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⑧모내기를 마치면 농사의 절반은 지은 셈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⑧모내기를 마치면 농사의 절반은 지은 셈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06.28 14: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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모내기 사나흘 지나 사람하면 비로소 벼로 대접
농민의 삶은 벼농사 시계를 따라 움직였다

사방이 논으로 둘러싸인 소평마을에서 모내기는 행사 중의 행사였다. 시작이 반이라고, 모내기를 언제 하느냐가 한 해 농사를 좌우했다. 보리농사는 어디까지나 벼농사에 피해를 주지 않는 범위 내에서 가능한 틈새농사였다. 마을 사람의 삶 하루하루는 '벼농사 시계(時計)'에 따라 움직였다.

못자리가 예비농사라면 모내기는 본격적인 농사의 출발이었다. 달리기에서 출발이 늦으면 만회하기가 힘들 듯 모내기가 늦어지면 일단 한 수 접고 들어가는 셈이었다. 그러면 서둘러 보리를 베어내고 모내기를 하면 될 것 아니냐 싶지만 말처럼 쉽지 않았다.

모내기 날짜는 놉을 먼저 구하는 사람이 임자였다. 50여 호가 비슷한 날에 모내기를 하자니 일손은 달리기 마련, 기껏 다른 집 모내기 날짜를 피해서 날을 잡고 놉을 구해 놓아도 터지기 십상이었다. 철석같이 믿고 있었는데 갑자가 사정이 있어 못하게 되면 새로 놉을 구해야하는데 그 일이 만만찮았다. 이렇게 사단이 나는 것을 터진다라고 했다. 터진 사람 하나 보충하고자 일하고 와서 가뜩이나 피곤한 몸을 추슬러가면서 이집 저집 다니다보면 저녁밥 먹을 시간을 훌쩍 넘겼다. 방법은 품앗이를 철저히 하는 수밖에 없었다. 모내기하는 솜씨가 서툴면 품앗이에서 밀렸다. 그러면 자연스럽게 모내기는 남 다하고 나서 일이 좀 숙질 때 해야 했다. “오뉴월 한 나절 볕이 무섭다는 말이 있을 만큼 누구나 모내기 빨리 하기를 원하는데 날짜가 밀린다는 것은 같은 일하고도 곡수가 그만큼 줄어든다는 것을 의미했다.

하루에 한 도가리’(배미를 그렇게 불렀다) 모내기하는데 순수하게 모를 심는 사람만 6명 정도가 필요했다. 한 도가리는 서 마지기로 600평이다. 이왕 묻힌 것 싶어 두 도가리를 한꺼번에 심을 때도 있었다. 바깥주인과 아들은 못줄을 대고 안주인은 음식을 해다 날랐다. 이때면 일손 돕기 차원에서 학교도 가정실습을 했다. 보통 하지에서 6.25 즈음의 이틀가량이었다. 가정실습과 날짜가 안 맞으면 아이를 결석시켰다. 모내기에 비하면 못줄 대는 일은 쉬웠기에 애써 품앗이한 놉을 그런데 사용하기 아까워서였다.

지난 20일 철둑에서 본 안강들은 초록바다였다. 오른쪽으로 양동산, 왼쪽 멀리 어래산 줄기가 보인다. 소평마을은 들판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정재용 기자
지난 20일 철둑에서 본 안강들은 초록바다였다. 오른쪽으로 양동산, 왼쪽 멀리 어래산 줄기가 보인다. 소평마을은 들판 가운데 자리 잡고 있었다. 정재용 기자

못줄은 위 둑 바로 아래 긴 못줄을 종()으로 고정시켜 박아놓고 다른 하나는 모를 심을 때마다 횡()으로 넘겨가는 못줄로서 모두 2개가 필요했다. 위 둑에 아들이 못줄이 묶인 말뚝을 종으로 쳐진 눈금과 직각이 되게 박으면 아버지는 아래 둑에서 못줄 길이를 조정해가면서 적당한 간격으로 띄워서 댔다. 못줄에는 약 30cm간격으로 빨간 실로 된 눈금이 박혀있어 눈금 아래 모를 꽂으면 가로세로 간격이 정사각형이 됐다. 모가 제자리에 반듯하게 심어져야 나중에 논매기할 때 어려움이 없었다.

