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63)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63)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4.04.17 12:06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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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다렸다는 듯 뽀르르 달려 고모의 품을 파고드는데 새벽닭이 울었다고 했다
아가야 앞으로 모나서 못 생기고, 병들어 썩은 과일일랑은 몽땅 내게 다오!
있으나 마나 한 그 돈을 들어 절박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22일 한가위를 만 하루 지난 보름달이, 디아크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꿈속에서 고모는 어느 자애로운 보살님을 만나고 있었다. 후광이 금빛으로 찬란하게 빛나는 보살은 천의무봉(天衣無縫)에 걸맞게 백옥같이 새하얀 옥양목 차림이다. 아련한 자운(紫雲)이 은은하게 몸을 감싸는 중에 어린 동자의 손을 잡고는 생시처럼 서 있었다. 감히 범접할 수 없는 기운을 느낀 고모가 취한 듯 삼배를 올려 맞이하고 보니 생경한 듯도 하고 어디선가 뵌 듯 기시감이 느껴진다. 기억을 더듬어 속으로 누굴까? 어느 귀한 분이 지지리도 못난 나를 찾아왔을까? 생각 중인데

“그래 저승에서 감언이설에 거짓말로 죄를 짓고는 이승으로 귀양 와 인간 세상에서 살아보니 사는 재미가 어떠냐?” 묻는데 분명 귀에 익은 목소리다. 문득 생각나는 바가 있어서

“예~ 보살님 소녀는 지난날 지은 업보에 사죄를 받고자 달게 살고 있사옵니다. 한데 죄 많은 소녀를 대신하여 저의 어미가 벌을 받은 것만 같아 늘 송구스럽기만 합니다” 허리를 깊숙이 숙여 합장이다.

“오냐! 그리 알면, 너는 그만하면 얼추 되었는데 이놈이 철이 없더구나! 고생하는 김에 내 너에게 이 아이를 맡기노니 잘 가르쳐 보아라!” 옆에선 동자의 손을 놓자 아이는 기다렸다는 듯 뽀르르 달려 고모의 품을 파고드는데 새벽닭이 울었다고 했다. 이야기가 끝나자 시어머니는

“오냐~ 오냐 그랬구나! 네 너의 헛구역질에 문득 느끼는 바가 있어 의원을 찾았는데 이런 꿈같은 광영이! 새아가 네 꿈 대로라면 천상의 어느 존귀한 분이 죄를 지어 인간 세상으로 유배를 왔는지 모르겠거니와 참말 귀한 분이 우리 가문으로 온 것 같구나! 이제 우리 집안도 너로 인해 활짝 피어나 영광이 깃들려나 보다. 고맙구나! 오늘로써 이 시어미가 네 시아버지 앞에서 머리를 들 수 있겠구나! 조상님 전에 물 한 대접을 떳떳하게 떠 놓을 수 있겠구나!” 눈물을 보이며 놓았던 손을 재차 잡아서 쓰다듬는다. 부끄럽다며 손을 빼려는 순간 문득 고모는 세상 악녀가 되고픈 생각이 들었다.

속으로 피식 웃는 고모는 오늘의 임신 사실을 고모부가 알면 어떤 표정을 지을까 은근 궁금했다. 시큰둥한 표정일까? 아니면 좋아서 입이 함지박만큼 벌어질까?, 기뻐서 천둥벌거숭이로 날뛸까? 가슴 가득 포근히 안아 입이라도 맞추어 줄까? ‘둥개둥개’ 업고는 덩실덩실 춤이라도 출까? 그러면 그때 나는 무엇을 먹고 싶고 무엇을 갖고 싶다며 앙탈을 부려 욕심껏 말할까? 한데 재물이야 흔해 빠져서 이거다 저거다 하여 고르고 골라 보아도 별 재미가 없을 것이고, 호호호, 그렇지 겨울이 오는 이 계절에 수박이 죽도록 먹고 싶다고나 할까? 아니면 딸기가 먹고 싶다고 할까? 그러면 그것은 너무했나? 하다못해 오밤중에 군밤이라도 먹고 싶다 해야지! 그렇지 날이면 날마다 오는 것도 아닐 진데 구미호로, 불여우로, 꼬리가 아홉 달린 여우의 변신으로 상(商)나라 마지막 임금 주(紂)의 총애를 받았다던, 요부의 대명사인 달기(妲己)가 되어 마음껏 알랑방귀를 뀌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고모가 혼자 생각에 빠져 미소지을 때

“애~ 아가야~ 새아가야 너는 시방 무엇이 젤로 먹고 싶니? 뭘 먹고 싶은 것은 없니? 이 철에 수박이나 딸기, 그런 거랑은 말고!” 속에 들어갔다 나온 듯 시어머니가 묻는다.

“아~ 아니에요! 저는 단지 군, 아니에요! 이제 곧 점심인데 뭘요!”

“그래도 먹고 싶은 것이 있을 게 아니냐? 뭐라도 먹고 싶은 것이 있으면 이 시어미에게 사양치 말고 말해봐라! 곧장 겨울이라 봄이나 여름 과일로 앵두나 살구, 수박, 참외 따위는 어렵더라도 밤이나 고구마, 감은 언제든지 구해주마! 아니면 얼음이라도 깨어 산모에 좋다는 잉어라도 잡아다 고아 줄까? 너를 위하고 손자를 위한 일에 그 정도야 문제없다”

“아니에요! 어머님 그런 것이 아니라!”

