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③보쌀차는 행복을 싣고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③보쌀차는 행복을 싣고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04.22 14:00
  • 댓글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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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는 마을 공동 시계
보쌀차가 지나가면 보리쌀 끓일 시간
가난 속에 사랑이 꽃피던 시절

‘기차’하면 이정환 시조시인이 가르쳐 준 레크리에이션 하나가 생각난다. 양손을 ‘반팔 앞으로 나란히’ 자세를 하고 기차바퀴 굴러가는 흉내를 하면서 시작하는 율동이다. ‘두리번’이라고 할 때는 얼굴을 좌우로 돌리면 되고 ‘김밥쓰’라고 할 때는 양쪽으로 김밥 건네주는 간단한 놀이다. 처음에는 전체를 노래 부르면서 율동하고 다음부터는 한 소절씩 율동만 늘려 가는 방법이다.

“기차를 타고/ 아, 기차를 타고/ 두리번, 두리번/ 김밥쓰 김밥, 김밥쓰 김밥”

그는 흥덕왕릉 가는 길에 소평마을을 보아 알고 있고 그의 부인은 직접 마을을 다녀간 적이 있다. 글래디스 태풍 후 성빈교회의 일원으로 구호품을 들고 와서 가가호호 방문했다.

 

마을에서 남쪽으로 본 모습으로, 안강 시가지 뒤로 우뚝 솟은 봉우리는 형제봉이다(사진 중앙). 그 뒤쪽이 경주이고 포항방면은 사진의 왼쪽이다. 안강역은 시가지 왼쪽 끝에 있다. 정재용 기자
마을에서 남쪽으로 본 모습으로, 안강 시가지 뒤로 우뚝 솟은 봉우리는 형제봉이다(사진 중앙). 그 뒤쪽이 경주이고 포항방면은 사진의 왼쪽이다. 안강역은 시가지 왼쪽 끝에 있다. 정재용 기자

소평마을에서 남쪽으로 내다보면 들판 저 멀리 2km 쯤 떨어진 곳에 철둑이 저수지 둑처럼 가로막고 있었다. 평야지대에 홍수 범람에 대비하려다 보니 둑을 높이 쌓아올려야 했고 그 위에 철로를 놓았던 것이다. 그러므로 마을에서 철둑 건너 평야나 형산강은 볼 수 없었다.

철도청 홈페이지에 들어가 보니 이 노선은 ‘동해선’으로 표시돼 있었다(마지막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는 다음과 같이 밝히고 있다.

“원래 대구선(大邱線)은 1917년에 동대구역에서부터 영천역까지 연결하는 노선으로 개통되었다. 동대구를 기점으로 동촌 · 반야월 · 청천 · 하양 · 금호를 거쳐 영천에 이르는 철도로, 서쪽으로는 경부선과 동쪽으로는 중앙선과 각각 연결되었다. 1938년 7월 영천에서 경주를 거쳐 포항까지 연장개통 되어서 내륙중심도시 대구와 동해안의 해안도시 포항을 잇게 되었다.”

네이버 블로그 '쇠부리'(blog.naver.com/ujwlee/221200745493)의 글에서는 “조선중앙철도주식회사에서 1916년 2월 착공할 때는 경동선(慶東線)이라 불렀다”라고 했다.

요즘은 기차보다 열차라는 말을 많이 사용하는데 당시는 ‘기차’ 하나였다. 필자가 중학교 다닐 때까지만 해도 석탄을 연료로 쓰는 증기기관차였다. 안강역으로 진입할 때면 하얀 수증기를 높이 뿜어 올리며 “빼~엑” 기적을 울렸다. 그 소리는 소평마을까지 크게 들렸다.

학교로 가는 지름길은 철둑길이었다. 가다가 기차를 만날 때면 우리는 벼락같은 기적소리에 귀를 막고 둑 아래로 내려섰다. ‘이리로 다니지 말라’는 신호겠지만, 가끔 칼을 만들기 위해 철로에 못을 얹었기 때문이다. 기관사는 우리 머리 위로 석탄을 던져댔다. 우리가 교실 난로에 때던, 건빵 모양으로 찍어낸 것으로 오자미만한 크기의 석탄이었다.

 

1992년 9월 1일 안강농업협동조합 발행 ‘안강읍 전화번호부’에서 캡처. 정재용 기자
1992년 9월 1일 안강농업협동조합 발행 ‘안강읍 전화번호부’에서 캡처. 정재용 기자

기차는 소평 사람들에게 시계 역할을 했다. 논에서 일을 하다가 기차 지나가는 것을 보고 시간을 알았다. 당시 시계는 귀했고 기차는 매일 일정한 시간에 지나갔기 때문이다. 우리는 아침 일찍 경주로 가는 차는 ‘통학차’, 점심 때 포항으로 가는 기차는 ‘점심차’, 저녁 무렵 포항으로 가는 기차는 ‘보쌀차’라고 이름 지었다. 통학은 경주로 많이 했다. 통학차를 타야 등교시간에 맞출 수 있었다. 보쌀차는 그 시간에 보리쌀을 끓여야 저녁식사 시간을 맞출 수 있었기 때문이다. 아주머니들은 남의 집에서 재미있는 이야기를 나누다가도, 빨래터에서 빨래를 하다가도 보쌀차가 지나가면 서둘러 ‘보쌀 끓이러’ 집으로 향했다. 삶는 일을 늘 ‘끓인다’라고 했다.

