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⑩아아 빛나여라 북부국민학교(2)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⑩아아 빛나여라 북부국민학교(2)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08.20 12:52
  • 댓글 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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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수관 박사는 7회 졸업생
2013년 2월 제63회 졸업식을 끝으로 폐교, 그 동안 배출한 졸업생 수는 4,137명
내년부터 안전체험장으로 탈바꿈

경주시청 건설과 농지개발팀 자료에 의하면 소평마을 주위 논의 경지정리는 1966년에 했다. 경주지역은 1964년에 오야, 건천, 나정 지역이 맨 처음이다.

소평마을 앞 안강들은 일제강점기에 이미 해 놓았기에 그냥 두고 양동들, 모래골, 야마리, 육통들만 하면 되었다. 마을 입구에서 북쪽을 향해 섰을 때 5시에서 9시 방향만 빼고 다 한 셈인데,  5시 방향은 큰거랑이 형산강으로 흘러가는 물줄기고 9시 방향은 고래전과 앞거랑이다.

600평(3마지기)을 한 블록(배미)으로 만들어졌다. 구불구불하던 논둑은 곧아지고 모든 논 옆으로 수로와 농로가 났다. 농로는 소달구지, 경운기, 리어카가 다닐 수 있도록 넓혀져서 지게 쓸 일이 거의 없게 되었다. 큰 거랑에는 갱빈 가는 곳과 앞거랑과 합류하는 곳에 콘크리트 다리가 새로 놓였다. 그러나 학교 가는 길은 오히려 멀어졌다. 농사 위주로 길을 내다보니 곧장 가던 길은 지워지고 농로 따라 사다리타기놀이 하듯 이리 꺾어 다녀야 했다.

마을 뒤로 어래산 정상이 보였다. 산 아래 가운데에 보이는 긴 지붕이 북부학교 건물이다. 1990년 2월 2일 정재용 기자 촬영
마을 뒤로 어래산 정상이 보였다. 산 아래 가운데에 보이는 긴 지붕이 북부학교 건물이다. 1990년 2월 2일 촬영. 정재용 기자

바닥은 다져지지 않아서 소달구지 지나간 바퀴자국이 움푹 파여 있기 일쑤였고 거기에 물이 고여 있어 다니기에 여간 불편한 게 아니었다. 학생들은 가능한 한 안강 기계를 잇는 신작로를 걸었다. 길에는 알밤크기의 밤자갈이 깔려 있어 소달구지가 지나갈 때면 바자작바자작 소리를 냈다. 밤자갈은 공기놀이하기에 안성맞춤이었다. 공기놀이를 짜개받기라고 했는데 주로 여자아이들이 했다. 짜개받기는 자갈 5개로 점수 빨리 내는 방법과 100여 개의 자갈을 모아 놓고 놀이를 통해 많이 따 먹기 2종류가 있었다.

도로 양옆으로는 코스모스가 자라고 있었다. 우리는 좌측 일렬로 코스모스를 따라 걸었다. 버스가 지나가면 승객들을 향해 손을 흔들었다. 버스는 그런 우리를 아랑곳하지 않고 자갈을 튀기고 먼지를 덮어 씌웠다. 바람이 남동쪽에서 불 때면 오른쪽에 서면 되련만 좌측통행을 준수하다 보니 고스란히 흙먼지 속에 파묻혔다.

가을이면 벼이삭을 잘라서 까먹고 하굣길에 메뚜기를 잡았다. 겨울에는 지름길 삼아 휑하게 빈 논을 가로질러 논둑을 허들 넘듯 타넘고 다녔다. 보리밟기운동을 벌이던 때라서 일석이조였다.

연세 많은 분을 빼고는 모두 북부학교 동문이었기 때문에 마을 사람들은 나이를 따질 때면 (12간지)’를 묻거나 북부학교 몇 회 졸업생인지?”를 물었다. 보통은 집의 나이로 여덟 살에 입학했으나 한 살 정도 당기거나 늦춰 들어가기도 했다.

서관 터에서 본관, 서관은 헐고 본관을 2층으로 올렸다. 2012년 학교홈페이지에서 캡처, 정재용 기자
서관 터에서 본관, 서관은 헐고 본관을 2층으로 올렸다. 2012년 학교홈페이지에서 캡처. 정재용 기자

