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⑦보리 베기와 보리타작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⑦보리 베기와 보리타작
  • 정재용 기자
  • 승인 2019.06.19 08:29
  • 댓글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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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지깽이도 한 몫 하는 농번기
“개굴아, 개굴아 너도 범어리 보리타작 왔니?”

요즘 모내기는 망종(芒種) 즈음 거의 끝나지만, 이모작에다 손으로만 모내기를 하던 당시는 하지(夏至) 무렵이 한창이었고 늦으면 유월 말까지 갔다. 소평마을의 유월은 복닥불 나는 달이었다. 작렬하는 태양은 보릿대의 마른 잎에 금방이라도 불을 댕길 듯 뜨거웠고, 마을사람들은 보리 베기와 모내기로 눈코 뜰 새 없었다.

빨리 보리를 베어내야 논을 갈고, 논을 갈아야 물을 대고, 물이 가득차면 썰었다. 논을 썬다는 것은 무논에 써레질을 하여 모내기하기 좋도록 흙을 평평하게 고르는 일을 말한다. 가뭄에 물을 대는 일은 전쟁이었다. 서로 자기 논에 물을 빨리 대고자 밤을 새기 일쑤였다. 아전인수(我田引水)를 위해 며칠 밤을 샜는데 중간에 위의 논 주인이 늦게 나타나서 물길을 가로채면 싸움이 벌어졌다. 소평마을은 사방이 논이었으니 아답인수(我沓引水)’가 옳겠다.

부지깽이도 한 몫 한다는 속담이나 눈썹에 불이 붙어도 끌 새가 없다는 이때를 두고 한 말이다. 흔히 말하는 고양이 손도 빌린다는 일본 속담이다.

보리 추수는 베는 일부터 탈곡까지 모두 힘들었다. 보리타작할 때면 무더운 날씨에 땀이 비 오듯 쏟아져 온몸을 적셨고 보리 까끄라기는 몸에 엉겨 붙어 떨어질 줄을 몰랐다. 보리 베기와 모내기를 단시일에 마치려니 여간 몸이 아파도 병원 갈 엄두를 못 냈다. 이 때를 농번기(農繁期)라고 했다. 쉬는 겨울을 농한기(農閑期)라고 한 데 비해 농사로 분주한 시기라는 의미다. 당시는 지역별 모내기 진척도가 중요 뉴스였다. 요즘으로 치면 유월 내내 실검 1위가 농번기였다.

1983년 6월 소평마을 서쪽 농로, 왼편의 무논과 오른편으로 누렇게 익은 보리가 보인다. 정재용 기자
1983년 6월 소평마을 서쪽 농로, 왼편의 무논과 오른편으로 누렇게 익은 보리가 보인다. 정재용 기자

마을사람 대부분이 가난해서 쌀밥은 귀해서 명절이나 생일 때 먹을 수 있었고 그나마 조금 있는 쌀도 팔아서 농사짓는 비용으로 쓰고나면 먹는 것은 국수나 보리밥이었다. 보리농사가 잘 돼야 벼농사 추수하는 늦가을 때까지 살아남을 수 있었다. 늦은 봄부터 초여름은 쌀은 떨어지고 보리쌀 날 때는 아직 한참 기다려야 하는 춘궁기(春窮期)였다. 이때를 보릿고개라고 불렀다. 퀴즈 중에 세상에서 가장 넘기 힘든 고개는?”이라는 문제가 나오면 정답은 보릿고개였다. 온 식구가 살아남기 위해 산으로 들로 나물 캐러 다니고 국가는 빈민지원 차원에서 저수지 둑 쌓기나 사방(砂防)공사를 벌였다. 사방공사는 산사태를 막기 위해 벌이는 나무심기 사업이다.

