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④미꾸라지 후예는 아직 거기 있을까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④미꾸라지 후예는 아직 거기 있을까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04.30 17:51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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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공굴’은 마을의 관문
앞도랑에는 미꾸라지, 앞거랑에는 붕어와 말조개가 많았다

거랑의 사전적 의미는 의 경상, 충청도 방언이다. 소평마을 사람들은 작은 개울을 도랑이라했고 큰 개울을 거랑이라 했다. 동네 바로 앞에 흐르는 개울을 앞도랑논 두 블록 정도 지나 있는, 보다 큰 개천을 앞거랑이라 불렀다. 그 둘 사이에 샛도랑이 있었다.

도랑에는 붕어나 미꾸라지 등 잔고기가 많았다. 여름에 소나기가 그치고 나면 어른 아이 할 것 없이 반두나 소쿠리를 들고 도랑으로 나가 물고기를 잡았다. 소나기가 쏟아질 때면 가끔 마당까지 미꾸라지가 올라와 있었다. 집이 앞도랑 가까이 있었기에 하수구를 타고 올라온 것이다. 처음에는 하늘에서 떨어진 줄 알았다. 회리바람타고 하늘로 올라갔을 것이라 우겨댔다.

필자의 모친 황분조 씨가 손자를 안고 서동댁 앞 ‘앞도랑’ 곁에 서 있다. 서동댁 바로 뒤가 우리 집이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마을 북쪽의 어래산이다. 정재용 기자
필자의 모친 황분조 씨가 손자를 안고 서동댁 앞 ‘앞도랑’ 곁에 서 있다. 서동댁 바로 뒤가 우리 집이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마을 북쪽의 어래산이다. 정재용 기자

미꾸라지를 가장 많이 잡을 때는 가을이다. 벼가 다 영글어 이제 익을 날만 기다릴 때면 논에서 물을 빼 줘야했다. 그래야 벼도 잘 익고, 논바닥이 말라야 벼 베기가 가능하기 때문이다. 이때 벼 포기 사이에 있던 미꾸라지도 물을 따라 밑의 논으로 내려갔다. 우리는 삽으로 두어 군데 논둑을 잘라 물길을 내고는 거기에 통발을 댔다. 통발은 저녁에 대 놓고 이른 아침에 나가 거뒀다.

추어탕도 끓여 먹고 남은 미꾸라지는 장에 나가 팔았다. 안강 장날은 4, 9일이었다. 미꾸라지는 돈이 귀한 농촌에서 용돈을 마련할 수 있는 좋은 기회였다. 농촌에서는 겨울에 쌀 낼 때, 여름에 보리쌀 낼 때 외에는 큰돈 만질 기회가 없었다. 평소에는 집에서 기르던 개나 닭, 토끼를 팔거나 달걀 몇 개 들고 시장에 가는 정도였다.

통발 말고는 도랑의 물길을 돌리거나 윗물을 잠시 막아두고, 남아 있는 물을 퍼낸 뒤 흙을 뒤져서 잡았다. 미꾸라지는 진흙을 좋아해서 그 속에 들어가 있기 때문이다. 우리는 그 진흙을 국개라고 불렀다. 양손을 손등의 때 검사할 때처럼 펴서 모아 붙이고, 손목을 아래로 굽혀 곡괭이 모양을 만든 뒤, 흙속에 집어넣어 끌어당기면 됐다. 그렇게 차례차례 뒤져갔는데도, 어떤 때는 이미 지나간 진흙에서 올라오는 놈이 있었다. 조금만 더 참고 있었으면 살 수 있었을 텐데 재수 없는 놈이다.

보통 도랑에 쏘다니는 미꾸라지는 빛깔이 흑갈색인데 비해 진흙 속에서 영양분을 많이 섭취한 놈은 늙은 호박 빛깔을 띠었다. 굵기도 보통 미꾸라지보다 서너 배였다. 우리는 그 놈을 농띠라고 불렀다. ‘농땡이에서 온 말로, 아마 날마다 먹고 놀아서 살만 잔뜩 진 녀석을 빗대서 불렀지 싶다.