“그리고 아가야 너는 앞으로 모가 나고, 삐뚤어져 못 생기고, 병들어 썩은 과일일랑은 몽땅 내게로 다오! 당분간은 좋은 것들로만 보고, 좋은 말만 듣고, 예쁘고 잘 익은 과일만 먹도록 해라! 그리고 혹 내 신랑, 그 애가 조금이라도 싫은 소리를 하걸랑 곧장 이 시어미에게 말을 해다오! 그건 고자질이 아니다. 그러면 내 그간 쌓인 분풀이도 할 겸, 겸사겸사해서 이참에 아주 혼꾸멍을 낼 참이니라!”

“예~ 어머님! 한데 당신 아드님은 아직, 아니에요!” 기어드는 목소리로 대답을 한 고모는 속으로 기뻤다. 고모부가 시어미께 혼나는 장면이 머릿속에서 상상으로 우습기도 하고, 이제 시어머니가 확실한 내 편이라는 것에서 오는 행복감으로 마음이 든든했다.

“그런데 애~ 새아가야! 너는 그간 무슨 재화가 있어서 동네의 어려운 이웃을 남몰래 도왔나 그래!” 고모를 쳐다볼 때

“어머님께서도 아셨어요! 어떻게 그 일을!” 하는데 시어머니가 되어 그 정도도 모를까 하는 표정에 환하게 웃는다. 앉은 자리에서 능히 천 리를 본다는 표정에 자애로운 미소다.

그동안 마을의 어려운 이웃을 음으로 양으로 도운 사람은 다름 아닌 고모였다. 아니 고모와 행랑아범의 합작품이었다. 소식과 실행은 행랑아범이 술청을 드나들어 책임을 졌고, 재화는 고모가 마련했다. 고모가 내놓은 재화는 할머니에서 나온 것과 시집으로 들어올 때 혼수 장만에 보태라고 보내온 돈 중 쓰고 남은 일부였다. 거기에 가끔 시댁에서 내어주는 용돈으로 충당되었다.

살아생전 할머니와 고모가 만나면 늘 돈타령으로 티격태격했다. 처음에는 철이 없어 할머니가 주는 대로 넙죽넙죽 받아왔다. 안 주면 섭섭해서 달라고 조를 지경이었다. 한데 얼마를 지나자 이건 아니다 싶어 거부의 몸짓을 보였다. 그렇게 고모가 거부의 몸짓을 보이자 할머니는 더 없는 슬픈 표정을 지었다. 결국에 고모는 할머니가 원하는 대로 따를 수밖에 없었다. 뭇사람들의 손가락질을 알면서도 길지 않은 생애, 그간 할머니의 마음이라도 편하게 묵묵히 따를 수밖에 없었다. 혼수를 장만하고 남은 돈만 해도 그랬다. 감골댁은 후일 집을 찾는데 보탬을 하라고 부추였지만 살날도 얼마 남지 않았는데 그까짓 집이 다 뭐냐며 기어이 가마에 넣었다. 게다가 어느 날부터 시어머니는 생각지도 않게 용돈을 넉넉하게 보내온 것이 밑천이 되었다.

시집으로 들어온 고모는 그동안 돈이란 개념을 까맣게 잊고 지냈다. 화려한 치장으로 옷이 넘쳐나 몸이 영화스럽고, 삼시 세끼 밥 굶을 일이 없는 데는 오히려 그것은 당연했다. 게다가 방이 만장으로 넓다 보니 돈이 필요하다는 사실을 까맣게 모르고 살았다. 그저 생기는 데로 문갑에 넣어 있는 듯 없는 듯 보관했을 뿐이었다. 한데 고모에게 있으나 마나 한 그 돈을 들어 절박한 사람들이 의외로 많다는 사실을 알았다. 고모에게는 하등 소용없는 재화가 누군가에게 있어서는 생명줄과 같다는 것을 알았을 때 가만히 있을 수가 없었다. 살아생전 할머니는 고모를 두고 적선을 하는 등 덕을 쌓으라 했다. 홍윤성의 예를 들어가며 덕적을 쌓으라고 했다. 그러는 중에 진실한 복이 제 알아 찾아올 거라 했다. 그런데 쥐도 새도 모르게 했다고 생각했는데 시어머니는 손금을 보듯 알고 있다. 어쭙잖게 흉내 낸 그간의 일들이 부끄러웠다.

“어머님! 저~ 저는 단지!” 말끝을 흐리는데

“하이고 이것아 누구는 바보 같아서 하고 싶어도 못한 일을 했는데! 장한 내 며느린데!” 끌어안아 등을 쓰다듬는다.

사실 시어머니도 선행이란 것을 하고 싶었다. 하지만 방법을 몰랐다. 무얼 어떻게 해야 하는지를 몰랐다. 뒷방늙은이에 까막눈이라서가 아니었다. 막연하니 세상 물정에 어둡다 보니 영감의 선행을 노망난 늦바람이라 오해, 짓지 않아도 될 악업을 덤으로 지었다. 한데 고모의 선행을 행랑어멈으로부터 전해 듣고는 봉사가 눈을 뜨는 기분이었다. 선행은 드러나지 않게 저렇게 하는가 싶었다. 그런 까닭에 고모의 용돈도 짐짓 모르는 듯 두둑하게 올렸다. 그런 와중에 고모가 모르는 사실이 하나 있었다. 행랑어멈의 중간다리 역할이다. 지금껏 시어머니와 행랑어멈이 주종 관계였다면 고모의 선행이 시작되고 나서부터는 지기 사이로 발전해가고 있었다. 어느 날 시어머니가 행랑어멈을 부른 자리에서

“자네는 내가 그렇게 무섭고 싫은가? 어째 나만 만나면 송충이를 만난 듯 징그러운 벌레를 보는 듯 도망갈 궁리부터 하는가? 야속하게!” 두 손을 다정스럽게 잡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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