햇보리 날 때까지 견디다 못해 아직 덜 여물은 풋보리를 베어 찐쌀처럼 쪄서 먹는 집도 있었다. 무슨 수를 쓰든지 노부모를 공양하고 자식을 안 굶기는 게 가장으로서 가장 중요한 사명이었다. 옷 사 입히고 공부시키고는 차후 문제였다. 보리는 쌀에 비하면 턱없는 열등재(劣等財)지만 가난한 사람에게는 말 그대로 생명의 양식이었다. 보리밥도 꿀맛이었다.

보리는 골을 타고 갈았기 때문에 벨 때도 골 따라 베야 했다. 보리 베는 방법과 벼 베는 방법이 달랐다. 벼는 새끼손가락이 땅 쪽으로 향하게 하여 벼의 중간 정도를 똑바로 세워 잡고 베지만 보리는 왼팔을 비틀어 엄지손가락이 땅으로 향하게 돌려서 보릿대를 비스듬히 뉘여 잡고 뒷걸음질로 베어 나갔다. 베다보면 가끔 종달새가 새끼 쳐 나간 빈 집도 나타났다.

벤 보리는 나란히 논에 깔았다. 그렇게 사나흘 정도 둬서 말렸다. 만약 그 사이에 비가 오면 큰일이었다. 보리가 물에 떠내려가기도 했다.

다 마르면 볏단을 갖고 다니면서 볏짚으로 보리를 묶었다. 그러면 타작하기 알맞은 보릿단이 됐다. 보릿단은 집으로 실어 날라야 했다. 그 자리에서 바로 타작해도 되지만 모내기가 급한 만큼 집으로 옮겨 놓았다가 모내기 마친 후 타작을 하기 위해서였다. 나르는 데는 소 구르마(수레)나 리어카를 이용했고 이도저도 없는 사람은 지게로 져다 날랐다. 가난한 농민은 늘 힘이 배나 더 들었다.

보리낟가리 쌓는 일도 기술이 필요했다. 보릿짚이 매끈매끈해서 작은 단을 쌓기가 여간 어려운 게 아니었다. 어떤 때는 쌓던 사람과 낟가리가 한꺼번에 무너져 내리기도 했다. 둥글게 돌아가면서 쌓되 항상 중앙이 볼록하여 비가 오면 빗물이 바로 흘러내리게 쌓아야 했다.

모내기 마칠 때까지 기다리는 동안 장맛비가 내리면 가장 염려되는 게 보리낟가리였다. 비가 스며들어 보릿단이 젖는 날이면 낟가리에서 김이 무럭무럭 났다. 해가 난 틈을 이용하여 부랴부랴 낟가리를 뜯어내보지만 이미 보리는 싹이 나 있어 양식으로는 쓸모가 없었다. 겨우 쓸 데라고는 엿기름 내는 것뿐이었다. 엿기름을 우리는 질금이라고 했다. 덜 마른 보릿단을 쌓았을 때도 마찬가지였다.

보리타작은 나락타작 할 때 쓰는 탈곡기를 쓰지 않고 평평한 돌을 비스듬히 세워놓고 그 위에 보릿단을 매다 꽂는 방법이었다. 지게 끈을 풀어 보릿단 묶은 부분에 한 바퀴 반 돌리고 난 뒤, 유도 선수가 업어치기 하듯 냅다 돌판 위에 매쳤다. 끈을 돌려가며 양쪽을 털었다. 보통 대여섯 번은 두드려야 낱알이 떨어졌다. 남편이 매치는 동안 아내는 갈퀴로 낟알을 끌어내고 이삭 채로 떨어진 보리에는 도리깨질을 했다.

옹헤야노래는 도리깨질 할 때 부르는 노래다. “옹헤야 어절씨고 잘도 한다 옹헤야 단 둘이만 옹헤야 하더라고 옹헤야부잣집 보리타작 때 일꾼 여러 명 둘러서서 한 사람이 메기고 나머지는 옹헤야후렴을 장단에 맞춰 불렀다. 일반 가정집 소규모 타작에는 그런 게 없었다.

