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를 느끼다] 김기림의 '길'
[시를 느끼다] 김기림의 '길'
  • 권정숙 기자
  • 승인 2023.01.15 20:50
  • 댓글 0
이 기사를 공유합니다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한 김기림 시인 사진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에서 발췌한 김기림 시인 사진

 

 

​길 // 김기림

 

나의 소년 시절은 은빛 바다가 엿보이는 그 긴 언덕길을 어머니의 상여와 함께 꼬부라져 돌아갔다.

내 첫사랑도 그 길 위에서 조약돌처럼 집었다가 조약돌처럼 잃어버렸다.

그래서 나는 푸른 하늘빛에 혼자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주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그 강가에는 봄이, 여름이, 가을이, 겨울이 나의 나이와 함께 여러 번 댕겨갔다. 까마귀도 날아가고 두루미도 떠나간 다음에는 누런 모래둔과 그리고 어두운 내 마음이 남아서 몸서리쳤다. 그런 날은 항용 감기를 만나서 돌아와 앓았다.

​할아버지도 언제 낳은지를 모른다는 동구 밖 그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나는 지금도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 돌아오지 않는 계집애, 돌아오지 않는 이야기가 돌아올 것만 같아 멍하니 기다려본다. 그러면 어느새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

 

                  김기림 시집 [2021년 범우사]

 

김기림 시인이 동료인 신석정 시인과 함께 찍은 사진
김기림 시인이 동료인 신석정 시인과 함께 찍은 사진

 

김기림 시인은 1908년 함경북도 학성군에서 태어났다. 6.25 전쟁 때 납북되었기 때문에 타계에는 여러 가지 설이 있으나 모두가 분명하지 않다. 본명은 김인손, 편석촌(片石村)이라는 필명을 사용하였다. 서울 보성고보와 일본 니혼 대학을 거쳐 도호쿠 제국대학 영어영문과를 졸업했다. 1930년대 초 조선일보 기자로 활동하면서 문단에 등단했다.

김기림의 문학 활동은 창작과 평론 활동으로 크게 나누어진다. 문학 활동은 구인회에 가담한 1933년경부터 시작했으며 영미 주지주의와 이미지즘에 근거한 모더니즘 문학이론을 자신의 詩에 도입하여 우리나라에 소개한 것은 문학사적 공로로 꼽힌다. 해방 후에는 조선문학가동맹에 가담하여 대학교에서 영미문학을 강의하다 6.25 전쟁 때 납북되었다는데 납북인지 월북인지조차 분명치 않다. 저서로는 시집 <기상도>,<태양의 풍속>,<바다와 나비>,<새노래> 등과 수필집 <바다와 육체> 등이 있다.

이 詩는 산문시이기에 큰 어려움 없이 이해할 수 있을 것 같아서 詩에 대한 설명은 그다지 필요하지 않을 것 같다. 다만 요즘 쓰이지 않는 단어가 있지만 이 책에서는 친절하게도 요즘말로 바꾸어 쓰여 있다. 예를 들어 3연에 호저를 혼자라고 고쳐 썼다

딸 여섯을 낳은 뒤 낳은 귀한 아들이었지만 일곱 살에 어머니가 돌아가셨기에 모정에 대한 사무친 그리움이 그에게는 있었는지 어머니의 상여 이야기가 먼저 언급되고 있다. 어머니의 상여도 잃어버린 첫사랑도 모두 길 위에서 있었던 일이었다. 첫사랑을 조약돌에 비유해 길에서 주웠다가 길에서 잃어버렸다니 너무나 아름다운 표현인 것 같다.

3연에 ‘푸른 하늘빛에 혼자 때 없이 그 길을 넘어 강가로 내려갔다가도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서 돌아오곤 했다.’ 라고 했는데 푸른 하늘빛은 낮이라는 이야기일터이고 노을이라면 어두워질 무렵인데 아이가 하루 종일 강가에 있었다는 건 집에 의지할 사람이 없었다는 이야기가 아닐까. ‘노을에 함뿍 자줏빛으로 젖어’란 표현도 참 좋다.

4연에 봄이, 여름이 여러 번 댕겨갔다는 건 오랜 세월 그 강가를 배회했을 것으로 읽힌다. 때로는 가위에 눌린 듯 감기를 만나서 앓았다니 외로운 아이의 아픔에 가슴이 아릿하다.

마지막 연에서 늙은 버드나무 밑에서 돌아오지 않는 어머니와 조약돌 같은 첫사랑을 기다리고 있었다. 또 돌아오지 않는 지난날 정답고 행복한 가정의 추억을 다시 올 것 같은 마음에 기다리는 어린아이의 외로움이 손에 잡힐 듯하다. 마지막 행에 ‘어둠이 기어와서 내 뺨의 얼룩을 씻어준다’가 절창이다. 어둠은 갑자기 오지 않고 아주 천천히 오기에 기어온다는 표현을 썼을 것이고 뺨의 얼룩이란 눈물자국이 아닌가. 어둠이 씻어줄리 없지만 보이지 않게 가려주니 그렇게 표현한 것 같다. 소년기의 외로움과 아픔을 버무려 동화같이 아름다운 詩를 쓴 시인의 역량이 놀랍기만 하다.


관련기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