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41)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41)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11.06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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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응~ 그라지뭐! 말 잘 듣는 아이처럼 눈을 감는데 오른손이 두둥실 공중으로 떠오른다. 다짜고짜 영희의 손길에 이끌려 무람없이 앞으로 향한다는 느낌으로 매끄러운 살결이 떨리는 손길 끝에서 솜털처럼 부드럽다. 올리브 기름 위를 걷는 듯 미끄러진다. 눈앞으로 오색무늬의 나비가 무한정 날아다니는 기분으로 황홀경이다. 왼쪽 볼? 아니면 오른쪽 볼의 볼우물인가? 무한정 두근거리는 가슴은 나 몰라라 비단결을 타는 듯 가볍게 흘러내린다. 상상인 듯 꿈결인 듯 아득한데 촉촉하게 젖은 영희의 목소리가 귓전에서 가만가만 머문다.

“저기 저~ 처~ 철수~ 아니 오~ 저~ 저기 오빠야!”

“응~”

“그동안 나에게 화가 많이 났지?”

“응~ 아~ 아니!”

“인자~ 그러니까~ 그게~ 내가 만지게 해줬으니까 그만 화 풀어! 응~ 오빠야~!”

“...!”

“아직도 화가 안 풀렸어? 성에 아니 차서 그래?”

“...”

“오빠와 나 사이에 별것도 아닌 일에 그동안 내가 너무 심통 나게 굴었지! 앞으로는 절대 안 그럴 게, 미안해!, 그러니까 이제는 그만 화 풀어? 으~ 응 오빠야!”

“응”

“응~ 또 응~ 이다. 그라고 저기 저~ 오빠야~ 내~ 볼! 그러니까 내가 느껴져?”

“응”

“그러면 됐어~ 으~ 글구 오늘 이후 얼라 맨치로 때를 쓰면 안 돼! 알았지! 그때는 때려 줄 거야! 아~ 아니 꼬집어 버릴거야! 알았지 오~ 빠야!”

“...! 응~”

“그런데 오늘 보니 오빠는 말 잘 듣는 아기 같아, 꼭 바보 같아! 이래도 응 저래도 응 매양 응~ 응~ 대답이 뭐 그래! 뜨뜻미지근하게!”

“응”

“에~게게 오빠는 또 ‘응’ 이다. 하여간 오늘 이 일은, 오빠가 내 볼을 만졌다는 사실은, 이 사실은 절대 비밀이야!” 잠시 뜸을 들이는가 싶더니

“아무에게도 이야기하면 안 돼 알았지! 절대 비~, 우리 둘만 아는 비밀로 해야 해! 알았지! 종만이도 원철이도 특히 말 많은 병식이에게는 절대로!”

“응~”

“무덤까지 비밀이야! 알았지러! 응~ 오빠야!”

“으~ 응!”

“만약 오빠가 입을 뻥긋 잘못 놀려 오늘의 이 비밀이 들통나 동네로 펴지면 그때는, 그때는 나 오빠를 죽여버릴거야! 진짜야!”

“아~ 으~ 응!”

“절대 입 밖에 내지 않겠다고 나랑 손가락 걸어 약속할 수 있어!”

“응~”

“아~니! 아니야! 마약 일이 그 지경이면, 그때는 울 아버지에게 다리-몽디 부러지기 전에, 엄마에게 매타작으로 맞아 죽기 전에 부끄럽고 창피해서라도 내가 꽉 죽어 버릴 거야!”

“뭐~ 뭐라고? 여~ 영희야 그건 안돼! 절대로 안돼!”

“안 되기는 뭐가~ 두말 세 말 필요 없이 내가 죽는다고! 알았어!” 그 어느 때보다 무서운 말에 가슴이 철렁, 눈을 뜨자 왼쪽 볼 위로 손을 겹쳐 잡은 영희가 도둑질 끝에 들킨 모양 화들짝 놀란 표정이다. 얼굴이라곤 화톳불처럼 벌겋게 달아올라 새실새실 수줍게 웃는다.

“아~ 아니 영희야 네가 왜 죽어~ 죽어도 내가 죽어야지! 내가 죽을 거야!” 도리질의 나에게 오른손 검지를 길게 뻗어서는 입술을 지긋이 내리눌러

“아~ 이! 오빠야! 부끄러워! 오빠야 왜 그래! 오빠~ 빨리 눈감아~ 빨리! 오빠는 내 허락 없이 언제 눈 뜨랬어!” 커다란 눈이 꿈길을 헤매는 듯 고혹적으로 껌벅인다. 얼굴이라도 새겨 보려는 듯 멀뚱멀뚱 쳐다보고 있다. 수줍다고 고개를 숙였다가 드는데 목덜미가 온통 살구색으로 가슴이 두근거려 방망이질이다.