생각나는 대로 회수별 이름을 적어보면 다음과 같다. [4회] 황군자 [5회] 권태윤, 김용술 [6회] 박정득, 황군조, 황인숙 [7회] 황수관, 장경순 [8회] 최호관, 권태자 [9회] 권태식, 황수범 [10회] 김형곤, 김영우, 이영복, 이현동, 김선련, 김숙자, 김월분, 윤복순, 황원조 [11회] 구광본, 이용백, 황병용, 김영자 [12회] 김재윤, 김창훈, 김옥란 [13회] 김용복, 김용준, 김용필, 이수복, 이현노, 황광조, 황수경, 구성희 [14회] 김옥분 [15회] 김용달, 김재원, 이동진, 이진토, 정재용, 권순태, 김정순, 이순희 [16회] 구경본, 김창문, 황도정, 황수겸, 황수덕, 김용옥 [17회] 김창구, 김형복, 이성복, 강경자, 강명애, 구경이, 이금화, 정미경 [20회] 권순점, 김영숙, 주경화 [21회] 강명중, 이덕희, 김순옥, 김월선, 윤복남, 이재선, 정재숙, 황금희 [23회] 윤창수, 정준택, 주원제, 황우섭, 구본숙, 김영순, 김외출, 이재숙, 정재화, 황수란, 황정희 [25회] 이재율, 정석주, 주율근, 황대구, 황주섭, 황수향 [28회] 김성달, 김성수, 정석암, 황수식, 김명순, 주순화 (남여, 가나다 순)

50여 호 되는 마을에 많을 때는 신입생이 11명이나 됐다. 이들은 장성하여 부모의 농사를 이어받거나 교육자, 공무원, 경찰, 군인, 종교지도자, 회사원, 사업가 등 다양한 직업으로 진출했다. 나라가 ‘일하는 해’(1966년), ‘중단 없는 전진’(1971년) 등의 표어를 걸고 ‘우리도 한번 잘 살아보자’고 외칠 때 함께 땀을 흘렸다

새마을사업은 박정희 대통령이 1971년 9월 17일, 기계면 문성동에서 개최된 전국 시장 군수 회의의 “문성동과 같은 새마을을 만들라”는 지시로 전국적으로 확산됐다(기계면 소재 ‘새마을운동 발상지 기념관’ 자료). 문성동에서 10km 정도 떨어져 있는 소평마을에도 ‘새마을 정신’ 즉 자조, 자립, 협동하는 정신의 열기가 뜨거웠다. 아이들은 학교에서 시키는 대로 새벽에 일어나서 마을 앞에 모여 ‘재건체조’를 한 후 함께 골목길 청소를 하였다.

재건 체조는 1961년 ‘국가최고재건회의’ 시절에 생겼다. 경쾌한 음악과 더불어 “재건 체조 시작”으로 시작되는 구령이 아직도 귀에 생생하다. 그때는 학교에서 선생님을 만났을 때도 “안녕하십니까?” 대신 “재건합시다”라는 인사말을 썼다. “동이 텄다 맑고 밝은 새아침이다”로 시작하는 ‘재건의 노래’, “둥둥둥 울려오는 재건의 큰북소리에”로 시작하는 ‘재건 행진곡’도 유행했다.

졸업생 수는 10회(1960.3.24.졸업) 90명, 15회(1965.2.20.졸업) 104명(남56, 여48), 25회(1975.2.졸업) 141명(남72, 여69)처럼 증가 일로를 걷다가 전국적으로 출산율이 떨어지면서 점차 그 수가 줄어들었다. 그러다가 결국은 2013년 2월 제63회 졸업식을 끝으로 문을 닫고 말았다. 그날 졸업생은 7명(남3, 여4)이었다.

1945년 4월 1일 개교하여 6.25동란, 보릿고개 다 견뎌 나왔건만 인구절벽은 넘지 못했다. 2013년 2월 28일, 69년 역사의 안강북부초등학교는 폐교했다. 그 동안 배출한 졸업생 수는 4,137명이었다. 남은 2학년 1명(남), 3학년 3명(여), 4학년 1명(남)의 재학생과 그 동안의 학적부는 읍내에 있는 안강초등학교로 이관됐다.

안강북부초등학교 전경, 2012년 학교홈페이지에서 캡처, 정재용 기자
안강북부초등학교 전경, 2012년 학교홈페이지에서 캡처. 정재용 기자

이 곳에 자리 잡고 억만 년 빛나오리/ 아아 위대하다 문화의 집 배움의 터/ 아아 빛나여라 북부국민학교

억만 년을 살겠다더니 일흔을 못 넘기고 간 셈이다. 교가를 짓고 50년, 학교를 세우고 69년 만의 일이었다.

안강초등학교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여기도 전교생이 불과 68명, 1학년은 6명이었다. 학교 관계자는 내년부터 예산 30억 원을 들여 북부초등학교를 안전체험장으로 조성하고 앞으로 경북 인근지역의 안전교육 장소로 활용될 것이라는 소식을 전해줬다. 그리고 건물이 그대로 보존되고 교육장소로 사용되는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며 함께 기뻐했다.

불현 듯 그루터기가 생각났다. 누가 알겠는가, 먼 훗날 학교가 다시 문을 열고 역사를 이어갈 날이 올지. 이스라엘은 기원전 586년 바벨론에 의해 멸망한다. 포로로 끌려가는 백성에게 이사야 선지자는 희망의 메시지를 전한다.

밤나무나 상수리나무가 잘릴 때에 그루터기는 남듯이, 거룩한 씨는 남아서, 그 땅에서 그루터기가 될 것이다

교가, 2012년 학교홈페이지에서 캡처, 정재용 기자
교가, 2012년 학교홈페이지에서 캡처. 정재용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