뙤약볕에 종일하는 보리타작은 장정이라도 들숨날숨이었다. 땀을 많이 흘려 수시로 오이냉채를 마시고 새참으로 잔치국수를 먹어 수분을 보충해야 했다.

보리수염은 강아지풀처럼 바짓가랑이를 타고 위로 올랐다. 몸을 움직일수록 종아리를 타고 허벅지까지 오르고 배꼽에서 가슴으로 올랐다. 거기다 털리다있는 보릿단을 매치기 위해 머리위로 치켜들면 까끄라기가 머리위에서부터 온몸으로 쏟아져 내렸다. 이런 보리타작을 마치고 목욕하러 갔을 때 기쁨은 앞서 큰거랑 이야기에서 피력한 바 있다.

보리타작과 관련하여 아버지로부터 들은 얘기다. 어느 품꾼이 범어리마을로 보리타작하러 갔다. 일하다가 볼일 보러 변소에 가서 쪼그리고 앉아 있는데 눈앞에 숨을 헐떡거리고 있는 개구리 한 마리가 보였다. 개구리도 시원한 그늘을 찾아 들어 온 것이다. 품꾼은 개구리를 보고 혼잣말을 했다. “개굴아, 개굴아 너도 범어리 보리타작 왔나?”

범어리는 경주시 호명(虎鳴)’을 달리 부르는 이름이다. 아버지의 고향은 신당이고 호명이 신당 인근이니 아마 그 품꾼은 신당 사람이었을 것 같다. 밀 추수 방법도 보리와 동일했다.

보리타작하고 난 뒤 보릿짚은 다시 낟가리를 쌓았다. 이번에는 둥글 쌓지 않고 네모지게 쌓았다. 보릿짚은 쇠죽을 쑤거나 밥을 지을 때 연료로 쓰고 샛노랗게 예쁘게 물든 짚으로는 밀짚모자 만드는 중간재(中間財)를 만들었다. 그 일을 우리는 보릿짚 땋는다라고 했다. 밀짚모자를 맥고모자(麥藁帽子)라고 불렀다.

마을 서편 농로에서 쇠꼴을 베고 있는 소녀, 소평마을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열심히 도왔다. 사진 상단에 마을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마을 서편 농로에서 쇠꼴을 베고 있는 소녀, 소평마을 아이들은 어릴 때부터 집안일을 열심히 도왔다. 사진 상단에 마을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보리추수 모내기 다 하고나면 다시 언제 그랬냐는 듯이 마을에 평화가 찾아들었다. 남편은 물꼬 보러 다니고 아내와 자녀들은 매미소리 들으며 보릿짚을 땋았다. 저녁을 먹고도 모깃불 피워놓고 보릿짚을 땋았다. 보릿짚 네 가닥을 엄지손톱을 이용해서 차례로 안으로 우겨넣으면 되니 어두워도 상관없었다. 보릿짚이 끝부분에 이르면 새 보릿짚의 아랫구멍을 땋다 있는 보릿짚의 머리 부분에 끼워 이어나갔다. 보리밥을 먹은 덕분에 여기저기서 방귀를 뿡뿡 뀌어댔다. 땋은 보릿짚은 5일장에 나가 팔아서 꽁치도 사먹고 수박도 사 먹고 여름 남방도 사 입었다.

이때면 들 복판에 있는 소평마을에도 참외 ‘다라이’를 인 아주머니가 찾아왔다. 아주머니는 보리와 보리쌀을 받고 참외를 팔았다. 수박은 무거워서 안 가져왔다. 가끔 ‘반티’를 이고 오기도 했다.

다라이(たらい)는 큰 대야를 뜻하는 일본어다. 재질은 합성수지이며 붉은빛을 띠었다. ‘반티’는 큰 나무상자 그릇을 부르는 경상도 방언이다. 역 사다리꼴 모양이고 겉에는 붉은 칠이 입혀져 있었다. 물건을 담아 놓거나 이고 다니기에 편해서 논으로 새참을 나를 때 주로 이용됐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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