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니어로 살아보니] 호칭 하나에도 기분이 우울해
[시니어로 살아보니] 호칭 하나에도 기분이 우울해
  • 허봉조 기자
  • 승인 2022.04.29 10:00
  • 댓글 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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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활동 참여와 많은 것을 스스로 해결하는 중년에게
'어르신, 할머니, 할아버지' 등의 호칭은 낯설고 불편하나
듣는 호칭의 변화에도 익숙해지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

동년배들이 모이면 절로 활기가 넘치게 된다. 통하는 것이 많아서다. 비슷한 시기에 비슷한 상황을 겪으며 살아가고 있으니, 잘 아는 사이가 아니라도 몇 마디 대화를 나누다보면 어느새 이웃처럼 가까워지기도 한다.

아파트 인근 근린공원 입구에서 동년배로 보이는 여성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허봉조 기자
아파트 주변 근린공원 입구에서 동년배로 보이는 여성들이 담소를 나누고 있다. 허봉조 기자

일전에 중년여성들의 참새방앗간 같은 여성복 가게에서 비슷한 연배의 단골손님들이 우연히 자리를 같이 하게 되었다. ‘코로나19’로 시작된 관심사는 정치와 경제, 취미와 손주 이야기 등으로 웃음꽃을 피우다가 한 여성이 남편 이야기를 꺼내면서 화제는 자연스럽게 ‘호칭’에 대한 것으로 넘어갔다.

좀처럼 화를 내지 않던 남편이 어느 날 행사에 갔다가 얼굴이 붉으락푸르락하여 들어왔더라고 했다. 사연인즉, 젊은 참가자로부터 ‘어르신’이라는 말을 듣고 기분이 엉망이 돼버렸다는 것. 남편은 연신 거울 앞을 서성이며, ‘내가 그렇게 늙어 보이느냐’는 실망감과 함께 한참 동안이나 가슴앓이를 하더라는 것이었다.

맞다, 맞아. 그 이야기가 미처 끝나기도 전에 일제히 공감을 드러내며 비슷한 내용의 사연들이 봇물 터지듯 이어졌다. 나이에 비해 유난히 앳돼 보이는 여성은 남편과 함께 어딜 다니기가 민망하다는 말도 했다. ‘옆에 있는 사람이 친정아버지냐? 시아버지냐?’라는 물음에 어이가 없다는 남편의 굳은 표정 앞에, 어떤 반응을 보여야 할지 당황스럽다는 것이었다.

이야기를 듣는 동안 연전의 비슷한 경험을 떠올리며, 혼자 웃지 않을 수 없었다.

모임에 가려고, 시내버스의 뒷좌석에 앉아 있었다. 젊은 새댁이 서너 살 정도의 아이를 데리고 버스에 올랐다. 옆 좌석이 비어있는 것을 발견하고, 아이의 등을 밀며 “할머니 옆으로 가”라고 했다. 아이는 방긋 웃으며 손장난을 걸어왔고, 장난을 받아주면서도 심드렁한 나의 심기를 알아차린 새댁이 바로 실수를 인정하는 반응을 보내왔다. “아줌마 좋아?”라고 말이다. 하지만 이미 뱉은 말을 주워 담을 수는 없는 노릇이 아닌가.

친구들을 만나자마자 상기된 얼굴로 고자질하듯 주절주절 사연을 털어놓으니, 초등학생 손주를 둔 친구가 깔깔 웃었다. ‘할머니가 맞다’고. 그리고 머리카락 염색을 하는 것만으로도 훨씬 젊게 보일 수 있다는 농담 같은 조언도 해주었다. 하지만 나는 늦은 결혼과 출산으로 이제 갓 대학을 졸업한 자녀를 두고 있으니, 할머니가 되기는 아직 먼 이야기인데.

은퇴 후 나이는 들었으나 정서적으로 노년이라는 평가를 바라는 사람은 많지 않다. 건망증을 비롯해 시력감퇴와 관절이 시큰거리는 등 하나둘 노화현상이 나타나기는 하나, 그것만으로 인생의 한 단계를 뛰어넘고 싶지는 않은 것이다. 오죽하면 지하철이나 버스에서 좌석 양보를 받지 않으려고 젊은이들과 시선을 외면하거나 그들처럼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듣는다고 할까.

그런 중년에게 ‘어르신’이라는 호칭은 낯설고 불편하기 그지없다. 아직은 사회활동에 지장이 없을 뿐 아니라, 많은 일을 스스로 해결할 수 있기 때문이다. 병원 등 공공장소에서 순서를 기다리다가 어르신이라는 호칭을 들으면 다시 돌아서고 싶을 정도라고 한다. 그중에도 나이가 훌쩍 많아 보이는 의료진이 환자를 향한 ‘어르신이나 어머님, 아버님’이라는 표현 앞에서는 더욱 기분이 얹잖아진다는 것이다.

유엔이 정한 평생연령 기준에는 ‘미성년자가 0~17세, 청년 18~65세, 중년 66~79세, 노년 80~99세이며, 100세 이상을 장수노인’이라고 하는 기사를 읽은 적이 있다. 하지만 호칭이란 연령 기준이나 듣는 사람의 입장보다는 다분히 부르는 사람의 시선에서 비롯된 것인 만큼 옳고 그름을 따지는 것은 어려운 일이다. 일부러 한 단계 낮춰서 부르는 것도 어색하다. 차라리 선생님이나 고객님 또는 이름 뒤에 ‘님’자만 붙여줘도 감사한 일이겠다.

익숙해진다는 것은 편리하고 고마운 일이다. 그러고 보니, 듣는 호칭의 변화에도 익숙해지는 연습과 훈련이 필요할 것 같다. 예상치 못했던 호칭을 처음 들을 때는 ‘나를 부른 것이 맞나’라는 의문에 적잖이 당황하거나 애써 무시하고 싶다가도, 반복해서 듣다보면 어느덧 자신의 위치를 객관적으로 인식하는 기회가 되기도 할 것이다.

그날의 단골고객들은 키득키득 웃으며, 그렇게 참새방앗간을 다녀갔다. 호칭 하나로 우울해지기도 하는 시니어로 살아보니, 육체적 근력도 중요하지만 흔들리지 않을 탄탄한 심리적 근력 또한 중요하다 싶다. 부르는 사람의 입장에서는, 느끼는 대로 불렀을 뿐인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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