앞거랑딱실못과 어래산 쪽에서 흘러오는 물길이었다. 딱실못은 버스를 타고 영천에서 안강으로 가다가, 안강휴게소 아래 내리막길을 내려오자마자 오른쪽으로 보이는 저수지다. 어머니는 옛말에 딱실못이 하면 안강 죽음 몰죽음이라는 말이 있었다고 했다.

안강에서 기계 가는 버스를 타고 ‘소평입구’에서 내리면 마을 진입도로가 펼쳐졌다. 왼편으로 흐르는 ‘앞거랑’을 따라 1km정도 걸어가면 개천을 가로지르는 ‘앞공굴’이 나타났다. 정재용 기자
안강에서 기계 가는 버스를 타고 ‘소평입구’에서 내리면 마을 진입도로가 펼쳐졌다. 왼편으로 흐르는 ‘앞거랑’을 따라 1km정도 걸어가면 개천을 가로지르는 ‘앞공굴’이 나타났다. 정재용 기자

소평마을로 가려면 기계방면으로 가는 버스를 타고 가다가 소평입구에서 내려 걸어 들어가야 했다. 거랑의 둑이 도로였다. 거랑은 도로 왼편을 따라 흐르고 있었다. 거기에는 100m 정도 간격으로 시멘트로 관개를 위한 구조물이 만들어져 있어서, 언제든지 흙이나 판자로 막아 물을 끌어댈 수 있게 돼 있었다. 우리는 그 구조물 안에 있는 흙을 일구어 부추를 키웠다. 부추는 볏짚을 때고 난 재만 뿌려주면 잘 자랐다.

마을에서 읍내로 나갈 때도 대부분 이 길로 다녔다. 앞거랑을 가로지르는 다리를 앞공굴이라 불렀다. ‘공굴이란 콘크리트(concrete)에서 온 말이다. 높이가 2m정도 되는 앞공굴은 도로보다 약간 높아서 소달구지나 자전거가 다니기에 불편했다. 그리고 난간도 높이가 10cm 될까 말까한 시멘트로 돼 있어서 위험했다.

하루는 부모님을 도와 일하고 논에서 돌아오니 동생이 앓고 있었다. 부모님은 소죽 끓이기, 저녁 준비로 바쁘시고 내가 약을 사오기로 했다. 자전거를 타고 앞공굴 경사면을 오르던 나는 그만 비틀거리다가 공굴 아래로 떨어지고 말았다. 머리 안 부딪치기 다행이었다. 자전거는 난간에 걸려있고 나는 비스듬히 떨어져 웃옷의 어깨부분이 찢겨 너덜거렸다. 옷을 벗어 거랑 둑의 콩 사이에 숨겨 놓고 러닝셔츠 바람으로 다녀왔다.

소달구지와 관련된 일도 있다. 필자가 태어난 곳은 경주시 천북면 신당마을이다. 천북국민(초등)학교 2학년 1학기를 마치고 소평마을로 이사 왔다. 외조부의 권유로 농토가 넓은 곳으로 온 것이다. 임시로 남의 집 옆방에 살다가 바로 앞 중동댁논을 사서 그 터에 집을 지었다. 목재는 기계 쪽 어느 빈집을 뜯어 왔다. 소달구지로 두 대로 실어 날라준 이는 존당(尊堂)’ 살고 있던 친척 유촌아재모아아재였다.

아재들은 짐을 다 내리고 달구지를 돌리더니 선 김에 바로 가겠다고 했다. 아버지는 그래도 그렇잖다며 억지로 불러들여 간단한 음식을 대접했다. 불과 몇 분간이었다. 마루에서 일어나보니 유촌아재 소달구지가 사라지고 없었다. 그 새 소달구지는 앞공굴을 지나 존당 가는 길로 가고 있었다. 존당은 흥덕왕릉 부근 마을이다. 관광버스가 들어오기 꺼릴 만큼 좁은 다리를 어떻게 홀로 건넜으며, 우회전은 또 어떻게 했는지 신기하고 놀라워 오랜 세월이 지나도록 두고두고 이야기 거리였다.

소평마을은 사방천지가 논이었기 때문에 소나 염소 풀 하나 제대로 뜯길 데가 없었다. 고작해야 큰 길가에 조금 있는 풀이 전부였다. 그것도 조심해야 하는 것이, 잠시 한 눈을 팔면 어느 새 논둑에 심어 놓은 콩잎이나 나락을 뜯어먹어 버렸다. 우리는 벼를 나락이라고 불렀다. 소는 혀를 길게 내 밀어 휘감아 입에 넣었다. 그러기에 우리는 고삐를 바투 잡고 곡식에 입을 데려고 하면 재빨리 끈을 잡아당겼다. 고삐를 우리는 소이까리라고 불렀다.