모내기는 이른 새벽부터 시작됐다. 예배당에서 울리는 새벽기도회 종소리가 신호였다. 새벽 5시 새벽기도회를 알리는 종소리가 울리면 잠자리에서 일어나 간단한 아침을 먹고, 6시면 모두 못자리 해 놓은 곳으로 모여들었다. 그리고 바로 모찌기에 들어갔다.

는 어린 벼를 말하고 모찌기는 못자리에서 모를 뽑아내는 작업을 말한다. 양손을 내밀어 새끼손가락 부분이 모판에 닿도록 모를 잡고 앞으로 잡아당기면 모가 뽑혔다. 뽑은 모는 왼손으로 옮겨 한 손아귀에 모으고 그 다음부터는 오른손으로만 쪄서 왼손에 보탰다. 네다섯 움큼 정도 모이면 한 묶음거리가 됐다. 그러면 볏짚으로 묶었다. 그 묶음을 못침이라고 했다. 이는 모내기하기 위하여 지게나 수레에 실은 볏모를 뜻하는 못짐과 다른 말이다. 모를 찌다보면 갓 부화한 메뚜기 새끼들이 이리저리 뛰어다녔다. 어떤 사람은 몸에 좋다며 어린 메뚜기를 손으로 훌쳐서 입에 털어 넣었다.

모는 손으로 쪄야하기 때문에 오늘날 이앙기로 모내기하는 모보다 키가 배 정도 더 자라야 했다. 쪄낸 모는 물에 착착소리가 나게 부딪쳐 포기 하나하나가 따로 놀만큼 씻었다. 만약 잘 씻어놓지 않으면 모내기 할 때 모를 세고 뜯어내는 일이 더뎌 원망의 대상이 됐다.

못자리와 모내기하는 논이 반드시 같은 장소는 아니었다. 못자리를 물대고 관리하기 편하고자 한 곳에 만들어 놓으면 모내기 당일 소구루마(소달구지)나 지게로 모심기 할 곳으로 날라야 했다. 썰어 놓은 논으로 모를 옮겨 놓고 적당하게 모침을 배부하는 것도 주인 몫이었다. 모침을 여기저기 던져서 늘어놓는 일을 모를 벼르다라고 했다. 모침 하나가 떨어질 때 쯤 하나가 나타나면 모내기하다가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못자리와 무논이 떨어져 있으면 모를 찌고 모심기할 무논으로 오면 오전 새참 때가 됐다. 메뉴는 보통 잔치국수였다. 새벽같이 나온 데다 찬물에 오래 들어가 있던 터라 뜨뜻한 국물이 제격이었다. 인심이 좋아서, 멀리 사람이 보이면 손짓하며 큰소리로 불러 반드시 함께 먹었다.

모내기는 일렬로 늘어서서 게걸음 걷듯 옆으로 이동하면서 했다. 두 사람씩 곁에 붙어 서 있다가 한 사람은 오른쪽으로 다른 한 사람은 왼쪽으로 심어가면, 멀리 있던 다른 사람과 만나게 된다. 못줄을 넘겨 다시 심을 때는 그 자리에서 다시 오른쪽, 왼쪽으로 심어나가면 못줄 넘기기 전에 붙어 서 있던 사람과 다시 만나게 된다. 이런 식으로 되풀이 하면서 뒷걸음질 쳐 나갔다.

모침에서 손아귀로 잡을 정도의 모를 빼내어서는 왼손가락으로 서너 포기를 헤아려 오른손으로 넘겨주면 오른손은 못줄의 눈금아래 진흙에 꽂아 넣었다. 이때 조심해야 할 것은 엄지로는 모의 허리를 감고 나머지 네 손가락으로 찔러 넣어 모가 중간에 접히지 않도록 하는 것이었다. 모의 뿌리 끝이 중지(中指) 끝을 넘어서지 않도록 하는 게 핵심이었다.

너무 깊이 심으면 안 뿌리가 잘 안 내리고 그렇다고 너무 얕으면 물에 뜨니 안 뜰 정도로 살짝 심어야했다. 눈은 못줄 눈금을 보고, 왼손은 모를 쥐고, 왼손가락을 모를 세고, 오른손은 꽂아 넣는 게 모두 전자동이었다.