보리쌀은 한번 끓여 밥이 되지 않았다. 알이 여물어서 반드시 초벌 끓여 소쿠리에 담아 놓았다가 한 번 더 끓여야 제대로 먹을 수 있었다. 두 벌 끓일 때 쌀이 있는 사람은 쌀을 안치면 됐다. 쌀이 없는 사람은 그냥 끓였다. 그렇게 하면 보리밥이 됐다. 그 밥을 ‘꼽치기’라고 했다. 쌀과 보리를 섞어 먹는 ‘혼식’ 장려가 뉴스에 나오곤 했지만 ‘못 사는’ 사람들에게는 꿈같은 얘기였다. 그냥 ‘꽁당보리밥’이었다. 하지만 옹기종기 둘러 앉아 웃음꽃 피우며 맛있게 먹는 행복한 밥상이었다.

여름이면 마당에 모깃불 피워놓고 저녁을 먹었다. 잠 잘 시간이 될 때까지 마당에서 이야기 잔치를 벌였다. 안강역에서 출발하는 기차 불빛은 서치라이트가 되어 동네 전체를 비췄다. 그 불빛에 집 벽면에 상영되던 흑백영화는 일품이었다. 역 부근의 초목, 건축물이 활동사진으로 보였다. 그러다가 모깃불도 사위고 잠이 올 때면 방안에 쳐 놓은 모기장 속으로 들어갔다.

마을 사람들은 기차를 타고 포항해수욕장으로 갔다. 완행열차 ‘비둘기호’였다. 등을 맞대고 앉게 돼 있는 나무의자였다. 아침 먹고 집을 나서면 저녁 먹기 전에 집으로 올 수 있었다. 기차 시각이 그러기에 딱 맞았다.

우리 집도 연중행사처럼 날을 받아 해수욕을 갔다. 어느 한 해, 돌아올 때 기차에 두고 내린 조개와 파래는 아직도 잊지 못한다. 발로 모래를 헤집어 잡은 조개와 물에 떠다니던 파래를 점심 먹은 그릇에 가득 담아 기차 선반 위에 얹어놓고, 달그닥 거리는 바퀴소리를 자장가 삼아 모두 잠이 들어버렸다. “안강역” 차내 방송에 놀라 급히 내리는 통에 그냥 두고 내리고 말았던 것이다. 조개도 조개지만 아끼던 ‘항고’를 잃어버린 게 한동안 마음을 쓰리게 했다.

 

철도청 제공 전국철도노선도에서 캡처한 것이다, 안강역의 126.3은 부산진역 기점 거리, km이다. 붉은 선은 2015년 3월에 개통된 고속철도다. 정재용 기자
철도청 제공 전국철도노선도에서 캡처한 것이다, 안강역의 126.3은 부산진역 기점 거리, km이다. 붉은 선은 2015년 3월에 개통된 고속철도다. 정재용 기자

마을에 철없는 중학생이 있었다. 그는 중학교 수학여행을 가지 못했다. 수학여행비 낼 돈이 없었기 때문이다. 수학여행지는 서울이었다. 안 가는 학생은 그 동안 가정실습이었다. 그는 ‘모래골’ 논에서 부모와 같이 벼 베기를 했다. 아홉 시 좀 넘어, 기적소리가 논에까지 들려왔다. 그는 허리를 펴면서 무심코 말을 내뱉았다. “애들 저 차로 가겠네”

중학생이 커서, 직장일로 해외출장을 많이 다니게 됐을 때 그의 부모가 말했다. “네가 그때 한 말이 늘 마음에 남아있었지” 이어서 말했다. “하나님께서 그때 우리의 기도를 들어주셨나보다. 네가 그때 못한 여행을 이렇게 수시로 하게 되다니 얼마나 감사한지” 그 말을 들은 아들은 철없이 저지른 불효를 자책했다. 그리고 늦었지만 부모의 한을 반분이나 풀어드린 것 같아 감사했다.

양동마을 부근에 철교가 있다. 그 철교 밑을 지나서 기계천이 형산강으로 합류한다. 소평마을 근처 ‘큰거랑’은 기계천 물을 보를 막아 흘러들게 한 물길이었다. 태풍이 나면 그 많은 물들은 역류했다. 포항 바닷물이 육지로 차오르고, 형산강 큰물은 바다로 빠져주지를 않아 자연스럽게 마을 앞 들판은 커다란 호수를 이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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