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⑱설 없으면 무슨 재미로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⑱설 없으면 무슨 재미로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12.27 16:13
  • 댓글 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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나이 한 ‘살’ 더 먹는 ‘설’
묵은 농사에 대한 감사와 새해 농사에 대한 기원이 어우러진 명절

음력 11, 정월 초하룻날을 설날이라 하고 한해의 처음을 정초(正初)’라고 한다. 설날은 전두환 정부 때인 1985년 민속의 날로 지정되기 전까지는 구정(舊正)으로 불리며 공휴일도 아니었다. 일제강점기에 음력설 쇠는 것을 막았기 때문에 양력 1월 1일을 신정(新正)이라 부른데 따른 것이다. 1989년부터는 설날로 명칭이 바뀌고, 1991년부터는 연휴가 도입됐다.

세배는 정월 초하룻날부터 정월대보름까지 이어졌는데 이 기간 내내 이었다. 설에는 서로가 복을 빌고 덕담을 나눴는데 어쩌다가 상대로부터 기분 나쁜 말을 들으면 정초부터 재수 없이"라며 분개했다.

예나 지금이나 민족 최대 명절은 추석과 설이다. 벼농사 일색인 소평마을에서 추석은 풍년에 대한 감사이고 설은 가을걷이를 마친 후 벌이는 잔치였다. 하지만 절기로 보면 설은 정초이고 추석은 8월이니 설 명절은 묵은 해 농사에 대한 감사와 새해 농사에 대한 기원이 어우러진 셈이었다.

4일, 9일 서는 안강 장은 설날 한 달 여 전부터 대목이었다. 시장 통에 있는 아카데미극장과 안강극장에는 설 특선프로 시네마스코프 영화 간판이 걸리고 가게마다 물건이 잔뜩 쌓였다. 시장 공터에는 뻥튀기 기계가 돌아가고 곡마단(曲馬團) 가설극장도 짓기 시작했다.

아이들은 설 치장(治粧) 기대에 마음이 부풀어 있었고 부모는 없는 살림이지만 선뜩 쌀을 냈다. 정미소 주인에게 파는 것을 낸다라고 했다. 설빔을 설 치장이라고 불렀다. 집집마다 자녀가 보통 대여섯 명이던 시절이라 한 벌씩 사 입히려고 해도 목돈이 들었고 농촌에서 목돈 마련은 쌀 내는 것 외에는 달리 방법이 없었다. 너도나도 쌀을 내다보니 쌀값은 자연히 바닥이었다.

당시는 골덴(corded, 코르덴)이 유행했다. 남자아이는 검은색, 여자아이는 붉은색 계통의 골덴 재킷(jacket)과 바지였다. 중학생에게는 검정색 동복(冬服) 교복을 사 줬다. 자녀 옷 사고 남은 돈으로 겨울 날(지낼) 메리야스 내복과 양말을 샀다. 자녀 따뜻하게 입히는 것으로 자신의 온기를 느끼는 가난한 농부는 집으로 돌아오는 들판 길 5리()가 해거름에 칼바람이었지만 마음은 훈풍이었다.

버스에서 내려 걷던 농로. 정재용 기자
버스에서 내려 걷던 농로. 정재용 기자

당시 정미소는 안강사거리 부근에 있는 안강정미소'와 소평마을 오는 길에 있는 북부리정미소'였다. 정미소 대신 방앗간'이라고도 불렀다. 북부리방앗간 옆에는 북부리이발소'가 있었는데 소평마을 대부분이 그 이발소에 가서 머리를 깎았다. 북부리이발소를 화도이발소'라고도 불렀는데 이발사 이름이 화도' 씨였기 때문이다. 화도이발소는 군대 제대하고 나온 아들이 이어받아서 운영했다. 설을 앞두고 남자들은 북부리이발소에 가서 이발을 하고 여자들은 미용실에 가서 머리를 보글보글 볶았다. 이 무렵이면 마을에 야매(뒷거래)로 머리하는 사람이 찾아들었다.

어머니는 보름 전에 엿을 고았다. 커다란 항아리에 고두밥(지에밥)과 엿질금(엿기름)을 섞어 넣고 구들목(온돌방의 아랫목)에 앉힌 후 이불을 둘러놓으면 고두밥이 삭았다. 덜 삭으면 엿이 덜 나오고 너무 삭으면 제 맛을 잃기에 시점을 놓치지 않으려고 잠을 설쳤다. 엄지와 검지도 쌀알을 문질러보고 측정했다. 어머니의 됐다" 사인이 떨어지면 온 식구는 자다 말고 일어나서 엿물을 짜고 가마솥에 붓고 달였다. 구들목 장판은 검게 타들어 가고 조청은 되직해 갔다. 아이들은 이 때를 기다리지 못하고 엿밥에 사카린을 타서 먹었다.