마을 계중이 있어서 매년 바쁜 가운데도 잠깐 틈을 내어 여행을 했다. 1970년대 초, 현충문 앞에서 기념 촬영. 정재용 기자
마을 계중이 있어서 매년 바쁜 가운데도 잠깐 틈을 내어 여행을 했다. 1970년대 초, 현충문 앞에서 기념 촬영

연세 많은 이는 왼팔이 왼쪽 무릎 위에 얹혀 있었으나 선수(選手)는 왼손이 오른손 가까이 내려와 있어 손놀림이 빨랐다. 모를 심을 때마다 수제비 뜰 때처럼 물방울 튀는 소리가 찰방찰방 경쾌했다. 이런 사람을 질라이라고 불렀다. ‘길이 나 있는 사람이라는 뜻이다. 버릇이나 습관이 되어 익숙하게 되는 것을 길나다라고 하는데 사투리로 질나다라고 했다. 또는 칼제비라고도 불렀다. 모내기 솜씨가 칼로 수제비를 뜨듯 깔끔하게 한다는 데서 왔다는 설이 있었고 칼제비처럼 멋있다해서 붙었다는 설도 있다. ‘귀제비를 우리는 칼제비라고 불렀다. 칼제비는 배에 흑갈색 줄무늬가 흩어져 있고 집을 때는 일반 제비처럼 진흙과 지푸라기를 사용하되 굴 모양으로 지었다. 칼제비는 보통 제비보다 훨씬 멋있고 날렵하게 흡사 제트기처럼 날았다.

못줄 넘기는 두 사람은 반드시 모든 사람이 다 들을 정도의 큰소리로 어이소리를 낸 후 넘겨야했다. 부자간에도 어이였다. 누구든 한쪽이 소리를 지르면 다른 한 쪽이 같은 소리로 응답했다. 그리고 동시에 모 키를 넘길 정도로 번쩍 들어 옮겼다. 너무 늦게 넘기면 일이 늦어지고 너무 빠르면 엎드려 있는 사람 눈에 흙탕물이 튀므로 적당할 때 넘기는 게 요령이었다.

모내기는 협동 작업이므로 허리가 끊어질듯 아파도 자신이 한 포기 덜 꽂는 만큼 상대방이 대신해야 꽂아야 되기 때문에 함부로 쉴 수가 없었다. 손이 재빠르지 못하다는 소문이 돌아버리면 품앗이에서 밀렸다. 외딴 작은 마을에서 그것은 커다란 징벌이었다.

틈나는 대로 눈을 들어 안주인이 점심 다라이(큰 고무대야)를 이고 오고 있는지를 살폈다. 배도 고프거니와 점심이 와야 쉴 수 있기 때문이다. 점심 준비도 일손을 데려서 했다. 역시 품앗이였다. 어느 집 할 것 없이 꽁치는 꼭 감나무 잎에 한 토막 씩 얹어주던 기억이 있다. 점심 먹고는 논둑 여기저기 누워서 잠시 오수를 즐겼다. 허리를 다독이는 시간이었다.

모내기는 비가 와도 진행됐다. 옛날에는 도롱이를 쓰고 심었으나 비닐우의가 나오면서 도롱이는 사라졌다. 비닐우의는 보온 역할도 했다. 점심 먹을 때 비가 많이 오는 날이면 빗물이 국그릇에 떨어져서 국이 좀처럼 줄어들지 않았다.

가끔 모내기 노래 하는 이가 놉으로 오는 날이면 신이 났다. 모내기 노래는 두세 명이 서로 받아가면서 했다. 주로 농사일과 관련된 내용이었는데 중간에 점심 빨리 안 오나 독촉하는 사설(辭說)도 들어있었다. 가끔 흥분한 말의 울음소리 추임새를 질러 모두를 웃기곤 했다. ‘아따라시이(あたらしい)’ 라는 주제로 웃음꽃을 피우던 어른들도 이제 대부분 고인이 됐다. “모내기 하다가 눈에 뭣이 내려오기에 거미인 줄 알고 손으로 잡아 던졌더니 갑자기 아무 것도 안 보이데, 엎드려 있다 보니 눈이 빠져서 덜렁거리는 것인데 그런 줄도 모르고이런 따위의 우스갯소리, 노래로 허리 아픈 것을 달랬다.

모내기를 소평마을 사람들은 모심기또는 모숭기라고도 했다. 모내기는 날일이 아니고 돈내기였다. 서둘러서 정한 양만 다 심으면 해가 남아있어도 작업 종료였다.

모내기 하고 사나흘 정도 지나면 이제까지 연두색이던 모는 파란빛을 띠었다. 새 뿌리를 내린 것이다. 이렇듯 모가 활착하는 것을 사람한다라고 했다. 모가 로 대접받는 시점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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