“쉿! 누가 볼라!” 사방을 두리번거려가며 살피는데 여전히 꼭 잡은 손은 얼굴에 붙이고는 비 맞은 중처럼 중얼중얼, 실없이 혼잣말이다.

“비밀이야! 비밀!” 말끝마다 비밀을 강조하는 모양새가 이상하다. 상기된 표정에서 비밀은 더 이상 비밀이 아닌 듯 여겨진다. 강한 부정은 긍정이라고, 볼우물을 지어가며 해사하게 웃는 영희는 지금 당장에라도 소문을 퍼트려 달라 안달 난 몸짓만 같다. 멘지락(‘부드럽다’의 제주 방언)한 숙자는 입이 무거워 있으나 없으나, 촉새 입의 여옥에게는 당장이라도 귀띔하리라 속삭이는 듯하다, 빙충맞은 종만, 덜렁이 원철은 딴에는 의리파라 임금님 귀는 당나귀 귀라 그렇다 치고 오지랖이 병식에게는 비밀이라 입다짐으로 속삭이면 입이 근질근질, 소문이 소문으로 날개를 달리라 부추기는 형상이다. 그간 음으로 양으로 받았던 설움을 풀라고 등을 떠미는 모양새다. 이렇게 된 마당에 풋내기의 사랑도 아름다운 사랑이라고, 한때나마 가슴 두근거려 설레는 밀애를, 화양연화로 무지갯빛의 아름다운 봄날에 있었던 애틋한 로맨스를 비밀로 넘기기엔 억울하다는 표정이 역력하다.

하여간 틀어진 영희의 마음을 돌려 환심을 사려면 눈깔사탕이 최고다. 그러자면 호주머니 검사는 필수다. 간혹 뚫어진 줄 모르고 주전부리 등을 넣었다가 고샅에 흘리는 등 잃어버리곤 낭패한 경우가 허다했기 때문이었다. 소도 비빌 언덕이 있어야 비빈다고, 사탕이 잘 있는지 확인차 내려다보는 호주머니가 불룩하다. 그동안 먹고 싶다는 달콤한 유혹을 얼마나 억눌러서 참아왔던가? 혼자 생각에도 스스로 대견하다 칭찬하고 싶다. 행여 동생에게 들킬까 봐 노심초사한 날은 또 몇 날 며칠이던가? 호주머니가 불거진 만큼 입도 헤벌쭉하다. 벌써 영희의 볼우물을 훔쳐보는 듯 가슴이 두 근 반 세 근 반으로 이상야릇하다. 그렇게 혼자만의 상상의 나래 속에 행복한 꿈에 취해 있을 때다.

“애~ 철수야 영희어매가 소금 안 주더냐? 영희어매께! 하여튼 소금 받았으면 얼른 와서 밥묵어 야제!” 희끗희끗한 여명 속에서 아른하다. 영희어머니가 소금을! 엄마는 그 사실을 어떻게 알았을까? 순간 머릿속을 번개처럼 스쳐서 지나가는 무언가가 있었다. 새벽녘 이불에 지도를 그려 낭패에 빠졌을 때다.

“아이고 동네 창피해라! 다 큰기 이게 뭣 하는 짓인고?” 방문이 부서지도록 박차 밖을 나간 어머니는 대문간서 누군가와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었다. 그 자리에 영희어머니도 있는 듯도 했다. 무언가를 빌리려 왔다고 하는 듯도 했다. 그렇게 헤어지는가 싶었는데 어머니가

“어떻게 고등어는? 괜찮았어?” 묻는다. 그러면서 사족처럼 잠시 들렸다는 고모는 점심을 한 끼에 바쁘다며 부랴부랴 돌아갔다는 것이다. 그때 어머니는 액씨(아가씨의 경상도 방언)가 하도 서두르는 통에 두서가 없어 영희엄마에게 급하게 꾸었던 돈을 갚는다고 하는 것도 같았다.

그럼 오늘 아침 온 동네가 비리도록 고등어 익어가는 냄새가 고모 때문에! 세상에 없는 둘도 없는 짠순이며 깍쟁이 고모가 고등어를 사 오다니! 이거야말로 해가 서쪽에서 뜰 대사건이다. 삶의 기본을 도외시한 것이지, 아니면 애당초 숙맥인지, 지금껏 고모는 시집을 간 6~7여 년을 걸치는 동안 친정을 십여 차례 이상 들락거려도 정성이라고 과자부스러기조차 한 조각 사 들고 온 적이 없다. 그런 고모가 고등어를 한 손도 아니고 세손씩이나 사서 오다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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