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61)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61)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3.26 17:01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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종이는 거무튀튀하게 변하고 종래는 찢어지고 뚫어져서 구멍이 생겼다
오랑캐들의 씨까지 뱃속에 담아 돌아온 그녀들이 아기를 낳으니 ‘호로’자식이다
그것도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2월 27일 보름을 만 하루 지난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한참을 망부석이 되어 생각에 잠겼던 고모가 재차 한장 한장 들춰가며 찬찬히 살펴보다가는 ‘아~’하는 탄성을 내 지르며 머리를 감싸 안았다. 어느새 고모의 눈에는 감격의 눈물이 가득 고였다. 당장에 할머니의 옷가지로 얼굴에 감싸 눈물을 쏟는 고모는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할머니의 입장이 되어있었다. 할머니의 입장이 되어 종이에 적힌 내용을 보는데, 자연스레 구구절절한 내용들이 머릿속으로 환하게 그려지고 있었다.

그것은 아픈 고모를 살리기 위한 할머니만의 약방문이었다. 애당초 글을 몰랐던 할머니는 의원이나 무당집에서 눈에 담아온 글씨를 일일이 그림으로 그렸다. 그런 가운데 때때로 할머니는 인상파 화가의 모네가 되었고, 어느 때는 신고전주의 화가 자크루이 다비드가 되었다. 자신도 모르는 가운데 추상 회화 작가 몬드리안이 되어 삼매경에 빠졌다. 어렵게 기억을 더듬어가며 밤을 새웠다. 한획 한획을 정성들여 그림을 그리듯 그렸다가는 고개를 갸우뚱 지우기를 반복했다. 글씨인지 그림인지는 중요하지가 않았다. 훗날 잊지 않게, 할머니 자신이 필요할 때 쉽게 알아볼 수 있도록 바위에 정을 쪼듯 종이 위에 또박또박 새겼다. 그렇더라도 더러는 글로 표현할 수 없는 것들도 있었다. 글을 체계적으로 배웠다면 모르겠거니와 어깨너머로, 눈에 넣어서 그리듯 배운 지식이다. 그런 까닭에 수십 곱절의 노력이 필요했다. 오늘은 왼쪽 한 획, 모래는 오른쪽 한 획, 그다음 삼사일이나 지나서 중앙을, 보는 족족 머리에 아로새겨 한 획씩, 수일 걸친 끝에 글자 한 자가 형태를 드러낸다. 무에서 유를 창조하듯 탄생이다. 그런 가운데 야속한 것은 눈이다. 가끔 오류와 착오를 일으킨다. 그 결과 종이는 거무튀튀하게 변하고 종래는 찢어지고 뚫어져서 구멍이 생겼다.

종이마다 빼곡하게 약재 명, 약재의 효험, 쓰임새, 채취 시기, 보관 방법 등을 알아보기 쉽게 깨알처럼 기록하고 있다. 짧은 지식으로 입에 쓰고, 달고, 채취 장소, 독의 유무 등을 일일이 열거하고 있다.

하지만 의욕만 앞세운 초보자라 그런지 모든 글씨와 그림들이 균형은 물론 방향 감각을 잃었다. 크고 작고, 굵고 가늘어서 날아가는 듯 어설프다. 아기 돼지 삼 형제 갈대집으로 세찬 바람이라도 불었을까? 허물어지고 삐뚤어져서 날아가는 형상이다. 그 과정이 십 년을 넘어서고도 몇 해를 두고 진행되다 보니 할머니는 자신도 모르게 얼마간의 글을 스스로 깨우치게 된 모양이다. 고모가 시난고난 병석에 누운 14년을 두고 거듭하다 보니 덤으로 얻은 부산물 같은 지식이다. 그 오랜 정성의 과정을 고모가 단순히 지식으로만 풀려고 했으니 어디 가당키나 했겠나!

한참을 멍하게 앉았던 고모가 할머니가 남긴 유품을 보물 싸듯 고이 싸서 문갑에 갈무리하고는 다시 생각에 잠겼다. 그리고 그때 고모는 향후 누군에겐가 도움이 사람이 되겠다고 생각했다. 할머니가 죽어가는 고모에게 새로운 생명을 불어넣어 준 만큼 진실한 삶을 살아야겠다고 마음속으로 다짐했다.

1636년(인조 14년, 청 숭덕 원년) 12월, 청(靑)나라는 마부대(馬部隊), 용골대(龍骨大)를 선봉장으로 병자호란을 일으켰다. 그때 사대부 가의 아녀자 10여 명이 다과상을 마주하고 앉았다. 이야기의 심각한 주제는 금수(禽獸)와 다름없는 오랑캐에게 몸을 더럽혔을 때 어떻게 하겠냐는 것이다. 심각한 주제와는 달리 결론은 한마디로 간단했다. 사대부 가의 아녀자답게 마땅히 죽어야만 한다는 것이다. 생각하고 자시고 없다며 한결같은 목소리다. 그런 그들 중에 다소 젊어 보이는 여인 한 명만이 조용히 미소지을 뿐 말이 없다. 좌중의 모든 여인이 죽겠다는데 혼자서 빙그레 미소짓는 그녀가 얄미운 중에 천하 밉상이다.