조청은 떡가래를 빼서 찍어 먹거나 튀밥을 튀겨서 쌀강정 뭉치는데 쓰였다. 튀밥을 박상이라 했고 강정을 콩자반이라고 불렀다. 쌀을 튀겨서 만들어도 콩자반, 콩을 볶아서 만들면 콩 콩자반이었다. 떡가래를 꾸들꾸들 말린 후 엇 썰면 떡국이 되고 조청을 조금 더 달여서 여러 번 접어 당기기면 엿이 됐다. 유과나 떡을 해 먹는 집도 있었다.

80년대까지만 해도 객지에 나가있던 자식들은 고향으로 가서 부모와 함께 설 쇠는 것을 당연한 것으로 알았다. 친척들도 큰댁 혹은 장손이 살고 있는 조상의 고향으로 찾아가서 세배를 나눴다. 작은설(설날 하루 전날, 까치설이라고도 했다)날 대가족이 한 곳에 모여 함께 웃고 떠들고 음식 만드는 것을 가문의 자랑으로 여겼다.

TV를 틀면 방송사는 오락, 코미디, 영화 프로그램 경쟁을 벌이고 귀성행렬 생중계에 인터뷰하는 아가씨는 양 손에 선물 꾸러미를 들고 웃느라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하지만 실제는 귀성 전쟁이었다. 고향 사람들 앞에 어엿이 앞에 서리라' 한껏 멋을 부린 청춘은 대중교통을 이용하는 대중에 이리저리 떠밀리다보니 옷은 쑤시뭉태기가 되고(흐트러지고) 신발 한 짝이 도망가도 잡을 틈이 없었다.

마이카시대 이전이라 대구에서 소평마을로 가려면 열차를 타고 안강역에 내려서 걷거나, 고속버스를 타고 경주에 내려서 안강 기계 가는 시내버스를 갈아타든지, 대구동부정류장에서 시외버스로 안강정류소에 내려서 걸었다. 마을까지는 논길을 2Km정도 걸어야 했는데 가끔 택시를 타고 들어오는 이도 있었다.

대구동부정류장도 이 때가 전성기였다. 열차표와 고속버스표는 구하기 어려워서 대부분이 동부정류장에서 영천을 거쳐 안강, 포항, 동해로 가는 아성, 금아, 천마여객을 이용했다. 이용객이 많다보니 대나무 장대를 꼬나든 직원이 사람들 머리 위로 그 장대를 휘둘러 질서를 유지했다. 신사복, 한복차림의 쪼그려 앉아 매표 순서를 기다리는 모습은 군대 제식훈련을 연상시켰다. 이 정류장은 2016년 12월 12일 동대구복합환승센터가 영업을 개시하면서 문을 닫았다.

1981년 설을 쇠며. 정재용 기자
1981년 설을 쇠며. 정재용 기자

동트기 전에 마당에 멍석을 펴고 횡대로 서서 차례(茶禮)를 지내고 믿는 사람들'은 예배를 드렸다. 이어서 세배 순서, 설날 인사는 과세(過歲) 잘 했습니까?”였다. 과세가 설을 쇠다는 뜻이니 과세하다가 맞는 말인데 모르고 과세 잘 쉬었습니까?”라고 인사하기도 했다. 세배를 받는 어른은 그래, 너도 어른 모시고 과세 잘 했나?” 하거나 건강하고 공부 열심히 해라등의 덕담을 내렸다.

옛날에는 세뱃돈 대신 먹을 것을 내 놓은 게 보통이었다. 튀밥을 조청으로 버무려 만든 강정이 대부분이었고 떡국을 상에 차려 주는 집도 있었다. 아이들에게는 밤, 대추, 곶감, , 유과가 인기였다. 세배는 떼로 몰려 다녔다.

설 이튿날부터 곤실댁 앞마당과 마을 앞길은 다시 마을을 떠나는 사람과 찾아오는 사람들로 붐볐다. 아이들은 제기차기에 정신이 없고, 자녀를 배웅하는 부모는 앞공굴 너머 가물가물할 때까지 손을 흔들었다. 세배하러 오는지 흰 두루마기를 펄럭이며 논을 가로질러 오는 사람도 보였다. 한 겨울에 흰옷이 어울리지 않지만 쑥색의 기지(生地 きじ, 옷감의 일본어)’ 두루마기는 너무 비쌌다.

사십오구원본토정비결(四十五句元本土亭秘訣)'과 새해 책력을 비치하고 있는 참봉 댁은 한 해 운수를 보려는 사람들로 줄을 이었다. 가난한 농부에게 무슨 용뺄 일이 있으련만 그래도 새해는 새해이니 그리고 설이니 조상들이 그랬던 것처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