서 논 세 블록 정도 더 가면 철둑이 나왔다.

앞공굴에서 오른쪽으로 혹은 바깥공굴에서 오른쪽으로 해서 읍내로 다녔기 때문에 아이들은 부모가 어느 방향으로 올지 몰라 이리저리 살폈다. 부모도 아이들이 애타게 기다린다는 사실을 잘 알았기 때문에 눈깔사탕 하나라도 반드시 사와야 했다.

, 추석 명절이면 객지에 나가 있던 자녀들을 앞마당에서 맞았다. 아이들은 좀이 쑤셔서 도저히 집안에 있을 수 없었기에 수시로 앞마당에 들렀고, 창말(창마을) 쪽에서 사람이 나타나면 이번에는 과연 누구일까 모두 고개를 들고 시선을 집중했다. 키나 걸음걸이를 보고 저마다 짐작해서 맞추기 경쟁을 했다. 그리고는 음식을 장만하고 있는 어른한테 달려가서○○가 왔다고 생중계 했다. 가끔 택시가 먼지바람을 일으키며 들어오기도 했다. 양손 가득 선물을 들고 내리는 멋쟁이를 한눈에 못 알아볼 때도 있었다. 세월이 지나면서 자가용을 몰고 오는 사람도 생겨났다. 또 다른 시기는 농번기였다. 모내기철에 맞춰서 자녀들은 하나 같이 현충일과 주말 즈음하여 일손을 도우려고 고향으로 왔다. 모두가 부모의 고생을 안타까워하는 효자효녀였다.

곤실댁 마당 남쪽에는 커다란 뽕나무 한 그루가 있었다. 마을사람들은 개를 잡아 장만할 때 거기 매달아 놓고 껍질을 벗겼다. 그리고 골목길 쪽에는 멋진 무화과나무가 담 너머로 가지를 뻗고 있어서 길 가던 사람들이 열매를 따먹기도 했다.

1989년 추석 때 모습, 큰길로 차가 들어오고 있다. 정재용 기자
1989년 추석 때 모습, 큰길로 차가 들어오고 있다. 정재용 기자

마을의 유일한 공공기관은 소평교회(21)이었다. 목회자가 귀하던 시절이라 시골교회에는 대부분 전도사가 시무했는데 소평교회도 마찬가지였다. 교회 종은 매일 새벽기도회 5, 주일예배 낮 예배 오전 11, 밤 예배 오후 7, 수요기도회 오후 7시에 맞춰서 쳤다. 마을사람들은 은은하게 울리던 교회 종소리를 잊지 못할 것이다. 종소리가 마을의 공동시계 역할도 했다. 소평교회 설립자는 황일룡 장로이다. 그는 마을 가운데(26) 살다가 뒤쪽(50)으로 이사해서 살았다.

마을 복판에는 미뿌랑이 있었다. 묘소가 있는 부근의 터를 미뿌랑이라고 불렀다. 미뿌랑이 있는 것으로 보아 옛날에는 어래산 줄기가 여기까지 뻗쳤음을 알 수 있었다. 미뿌랑에는 3기의 봉분이 있었는데 아이들의 놀이터가 되다보니 붉은 흙이 그대로 드러나서 뺀질뺀질했다. 봉분 꼭대기는 아이들이 '점수놀이'를 할 때 진지가 되고 보름달 구경할 때 사람들이 올라가는 마을에서 가장 높은 언덕이었다. 여름날 저녁을 먹고 바람 쏘이러 나가서 삼삼오오 모이는 데도 미뿌랑 아니면 앞마당이었다.

마을사람들 중에서 마을 주위에 미뿌랑이 한 곳 더 있다는 사실을 아는 사람은 드물다. 서편 고래전 가는 곳으로 가다가 보면 연못에서 논 한 블록 더 지나 왼편에 묘소 2기가 있었다. 거기는 묘비와 상석이 놓여 있고 매년 벌초도 하고 묘사도 지냈다.

마을의 중심가(main street)는 김형석 씨 집(13)에서 이종학 씨 집(20)에 이르는 길이었다. 옛날에는 그 길에 작은 도랑이 있었으나 새마을사업을 하면서 시멘트 덮개로 복개(覆蓋)했다. 이 길을 중심으로 남쪽깍단과 북쪽깍단으로 나눠서 정월대보름에 줄다리기를 한 적이 있다. 희한하게 반반이었다. 집집마다 볏짚과 음식 값을 추렴해서 며칠간 줄을 땋고 당일 저녁식사 후 행사를 벌였다. ()동댁(7) 황봉룡 씨는 흥이 많아서 남쪽깍단 응원대장을 맡았다. 끌려갈 때면 까르르르대장의 지시에 따라 전원 줄을 땅바닥에 깔고 그 위에 올라앉았다. 끝나면 사람들은 낫으로 줄의 일부를 잘라서 각자 지붕 위에 던져 올렸다. 복을 비는 풍습이었다. 어른들은 풍물놀이로 즐기고 아이들은 골목을 뛰어다니며 밤이 이슥하도록 놀았다.

