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진맥’이란 말만 들어도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지겹다
생색은 자네가 내도 무방하네만 계산은 확실하게 하게!
“애야~ 새아가! 하던 설거질랑은 행랑어멈에게 맡기고 너는 그만 나랑 같이 외출이나 좀 하자!” 채비하고 나오란다.
“어디를 가시게요?” 묻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고 방으로 돌아와 나들이옷으로 차려입고는 덧문을 여는데 시어머니는 벌써 마당 가장자리에서 서성인다. 늦었다 싶어 조급한 마음의 고모가 대청으로 나오기가 무섭게 종종걸음으로 서두르기 시작이다.
“애~ 아가야 넘어질까 보다. 아니! 아니 바쁘니라! 천천히! 그래, 천천히 해도 되느리라! 바쁘지가 않으리라!” 팔까지 내두르며 저지한다. 하지만 손윗사람을, 그것도 며느리가 시어머니를 기다리게 할 수는 없는 노릇이다. 급하게 당초(唐椒:가짓과에 속한 한해살이풀) 문양이 곱게도 수놓아져 붉은색이 은은하게 감도는 당혜를 신고는 마당으로 내려서는데 시어머니가 빤히 바라다보고는 헤설픈 미소를 짓는다.
그즈음 고모의 몸은 알맞게 살이 올라 있었다. 규칙적인 생활에 적당한 운동을 곁들인 보상 같은 것이었다. 말라깽이 몸이 보기에도 참하게 살이 붙자 미모가 한결 돋보인다. 이는 원만한 부부 사이도 한몫 거든 듯싶다. 가끔 아들과 며느리의 사랑을 두고 질투심이 일 정도였으니 그 모습이 오죽 아름다웠을까? 고모가 방문을 나와 마당으로 내려서는 모습을 보는 시어머니는 속으로
“그 조건 좋다는 일등 신붓감을 들이대도 눈길 한번 주지 않은 이유가 따로 있었던 게야! 지금에 이르고 보니 제 놈은 심미안으로 나름대로 여자를 보는 눈이 있었어!” 속으로 흡족하게 생각하고 있었다.
이윽고 고모가 마당으로 내려서자 시어머니가 대문을 나서서 앞장을 선다. 그런 가운데 고모는 고개를 숙여 발걸음도 가볍게 사뿐사뿐 뒤를 밟는다. 고부지간이 앞뒤로 나란히 길을 나서자 진기한 풍경이라며 동네 사람들은 눈길을 떼지 못한다. 시어머니를 보고는 깍듯이 인사를 건넨 뒤 고모를 보고는 입을 내민다. 궁금하다는 몸짓으로 움칠움칠 어디를 가느냐며 손을 흔든다. 하지만 고모 자신도 어디를 가는지를 몰라 그저 눈만 끔벅거려 답례를 보낼 뿐이었다. 한데 시어머니의 걸음이 한정없이 느리다. 고모는 시어머니의 발걸음이 어째서 이렇게 느린지 그저 답답하기만 할 뿐이었다.
고모의 조바심도 잠시, 고부가 동행하여 한참을 걸어 도착한 곳은 집에서 얼마 떨어지지 않은 의원이었다. 고모가 의아한 눈길로 시어머니를 쳐다보건만 시어머니는 아랑곳하지 않고는 마당을 가로지른다. 노란 모과가 올망졸망 매달린 나무 밑을 지나더니
“박 의원 집에 있는가?” 성큼 대청마루로 올라선다. 때를 같이하여 방문을 연 의원이 아닌 밤중에 홍두깨를 본 듯 놀란 표정에
“아니 이게 누구십니까? 마님이 아니 십니까? 마님께서 이른 이 시간에 누추한 누옥인 저의 집으로 어인 발걸음이신지요?!” 급하게 대청마루로 나오더니 방석 두 개를 가져와 앉기를 권한다. 시어머니와 고모가 나란히 앉자 시어머니와 의원 간에 간단한 수인사가 끝나기 바쁘게
“박 의원 여기 이 애가 우리 집 며느린데 몸이 약해서 보약이냐 한재 지어 먹일까 하네만!” 고모를 돌아보는데 고모는 너무 뜻밖이라 반박은 언감생심으로 우물쭈물 눈치 보기다.
“그럼 용으로 한재, 아니면 십전대보탕으로 한재 지어 올릴갑쏘!”