“그럼 그 지경에 이를라치면 지조와 정조를 목숨처럼 여기는 사대부 가의 아녀자라면 마땅히 죽어야지!” 백옥 같은 몸이 그 지경에 이르러서도 살고 싶냐고, 목숨을 부지할 거냐고 다그쳐도 여인은 묵묵부답이다. 태연자약한 모습에 여전히 조용하게 미소다. 순간 좌중은 당황했다. 곧장 죽는다는 말이 없자 누군가가 여인을 겁박하듯

“이런 빌어먹을 경우가 있나! 맹꽁이처럼 앞뒤가 꽉 막힌 여편네를 봤나! 그럼 그대는 반가(班家)의 아녀자로서 그런 치욕을 당한 그때 자결하지 않고 어떡할 거요?” 대답을 강요하자 잠시 주저하는 듯하더니 조용한 말로

“예~ 그것이, 소녀는 아직 그런 일을 당해보지 않았는지라 이렇다 저렇다 확답을 드릴 수가 없사옵니다” 미소 지을 뿐이었다. 그 말에 분개한 주위 아낙네들은 그 여인을 두고서 이구동성으로 지조도 없고, 절개도 없고, 반가의 여인으로 최소한의 본분조차 망각한 천박한 여자라고 비난의 화살을 퍼부었다. 결국 그날 모임은 젊은 여인의 밋밋한 행동을 성토하는 것으로 끝을 맺었다.

전쟁은 남한산성에서 죽기 살기로 항전하던 인조(仁祖:조선 제16대 왕)임금이 삼전도에서 홍타이지(중국 청나라의 제2대 황제)에게 항복의 예로 삼배구고두례(三拜九叩頭禮)를 하는 것으로 끝났다. 하지만 전쟁의 후유증은 심각했다. 특히나 사대부 가의 여인이고, 민간인이고 간에 여자들의 수난이 극심했다. 그나마 조선 땅에서의 수난은 행운이었다. 일부는 공녀라는 이름으로 청나라로 끌려갔다. 하기야 나라의 국본(國本)인 소현세자(昭顯世子: 인조의 맏아들)도 끌려가고 왕자도 끌려가고 세자빈 강 씨도 무력하게 끌려가는 마당에 어느 누가 반항할 수가 있었을까? 그 누구 없이 끌려간 여인들은 오랑캐(청나라)가 원하는 대로 밤이면 밤마다 상대와는 상관없이 수청을 들어야만 했다. 이후 어느 정도 정세가 안정되자 끌려갔던 여인들이 다시 고향으로 돌아왔다. 끌려갈 때와는 달리 환향녀(還鄕女, 즉 화냥년)란 달갑지 않은 꼬리표를 달아 돌아왔다. 그때 오랑캐의 씨까지 뱃속에 담아 돌아온 그녀들이 아기를 낳으니 아비 없는 자식이란 뜻에서 ‘호래자식(胡奴子息:호로자식)’이다. 일이 이 지경에 이르고 보니 사대부 가의 아낙네들은 너나없이 정조를 잃은 여인이라 하여 이혼을 종용받기에 이른다. 임금과 조정 신료들이 당파싸움에 찌들어 나약하게 국가를 이끈 잘못은 간 곳없고 정조를 잃은 부인과는 이혼만이 답이란다. 할 수 없이 조정에서는 한양의 북쪽, 홍제천에서 몸을 씻으면 과거를 깨끗하게 지울 수 있다고 했건만 그것은 그저 허울 좋은 명분이었다.

그런 가운데 과거에 모였던 사대부 가의 여인들이 한자리에 모였다. 전날처럼 다과상을 마주하고 앉았건만 찻잔을 드는 여인들은 고개를 들 수가 없었다. 전날 하나같이 죽겠다고 자신만만하던 자신들은 이유같지 않은 변명을 끌어다가 목숨을 부지했건만 미소를 띄워 앉았던, 당해보지 않아서 모르겠다던 여인만 자리를 비운 때문이다. 들려오는 소문에 의하면 청군이 방으로 들어서는 순간 벌써 은장도(銀粧刀)을 빼 들었고 덮치는 순간 한 치의 망설임도 없이 목을 찔렀다는 것이다. 부끄러움에 눈물짓는 것인지 차를 음미하는 것인지 훌쩍이는 소리만 방안에 가득하다.

“그렇다고 모든 여인이 그 지경에 이르러서 목숨을 끊는다면 세상에 살아남을 여자가 어디 있게!”를 위안으로 삼는다지만 성현의 말씀을 배워 익힌 사람으로서 고모는 최소한 죽은 여인처럼 언행일치의, 지조가 있는 삶을 살아야겠다는 생각이었다.

그로부터 보름이나 지났을까? 아침상을 마주한 고모는 속이 메스꺼움을 느꼈다. 체증이 있는 듯 가슴이 답답했다. 쉰 김치로 젓가락이 가는데 역겨움을 느껴 욕지기가 일자 자신도 모르게 주먹으로 가슴을 치는데 고모부와 겸상을 하고 있던 시어머니가

“아가야 왜? 어디 몸이 불편하기라도 하더냐?” 걱정스러운 표정을 짓는데 밥상 앞에서 이 무슨 불미스러운 행동인가 싶어서 괜히 송구하고 죄스럽다. 그저 변명이라고 한다는 것이

“예~ 어머님 나물을 무치다가 간을 본다며 두어 점을 맛본다는 것이 급해서 얹혔나 봅니다. 죄송합니다” 다소곳하게 고개를 숙일 적에

“아니! 아니다. 오냐! 어서 먹던 밥이나 마저 먹고 몸조심하거라!” 시어머니의 말을 끝으로 일단락이라 생각한 고모였다. 하지만 그것으로 끝이 아니었다. 조식이 끝나 행랑어멈을 도와 설거지 중에 불현듯 시어머니가 부엌을 찾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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