한번은 새끼 두 마리 딸린 염소를 큰거랑 둑에 매어 뒀다. 적당한 데 말뚝을 박고 끈을 길게 하여 넓게 풀을 뜯도록 했다. 논일을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염소 몰러 갔더니 새끼 두 마리가 모두 물에 빠져 죽어 물 위에 둥둥 떠 있었다. 물 가까이 개 발자국이 있는 것으로 보아 마을 개들이 후달겨물로 뛰어들은 죽은 것이다. 집요하게 쫓아다니며 못살게 구는 것을 후달긴다고 했다.

마을 앞에서 안강읍 소재지까지 이르는 농지는 일제강점기에 경지정리를 했었다. 한 마지기 200평을 세 마지기로 맑아서 한 배미가 되도록 했다. 마을 사람들은 배미라고 말하지 않고 도가리라고 불렀다. 직사각형 모양이었다.

안강들에는 모두 네 개의 공굴이 놓여 있었다. 마을 바로 앞의 다리를 앞공굴이라 하고 1km 정도 더 나가서 철둑 가까이 있는 다리를 바깥공굴이라 했다. ‘네이버 지도에서는 이 들판을 지금 소평들이라고 명시하고 있다.

공굴은 검은색 곰팡이가 눌러앉아 세월의 무게를 말해줬다. 그리고 얼마나 단단했던지 큰물이 그렇게 지나갔는데도 끄떡없었다. 사람들은 근년에 만든 관개 시설물의 시멘트가 부스러지는 것을 보면서 한마디 씩 했다. “역시 왜놈들이 일 하나는 야무지게 해, 앞공굴 봐라

가로로 보이는 다리가 ‘앞공굴’이다. 앞공굴 지나 왼쪽으로 100m 정도 가면 마을이다. 옛날에는 다리만 시멘트이고 모든 길은 좁은 비포장이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마을 동쪽의 양동산이다. 정재용 기자
가로로 보이는 다리가 ‘앞공굴’이다. 앞공굴 지나 왼쪽으로 100m 정도 가면 마을이다. 옛날에는 다리만 시멘트이고 모든 길은 좁은 비포장이었다. 멀리 보이는 산은 마을 동쪽의 양동산이다. 정재용 기자

마을 사람들은 둑에 구덩이를 파고 호박을 심거나 작은 텃밭을 일구어 채소를 가꿨다. 들 복판에 살면서도 그만큼 밭이 귀했다. 도랑이나 거랑 둑은 우리가 소꼴을 하는 터전이기도 했다. 그 많던 풀들은 마을 사람들에 의해 매일 이발소 가위에 머리카락이 잘려나가듯 깔끔하게 깎여나갔다. 우리는 소꼴보다는 주로 소풀이라고 불렀다.

소평 사람인지 아닌지 구별하는 방법 하나가 있다. 왼손의 손가락을 보면 된다. 마을 사람치고 손가락에 낫 상처 없는 사람이 없었기 때문이다. 벼나 보리를 베다가 베이고 소풀을 하다가 베였다. 손가락이 베이면 그 자리서 쑥을 뜯어 대고 오른손으로 한참동안 잡아서 지혈을 시켰다. 집에와서 머큐로그롬을 발랐다. 그 빨간약을 우리는 머큐롬또는 아까징끼라고 했는데, 위키백과(wikipedia)에는 아까징끼(チンキ)는 요오드팅크를 일본어로 표기한 요오도징끼(옥도정기)에서 요오도를 빼고 빨갛다는 뜻의 아까를 붙여 생긴 것이라 설명하고 있다.

앞거랑에는 부들이 많았다. 우리는 그것을 줄피기라고 불렀다. 줄피기 부근에는 붕어가 많았고 진흙 속에는 말씹조개가 흔했다. 지금은 말조개가 표준 용어인데 어감이 좋지 않아 고친 것 같다. 앞거랑 물이 흘러드는 곳은 큰거랑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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