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3)맹동어른 황 집사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53)맹동어른 황 집사
  • 정재용 기자
  • 승인 2021.08.09 10:00
  • 댓글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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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을 흉사에 발 벗고 나서고
풍부한 예화로 지루할 겨를이 없었던 설교

마을 초입(初入)에 곤실댁이 있었다. 곤실댁 앞 울타리를 경계로 마을 앞에 버스를 댈 수 있는 마당이 있었다. 그 마당은 중동댁 논이었는데 자동댁이 집을 지어 살다가 마을 안쪽으로 이사하면서 중동댁 타작마당으로 쓰였다. 곤실댁 뒷집은 맹동댁이었다. 곤실댁에서 서쪽으로 한 집 건너에 학봉댁이 있었다. 중동댁, 곤실댁, 맹동댁, 학봉댁은 모두 황(黃)씨 집안의 친척 간이었다.

금산댁도 가까이 있었다. 금산댁 황일용 씨는 맹동댁 황봉룡 씨의 친형으로 읍내 안강제일교회의 장로였다. 이들을 비롯한 교인들은 주일이면 읍내에 나가 예배를 드리고 수요일 저녁에는 금산댁에 모였다.

소평교회의 태동이었다. 금산댁, 맹동댁, 맹포댁, 곤실댁, 덕동댁 등이 설립멤버였다. 1960년 4월 소평교회는 안강제일교회로부터 분립했다. 덕동댁 뒷밭에 초가삼간 크기의 예배당을 짓고 기와를 올렸다. 몇 년 후 금산댁은 경주로 이사를 하고 주로 맹동댁과 맹포댁이 교회 살림을 맡아서 했다. 맹동댁 구정순 집사는 맹포댁 구연암 집사의 누나였다. 명동댁과 명포댁으로 부르기도 했다.

소평교회는 예배 참석인원이 30명 정도였다. 사택이 없는 관계로 전도사는 주일 아침에 자전거를 타고 들어와서 저녁예배를 인도하고 돌아가고 식사는 집사가정이 돌아가면서 담당했다. 수요일에는 저녁을 먹고 들어와서 밤에 나갔다. 새벽기도회는 황봉룡 집사와 구연암 집사가 번갈아 인도하다가 나중에는 황 집사가 맡아서 했다. 비가 내리는 수요일 저녁도 황 집사 차지였다.

1979년 4월 새 예배당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왼쪽부터 임철조, 정둘선, 구정순, 황분조, 이분이, 김해수, 임필순, 엄일녀, 김순기, 뒷줄 왼쪽부터 구연암, 정응해, 황봉룡 집사, 신명철 전도사, 멀리 서 있는 이는 새깨댁이다. 정재용 기자
1979년 4월 새 예배당 건축공사가 한창이다. 왼쪽부터 임철조, 정둘선, 구정순, 황분조, 이분이, 김해수, 임필순, 엄일녀, 김순기, 뒷줄 왼쪽부터 구연암, 정응해, 황봉룡 집사, 신명철 전도사, 멀리 서 있는 이는 새깨댁이다. 정재용 기자

황 집사 설교는 늘 재밌었다. 구수한 입담에다 생활 속에서 겪은 우스운 얘기를 천연덕스럽게 해서 좌중을 웃겼다. 전도사의 설교 때 졸던 사람들도 황 집사가 하는 설교에는 귀를 쫑긋했다. 실컷 웃고 예배당을 나서면서 교인들은 “그런데 그 이야기는 왜 했지?”반문하기도 했다. 그 중에 몇 가지만 소개한다.

“어느 겨울아침 식사 때였다. 출입문 쪽에 앉아 있던 그에게 아버지가 숭늉을 떠 오라는 심부름을 시켰다. 추운 날씨에 솥뚜껑을 열자 김이 얼굴에 닿는 순간 추위가 녹으면서 콧물이 흘러 바가지 안에 떨어지고 말았다. 피할 새도 없었다. 그는 재빨리 한 손으로 떠냈다. 그리고 방으로 들어가서는 두 손으로 공손히 바가지를 건넸다. 아무 것도 모르는 어른들은 후후 불어가면서 ‘어, 시원하다’를 연발했다. 우습고도 미안해서 제대로 밥을 먹을 수가 없었다.”

“지옥에 들어가면 모든 사람들이 ‘껄 껄’ 하면서 돌아다닌다. ‘이럴 줄 알았으면 예수를 믿을 껄’ ‘부모님께 좀 더 효도 할 껄’ ‘도둑질하지 말 껄’ 등등으로 후회하는 소리다.”

