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35)
[정월 대보름 이야기] '코로나19'로 잃어버린 정월 대보름, 내년에는 꼭 찾고 싶다(135)
  • 이원선 기자
  • 승인 2023.09.25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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눈이 있으며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요, 귀는 달렸으나 장식으로 귀머거린기여!
치맛자락에 얼굴을 가렸다가는 빼꼼 내미는데 까무잡잡한 얼굴이 벌겋게 검붉다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개미와 거미를 거쳐 산과 개울을 송두리째 옮겨 놓은 기분이다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9월 10일, 8월 한가위를 맞아 블루문의 보름 달이, 범어동 아파트 위로 떠오르고 있다(2장 다중 촬영). 이원선 기자

“아니~ 아니야! 이 아줌마가 그만 일에 뭔 그런 비하에 자책을, 야박한 소리를! 자네를 자네가 몰라 그렇지 얼마나 예쁘고 매력적인데! 그리고 자네가 모르는 것은 어쩌면 당연하지! 그 어른의 당부~ 당부가 워낙에 곡진한 탓에 여기 있는 모두는 입도 뻥긋 못하지! 알다시피 우리도 자네와 마찬가지, 그 어른에게 있어서는 용서받지 못할 죄인이잖아! 빚이 산더미잖아! 게다가 자네가 알면 자존심이 상한다며 절대 비밀로 해 달라는데 어떻게!”

“참말로 우리 어머님은? 나는 그것도 모르고! 그런데 우리는 왜? 그 세월 그때, 그 날수 동안 왜 그랬을까요? 미치지 않고서야, 악마에게 빙의가 되지 않고서야 어째 그랬을까요? 지우개로 지울 수만 지우고 싶고, 칼로 도려서 태워 버릴 수만 있다면, 에~고, 그러고 보면 우리 어머님은 분명 보살의 현신만 같지요?” 영천댁의 눈시울은 그새 붉어지고 있었다.

“아무려면 두말하면 잔소리지! 그러고 보면 여기 모두는 사람의 형상에 눈은 있건만 보지 못하는 청맹과니에 귀는 달렸으나 장식으로 귀머거린기여!” 김천댁의 말에 감골댁은 얼굴이 하얗게 질려

“아이고 성~ 님! 용서를 받지도, 빌지도 못했는데 어찌 그리도 바삐 가셨어요! 이 죄업을 다 어찌할까요! 아비지옥에 떨어진들 죄 닦음이 될까요? 평생을 발 씻어 빌어 본들 사윌까요? 이 년이 그저 돌로 쳐서 맞아 죽을 년입니다. 이 년이 성~님께 천하에 몹쓸 죄인입니다” 풀썩 땅바닥으로 무너진다. 벼락을 맞은 고목처럼 널브러진다. 동시에 김천댁을 비롯한 아낙네들도 무안으로 벌겋게 얼굴을 붉혀서는 낙엽이 지듯 고개를 떨군다. 스스로 죄를 인정으로 어깨를 들썩이는데 이삿짐을 다 꾸렸는지 화물차의 경적이 빵빵거려 울린다. 그날 이후 성주댁이 살던 집은 한 달여 남짓하게 비워진 후에야 먼 데서 찾아든 인기척으로 온기를 품는다.

국 뜬 자리가 스스로 메워지듯 빈자리는 무엇으로든 채워진다는 이치에 따라 영희네가 이사를 왔다. 이삿짐은 집이 좁다고 노래를 부르던 성주댁의 살림살이에 비해 잡동사니 같은 세간살이가 볼품이 없어 단출했다. 산을 넘고 재와 고개를 번갈아 넘어 두메산골의 막장에서 화전민으로 살았다는 영희 엄마는 집을 둘러본 뒤 대궐 같다며 쑥스러운 미소다. 나이 보다 겉늙어 보이는 얼굴 위로 자글자글하게 어우러진 주름살을 활짝 폈다. 동네 아낙네들이 호기심으로 지켜보는 가운데 세간살이를 주섬주섬 챙기는 영희네를 그냥 스쳐볼 때 어머니보다 두서너 살은 연상으로 보였다. 하지만 영희네는 어머니를 두고 무려 다섯 살이나 어리다며 형님이란 호칭 대신으로 “언니~언니!” 하며 어머니의 주위를 맴돌았다. 그런 영희네를 두고 어머니는 토박이 행세에 텃세를 느끼지 않을까 싶어 아침저녁으로 들여다보며 살뜰히 보살폈다. 동네를 휘둘러 듣기에도 거북한 소문이라도 들릴라치면 친동생처럼 여겨 적극 방어다.

이삿짐이 어느 정도 제자리를 잡아갈 즈음에 영희네는 동네를 두루두루 돌아 신출내기가 신고식을 한다며 미리 준비해온 이사 떡을 돌렸다. 콩고물에 수수를 갈아 해묵은 찹쌀가루를 섞어 시루에 쪘다며 맛도, 볼품도 없어 쑥스럽다며 헤설프게 웃었다. 그때 첫 대면으로 마주한 가스나 영희는 화전민의 딸답게 까무잡잡한 종아리와 구릿빛 얼굴을 하고 있었다. 그와는 달리 유난히 커다란 눈에 맑은 눈동자가 인상적이다. 수줍은 듯 커다란 눈을 깜박거리는 영희는 초면의 나를 보고는 데면데면은 뒷전으로 배시시 웃는 것으로 스스러움을 지웠다.

