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②마을의 유래와 지호어른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②마을의 유래와 지호어른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04.12 11:38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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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평마을은 1884년 경 윤씨 성을 가진 사람이 개척
윤학이 씨, 지호어른은 초가집 ‘지붕이는’ 기술자로 존경 받아
소평 사람들은 태어나서 금줄 치고, 죽어 상여 나가기까지 짚으로 시작하여 짚으로 마쳤다.

1984년, 경상북도교육위원회는 의미있는 사업 하나를 진행했다. 지역 초·중학교 교원을 동원하여 관할 자연부락의 명칭이 어디서 유래했는지 조사한 것이다. 이 책(경상북도 지명유래총람, 1984.8.18. 경상북도교육위원회 발간) 476면을 보면 '소평(小坪)'의 유래는 다음과 같다.

"소평(小坪)은 약 100년 전에 윤씨(尹氏) 성을 가진 사람이 이 마을을 개척하였다고 하며, 넓은 평야 중앙에 있는 작은 구릉(丘陵)이라 하여 소평(小坪)이라고 부르게 되었다. 지금은 46가구에 주민 173명이 살고 있다. (朴東海) (金連石: 남 73 외 2명)”

박동해 씨가 나이 73세의 김연석 씨와 다른 2명을 대상으로 조사했다는 뜻이다. 그런데 당시 소평에는 김연석이라는 사람은 살고 있지 않았다.

이와 같은 내용은 1991년 8월 보문문화재단에서 발간한 김재식, 김기문 편저 ‘경주풍물지리지’ 407면에서도 볼 수 있다. 어쩌면 경상북도교육위원회의 자료를 그대로 활용했는지 모를 일이다.

“소평(小坪)은 약 100년 전 파평 윤씨(波平 尹氏)가 넓은 평야의 중앙에 자리잡은 작은 구릉에 마을을 일으키면서, 마을 이름을 '소평(小坪)'이라 하였다.”

1984년에서 100년 전이면 1884년, 갑신정변이 일어났던 해다.

 

소평마을 상공에서 본 안강평야, 멀리 형산강이 보이고 평야 중앙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철길이 초록 선으로 보인다. 왼쪽의 구불구불한 선은 철길로 흘러드는 ‘큰거랑’이다. 정재용 기자가 새마을 책자서 캡처
소평마을 상공에서 본 안강평야, 멀리 형산강이 보이고 평야 중앙을 횡으로 가로지르는 철길이 초록 선으로 보인다. 왼쪽의 구불구불한 선은 철길로 흘러드는 ‘큰거랑’이다. 캡처:새마을 책자 정재용 기자

마을 내 윤 씨 성을 가진 사람은 윤학이(尹鶴伊) 씨 뿐이었다. 사람들은 그를 ‘지호어른’이라고 불렀다. 택호가 ‘지호댁’이었기 때문이다. 어떤 이는 ‘지오어른’이라고 했는데 지금 와서 어느 쪽이 옳은지 알 길이 없다. 지호어른은 벌써 고인이 된 지 오래고 슬하의 4남 3녀도 연락이 되지 않았다.

지호어른은 벼 타작이 끝나고 난 11~12월이 가장 바빴다. 그는 지붕개량 기술을 갖고 있어서 쉰 가구 가량의 모든 집이 그의 손길을 필요로 했기 때문이다. 초가집은 매년 지붕을 새 짚으로 갈아줘야 했다. 우리는 그 일을 ‘지붕 인다’라고 했다. 기와집은 예배당, 김물봉댁, 권물봉댁 정도였다. 김물봉댁은 마을의 처음 기와집이었는지 택호 대신 ‘기와집’으로 통했다.

농촌의 월동준비는 김장하기, 메주 쑤기, 지붕 이기 세 가지였다. 이것만 해 놓으면 걱정거리가 없었다. 뜨끈한 방에 앉아, 쌀독에 있는 쌀을 퍼내 밥을 짓고, 그 밥에 쭉쭉 찢은 김장김치 걸쳐 한 입 가득 물면 온몸에 스르르 퍼지는 행복, 석 달 열흘 함박눈이 내려도 겁날 것이 없었다.

밥 짓고 쇠죽 쑤고 난방 하는 연료는 모두 짚이었다. 어디 그것뿐인가 소여물, 새끼 꼬기, 가마니 치기, 멍석, 삼정 망태 만드는 재료도 모두 짚이었다. 소평 사람들은 태어나서 금줄 치고, 죽어 상여 나가기까지 짚으로 시작하여 짚으로 마쳤다. 그러니 집집마다 짚 볏가리가 집채만 했다.