우리 집(4)에서 우물까지는 400m 정도 됐다. 쇠죽은 서동댁(3) 앞 도랑물을 떠다 쒀도 되지만 마실 물은 매일 물지게로 두 번은 져다 날라야했다. 겨울이면 영하의 기온에 세차게 몰아치는 북서풍을 뚫고 걷느라 얼굴이 얼얼하고 출렁거리는 물통 가로막대의 고리를 잡은 손이 곱았다. 조영남의 물지게도 제대로 못 지던 내가 조국의 부름에 따랐습니다”‘이일병과 이쁜이제목의 노래는 1971년에 나왔다. 1960년대 후반부터 마을에 펌프가 들어오면서 우물터는 인기는 시들해졌다. 펌프를 박기 위해서는 먼저 인부를 사서 몸을 겨우 돌릴 정도의 지름으로 적당량의 물이 나올 때까지 팠는데 보통 사나흘에 걸쳐 10m 정도 깊이면 됐다. 주인은 물통을 끈으로 묶어서 곡괭이로 파낸 흙을 끌어 올렸다. 묻을 때는 파이프를 세우고 난 뒤, 물이 고일만큼 자갈로 채우고, 그 위에 숯을 깔고, 마지막에 파내었던 흙으로 도로 덮었다. 거의 집집마다 펌프가 있어서 새벽에 펌프질하는 소리로 옆집이 언제 뭘 하는지를 짐작할 수 있었다.

장산댁(10번) 앞 사거리의 북쪽 길, 중심가로서 학교 가는 길이다. 정재용 기자
장산댁(10번) 앞 사거리의 북쪽 길, 중심가로서 학교 가는 길이다. 정재용 기자

마을사람 전체가 농사로 살아갔는데 1963년 무렵 한때 경남댁(13)은 놋그릇 제조공장을 운영했다. 학교 가는 길목에 있어서 마당은 등하교 때면 구경하는 학생들로 복잡했다. 검은흙으로 거푸집 짜기, 풀무질, 용광로에 끓어오르는 쇳물을 부어 그릇 찍어내기, 원통을 돌리며 끌을 사용하여 주물 겉면 깎기, 광택이 나도록 연마하기까지 일련의 과정이 신기하기 그지없었다. 보드라운 검은 흙에서 나오는 매캐한 냄새와 그릇 깎을 때 내는 날카로운 금속음이 수십 년이 지난 지금도 뇌리에 생생하다. 강갑술 씨(2)는 정미소를, 황도원 씨(15)는 구판장을 이사 가기 전까지 운영했다.

우촌댁(48), 금호댁(49), 금산댁(50)은 용강댁(25) 논을 사이에 두고 떨어져 있었다. 그 논은 겨울이면 청년들의 축구장으로 변하고, 어느 해는 물을 채워 스케이트장을 만들기도 했다. 금호댁 김용복 씨는 농사짓는 틈틈이 관광버스를 몰았다.

소 먹이러 가는 길은 마을의 동쪽 길이었다. 마을이 끝나는 비탈길 오른쪽에 커다란 향나무 한 그루가 서 있었다. 이 길은 빨래하러 가는 사람, 양동들과 섬배기 논에 일하러 가는 사람, 기계천변에 소 먹이러 가는 사람들로 늘 붐볐다. 천변(川邊)을 사람들은 갱빈이라고 불렀다. 저녁 무렵 소 수십 마리가 한 줄로 서서 마을로 들어오는 풍경은 장관이었다. 사이사이에 송아지가 어미를 놓칠세라 바짝 붙어 걸었다. 소 몰고 오는 사람들도 맨몸이 아니었다. 아이의 어깨에는 꼴망태가 걸려 있었고 어른은 바지게 한 가득 꼴을 담고 넘실넘실 걸었다.

 


관련기사

댓글삭제
삭제한 댓글은 다시 복구할 수 없습니다.
그래도 삭제하시겠습니까?
댓글 0
댓글쓰기
계정을 선택하시면 로그인·계정인증을 통해
댓글을 남기실 수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