“응~ 저기! 오~ 오빠야~ 앞으로 오빠로 불러도 되지?” 제 어미의 치맛자락에 얼굴을 가렸다가 빼꼼 내미는데 까무잡잡한 얼굴이 붉어져 벌겋다. 그날 이후 영희는 풀 방구리에 쥐 드나들 듯 뻔질나게 우리 집을 드나들었다. 제 엄마가 올 때는 당연히 따라왔고, 그도 아니면 심부름이라며 일삼아 드나들었다. 그도 저도 아니면 심심해서 왔다며 턱 밑에 쪼그려 앉았다. 농사일에도 다르지가 않아 소 꼴을 벨라치면 일머리 저만치서 구름과 청풍을 친구 삼아 기다린다. 그런 와중에 영희는 제 엄마와 우리 엄마가 부르는 언니, 동생이라는 호칭을 두고 머리를 갸웃거리더니

“울 엄마의 언니가 철수엄마라면, 그러면 어떻게 되는 거야! 그럼 우리 사이는 이종사촌, 그럼 뭐야! 그러면 안 되는데!” 혼잣말로 쫑알거리더니 집을 쪼르르 달려갔다. 그리고 그날에 있었던 모녀지간의 대화를 영희 엄마가 영희 흉내를 내는데 기가 차서 말이 안 나올 지경이다. 대가리에 피도 안 마른 쪼그마한 가스나가 잔망스러운지 아니면 발칙한 것인지 제 엄마를 두고 한다는 말이

“엄마! 엄마는 철수 엄마를 두고 왜 언니라 불러! 실제 언니도 아니면서! 엄마가 철수엄마를 언니라고 부르면 철수랑 나랑은 뭐야! 나는 나중에 철수 각시가 되고 싶은데!” 느닷없이 앙탈을 부리는데 할 말이 없더란다. 생각 끝에

“야~ 이런 맹랑한 것을 보았나! 못난 지 아비를 닮았나? 마빠구에(‘마빡’의 방언)에 솜털 보송보송 조그마한 가스나 년이 진즉부터 사랑 타령에 각시 타령이라니! 너는 당최 누구를 닮아 그러니! 나 원 참 기가 차서! 그리고 이것아 아부지 엄마가 틀린 데 어떻게 이모고? 그냥 철수엄마가 나보다 나이가 많으니까 그렇게 부르는 거지!” 달랜 뒤에야 마음이 풀렸다는 것이다. 그날 이후 영희는 아예 색시를 자청, 하나부터 열까지 시시콜콜 간섭하려 들었다. 지푸라기라도 잡듯 기대어 오는 본심은 사람이 그리운 듯도 보였다. 첩첩산중에서 달랑 한집으로 화전을 일구어 살다 보니 대화상대가 없어 늘 외로웠던 모양이다. 구름과 바람, 새, 풀벌레를 친구로 삼다가 또래의 아이를 대하자 다른 세상을 만난 듯 들떠 보였다. 꿈인 양 싶고 아침에 눈을 뜰 때면 환상을 깰까 두려움에 갇혀 있는 듯도 보였다. 간혹

“이 가스나가 왜 이래 저리 가! 왜 자꾸 귀찮게 굴어!” 손이라도 내 저을라치면 곧바로 울음보를 터트렸다. 색시라며 의젓하게 굴 때와는 생판 다른 모습이다. 그러다가도

“아니야 안 귀찮아! 나랑 같이 소꿉놀이하며 놀자!” 하면 언제 울었냐는 듯 방그레 웃는 모습이 그저 천진난만하다. 그 모습을 빈정거려 핀잔을 주려고, 울다가 웃으면 배꼽이 털 난다고 놀릴라치면 주위를 세심하게 휘둘려 다짜고짜 옷을 훌러덩 걷어 희멀건 아랫배를 들어내고는

“피~ 오빠는 거짓말쟁이! 자~ 봐~ 잘 봐~ 봐! 오빠야 누가 불란다 얼른, 나 배꼽에 털 없지러! 어디에 털이 났게!” 득이 양양이다. 바보천치도 아니고 맹랑한 모습에 똥구멍에 털을 운운하지 않은 것을 불행 중 다행으로 여길 뿐이다. 그도 잠깐 혼자 생각에도 부끄러운지 겸연쩍게 웃으며 옷을 내리기 무섭게 온갖 이야기를 줄줄이 토해놓는다. 몇 번을 당하고 겪은 터라 귀가 따갑고 간지러워도 꾹 눌러 참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무슨 이야기가 그리도 많고 할 말이 많은지 듣고 들어도 영희의 조잘거림은 끝이 없었다. 구름으로부터 시작해서 메뚜기, 송사리, 송충이, 지렁이, 장수하늘소, 풍뎅이를 비롯하여 가만히 듣고 있노라면 개미와 거미를 거쳐 산과 개울을 송두리째 옮겨 놓은 기분이다. 어서 빨리 서산으로 해가 저물기를 바라는 수밖에는 달리 도리가 없었다. 이윽고 해가 저물어 땅거미가 밀려오면 아쉽다는 듯

“에~이! 할 이야기가 아직 가슴에 한가득 남았는데! 낼 또 올께!” 뒤돌아 뒤돌아보며 단발머리를 좌우로 달랑달랑, 촐랑촐랑 뛰어갔다. 그럴 때면 참 알분스런(‘영리하다’는 경북 방언) 가스나란 생각이 들었다. 그러던 어느 해 어느 봄날을 맞아서는 이마에 땀방울을 조롱조롱 매달아서는 숨을 헐떡헐떡 뛰어오더니 거머쥐었던 손을 눈앞으로 다짜고짜 내밀어 활짝 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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