그는 일본에서 오래 살았고 만주에도 다녀온 모양이었다. 설교 중에 뜬금없이 1부터 10까지 일본어로 세고 중국어로도 셌다. “이치, 니, 산, 시, 고, 로쿠…, 이, 얼, 산, 쓰, 우, 류, 치…” 교인들은 “또 센다”는 눈치를 나누며 싱긋 웃었다.

“한번은 농사일을 하다가 발등을 다쳤다. 대수롭잖게 생각하고 그냥 두었더니 아픈 부위가 벌겋게 부풀어 올랐다. 자꾸 발을 물에 담그고 물신(무논에 들어가서 일할 때 벗어지지 않도록 발목을 꽉 조이게 만든 고무신발)을 신고 한 탓에 성이 난(덧난) 것이었다. 병원에 가기 전에 일단 약으로 낫게 해보려고 ‘회춘당약방’에 가서 조고약(趙膏藥)을 사 왔다. 담뱃진처럼 생긴 고약이었다. 이튿날 돌가루포대(시멘트포대)를 떼 내 보니 그 자리가 소눈깔처럼 뻐끔하게 뚫려 있었다.”

고약을 바르고 그 위에 붙이는 누런 빛깔의 두꺼운 종이를 ‘돌가루포대’라고 불렀다. 시멘트를 ‘돌가루’라고 하고 포대(包袋)는 두 겹으로 돼 있었다. 교인들은 “소눈깔처럼”이라는 생동감 넘치는 표현에 폭소를 자아냈다. 이렇게 회(壞)가 빠지고 나면 상처 부위는 더 이상 곪지 않고 차차 생살이 돋아나서 채웠다.

그는 스스로 은혜 충만해서 “우리 주 만 믿으면 구원함을 얻으며 영생 복락 면류관 확실히 받겠네” 찬송을 한손으로 찬송가를 펼쳐들고 다른 팔은 위로 들어 춤을 추듯 좌우로 흔들며 노래했다.

황 집사를 비롯한 소평교회 교인들이 뜨겁게 신앙생활을 하게 된 것은 청천다락원 강정란 원장의 부흥회가 결정적이었다. 교회는 1969년 4월 21일부터 26일까지 강 원장을 강사로 부흥회를 개최했다. 기쁨에 충만한 교인들은 사도바울이 로마 교인들에게 보낸 편지의 “현재의 고난은 장차 우리에게 나타날 영광과 족히 비교할 수 없도다” 구절을 되뇌며 고된 농사일에 새 힘을 얻었다.

1982년 5월 9일 부활절 예배 후 재정위원으로서 헌금 계수를 하고 있는 황봉룡 집사(왼쪽)와 정응해 집사. 1991년 8월 23일 글래디스 태풍으로 모든 교회장부 및 서류는 유실됐다. 정재용 기자
1982년 5월 9일 부활절 예배 후 재정위원으로서 헌금 계수를 하고 있는 황봉룡 집사(왼쪽)와 정응해 집사. 1991년 8월 23일 글래디스 태풍으로 모든 교회장부 및 서류는 유실됐다. 정재용 기자

황 집사는 강단에 설 때면 옷차림은 언제나 한복에 두루마기로 단정하게 했다. 여름이면 모시한복에 모시두루마기였다. 열대야로 밤잠을 설쳤을 법한 새벽에도 그러했고 온종일 진흙 논에 들어가서 일을 하고도 언제 그랬나 싶게 말끔한 차림이었다. 전기가 없던 시절이라 예배당은 부채질과 희미한 남포 불빛이 전부였다. ‘호얏불’이라고도 했다.

앞도랑 물이 깡깡 얼면 소죽솥에 부어놓은 구정물이 얼고 펌프도 얼었다. 펌프가 얼지 않게 하려면 저녁에 종발(鐘鉢)을 들어 물을 내리고 물이 필요하면 마중물을 부어 길어 올려야 했다. 새벽기도회로 맹동댁 집 앞을 지날 때면 “철컥 철컥” 펌프질 소리가 요란했다. 그때도 한복에 두루마기 차림이었다.

그는 농부로서 부지런하고 마을에 초상이 났을 때 염(殮)을 도맡다시피 해서 인심 좋기로 소문이 났다. 안강 장날 그가 소달구지를 몰고 나서면 많은 사람들은 스스럼없이 타고 함께 장으로 갔다. 그는 노년에 고욤나무 열매를 먹은 것이 체해서 고생을 하다가 장남이 있는 서울로 가서 수술을 받았다. 그는 황수관 박사의 아버지였다. 마을사람들은 고욤을 “꾀양”이라고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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