“용이고 십전대보, 그 뭐고 간에 먼저 진맥부터 해 보고!” 시어머니의 요구에 따라 의원은 고모를 보고 손목을 달란다. 고모는 이런 일에는 진작부터 달인이다. ‘진맥’이란 말만 들어도 신물이 올라올 정도로 지겹다. 하지만 근래, 수년에 걸쳐서는 처음 듣는 말이라 생소한 듯
“아~ 예~ 손목!” 의원 앞으로 소매를 걷고는 팔을 내밀어 손목을 맡겼다. 그러자 의원은 기다렸다는 듯 손목에 손가락을 올려 이리저리 맥을 찾는가 싶더니 이내 손길을 멈추고는 눈은 지그시 감는다. 그러기를 몇 차례, 얼마나 시간이 흘렀을까? 여전히 미심쩍은 듯 고모의 손목에서 손가락을 꼼지락거려 맥을 짚는 의원이다. 그러다가 또 잠시 멈추어 지그시 눌러서 살핀다. 덥지 않은 날씨에도 이마로 땀이 송골송골 맺히는 것으로 보아 진력을 기울이는 모양이다. 이윽고 일각이나 지나 눈을 뜬 의원이 아쉽다는 듯 쓴웃음과 함께
“마님! 마님의 뜻에 따라 소인이 며느님을 진맥한 결과 며느님은 현재 보약을 잡수실 수가 없는 몸 상태입니다” 상기된 표정인데 시어머니는 그것 보아라! 하는 표정으로
“아~ 어째서인가?”
“예~ 시방 제가 며느님을 찬찬히 진맥한 결과 복중에 태기가 느껴집니다. 그런 까닭에 차후에는 모르겠지만 지금으로서는 안정이 최우선입니다.” 축하를 드린다며 고개를 숙여 가며 간단한 예를 취한다.
“박 의원 그 말이 참말인가?” 다짐을 받는 시어머니의 물음에 의원은 틀림이 없단다. 두 사람의 대화 중에 임신이란 말을 듣는 고모는 흡사 꿈을 꾸는 듯 황홀하다. 그런 가운데 몸을 일으키던 시어머니가 의원에서 돈을 건네며
“그럼 자네가 알아서 후일 산모에 좋다는 약재로 한재 지어서 집으로 보내주게!” 고모를 돌아보며 가자고 한다. 그때 돈을 받아 헤아리던 의원이
“아니 마님! 한약 한재 값으로 웬 돈을 이렇게나 많이!” 뜨악한 표정으로 시어머니를 쳐다보는데
“많은가? 많아도 하여간 잔돈은 필요 없네! 그렇다고 자네가 꿀꺽하면 못 쓰네! 남는 돈일랑은 자네가 보관해 두었다가 동네 사람 중에 혹여 돈이 없다거나 가진 돈이 부족한 환자가 오거든 보태 쓰시게나! 아~ 내가 그랬다고 말하지는 말게! 생색은 자네가 내도 무방하네만 계산은 확실히 하게!” 자리를 털고는 대청마루를 내려선다.
집으로 돌아온 고모는 시어머니의 말을 좇아 안방으로 자리하고 앉았다. 곧바로 행랑어멈이 다과상을 들고는 따라 들어왔다. 다과상을 마주한 시어머니는 다과상을 한쪽으로 밀쳐내고는 무릎걸음으로 고모 앞으로 다가들더니 두 손을 꼭 잡고는
“애~ 새아가 장하구나! 용하구나! 네 시아버지 예언대로 우리 집안에 들어와 네가 큰일을 해냈구나!” 손등을 어루만져가며 연신 감사하고 고맙단다. 집안의 광영(光榮)이자 영광(榮光)이라며 자나 깨나 몸조심을 하란다. 그런 중에 빗자루질도 멈출 수 없냐고 했다. 사실 고모는 그동안 처음 싸리비를 만든 다음 날부터 지금까지 하루도 빠짐없이 마당을 쓸었다. 비가 오나 눈이 오나 한결같이 이어지고 있었다. 한데 임신을 하자 그조차 시어머니 입장에선 노파심이 일어 걱정이란다. 임신 초기라 각별하게 조심이 된다며 은근한 청이다. 고모도 웬만하면 시어머니의 청을 들어주고 싶지만 그일 마저 멈춘다면 산송장이나 다를 바 없다는 생각에
“어머님 제가 알아서 조심스럽게, 천천히 하면 안 될까요?” 할 때 시어머니는 할 수 없다는 듯
“오냐! 네 고집을 누가 꺾을 소냐!” 반승낙이다. 그러면서 혹 태몽 같은 것을 꾸지 않았냐며 묻는다. 다른 사람들은 모르겠거니와 집안에서 내 서방과 이 시어머니 정도는 알아도 무방하다며 조른다. 그러고 보니 얼마 전, 그러니까 할머니의 유품을 확인하고는 더 없는 모정을 가슴으로 느끼던 날, 그날 밤 고모는 한 자락 꿈길을 달렸다. 그간 수를 헤아릴 수 없을 만큼 많은 꿈 중에 유독 잊어버릴 수 없는 꿈처럼, 날이 갈수록 또렷해지는 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