 

부친 회갑잔치 때(1987.2.29.)예배 모습. 천막 옆 짚 볏가리가 높다. 매일 거기서 빼낸 짚단으로 소여물을 치고 소죽을 끓였다. 정재용 기자
부친 회갑잔치 때(1988.2.29.)예배 모습. 천막 옆 짚 볏가리가 높다. 매일 거기서 빼낸 짚단으로 소여물을 치고 소죽을 끓였다. 정재용 기자

 

그 짚으로 미리미리 새끼 꼬고 이엉 엮어 두었다가 지호어른과 약속한 날에 이웃과 어울려 지붕을 이었다. 이엉을 우리는 '영개’라고 불렀다. 초가삼간에 영개 몇 개 올라가는지는 지금 와서 어디 알아 볼 데도 없다.

아버지는 날이 밝자마자 사다리타고 지붕으로 올라가서 낫으로 낡은 이엉을 걷어냈다. 단잠을 자던 왕 구더기는 엉겁결에 마당으로 떨어지고 닭들은 웬 떡이냐 우르르 몰려다니며 먹이 다툼을 벌였다. 학교에서 돌아와 보면 지붕은 어느새 샛노랗게 단장돼 있었다. 추녀 부근 가장자리는 튼튼하게 하기 위해 대나무가 횡으로 누르고 있고 지붕 전체는 새끼줄로 가로 세로 엮여 있었다. 파란 하늘 배경삼아 솟은 용마루가 양 어깨를 으쓱했다.

‘지붕을 이고’ 나면 참새가 가장 좋아했다. 우르르 떼로 몰려와서 볏짚에 남아 있는 낟알을 뜯었다. 참새들은 이내 추녀 부근 양지바른 쪽 이엉을 뚫고 새로운 보금자리를 만들었다.

마을 청년들은 추운 겨울밤이면 마을을 돌며 참새 집에 손을 넣어 참새를 잡았다. 참새는 강한 플래시 불빛에 도망갈 엄두를 못 냈다. 손바닥 안으로 느껴지는 깃털의 포근함과 팔딱이는 심장고동, 청춘 남녀가 어울릴 때면 그들의 가슴도 참새 못잖게 뛰었을 것이다. 구이나 죽을 끓여 먹는 재미에 동짓달 긴 밤도 짧았다. 모두가 사라져가는 추억이다.

교회 나가기 전 우리 집에는 이런 일도 있었다. 지붕을 인 날 밤이었다. 며칠 째 감기를 앓던 동생이 갑자기 경기(驚氣)를 했다. 어머니는 바늘로 손마디 안쪽 관절의 파란빛 도는 몇 군데를 땄다. 조금 후 경기는 멎었다. 그리고 날이 새자마자 점쟁이를 찾아갔다. 점쟁이는 “집에 손댔구나”라고 용케 알아 맞췄다. 처방은 “용마루를 낫으로 군데군데 자르고, 까추를 뜯어야 애가 안 죽는다”였다.

우리는 지붕에 잇대어 달아낸 바람막이 공간을 ‘까추’라고 불렀다. 그리고 큰방 옆의 방을 ‘멀방’이라고 했다. 아마 ‘멀다’에서 왔지 싶다. 멀방 뒤쪽의 쇠죽 쑤는 아궁이가 난데로 있었기에 지호어른께 부탁해서 까추를 달아냈던 것이다. 당장 뜯어냈다. 덕분에 온 겨울을 덜덜 떨며 쇠죽을 쒀야 했고 눈이나 비가 올 때면 우산을 받쳐야 했다.

1970년에 시작된 새마을운동과 더불어 소평마을도 “초가집도 없애고 마을길도 넓히고...” 노래가사처럼, 점차 슬레이트 또는 기와집으로 변해갔다.

 

바산댁 사랑채와 헛간, 그 너머로 동촌댁 초가지붕이 보인다. 이현동 제공
바산댁 사랑채와 헛간, 그 너머로 동촌댁 초가지붕이 보인다. 이현동 제공

 

지호어른 윤학이 씨는 소평 마을 개척자의 후손 여부를 떠나서 주민 모두의 마음 속 깊이 존경받는 사람으로 남아있다. 해마다 늦가을 볕 속에서 지붕을 이어주던 귀한 사랑이 지금도 소평마을 사람들을 샛노랗게 ‘이어 주고’ 있기 때문이다. 노년의 불편한 다리에도 불구하고 사다리를 오르던 어른의 모습이 눈에 선하다.

지호어른은 일곱 명의 자녀를 길러내서 애국하고, 그 중에서 둘째 아들 영수 씨는 마을의 몇 안 되는 월남파병 용사로 나라에 충성했다. 용수, 영수 씨에 이어 맏딸로 태어난 복순(안강북부초등 10회) 씨의 기록에는 본적이 노당리 247번지로 적혀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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