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㉖심금을 울리던 예배당 종소리
[사라져 가는 것들] ‘소평마을’ 이야기 ㉖심금을 울리던 예배당 종소리
  • 정재용
  • 승인 2020.05.23 16:3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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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일 새벽과 주일 아침저녁 그리고 수요일 저녁에 울려
종소리에 맞춰 일하러 나가고

성탄절 아침, 소평교회 주일학교 아이들은 ‘탄일종이 땡땡땡’ 어린이 찬송가를 신나게 불렀다. “(1절) 탄일종이 땡땡땡 은은하게 들린다. 저 깊고 깊은 산골 오막살이에도 탄일종이 울린다. (2절) 탄일종이 땡땡땡 멀리멀리 퍼진다. 저 바닷가에 사는 어부들에게도 탄일종이 울린다. (3절) 탄일종이 땡땡땡 부드럽게 들린다. 주 사랑하는 아이 복을 주시려고 탄일종이 울린다.”

오소운 목사에 의하면, 이 노래가 처음 공식적으로 발표된 해는 1952년이며, 최봉춘(崔逢春, 1917~1998) 씨가 가사를 짓고 그의 남편 장수철(張壽哲, 1917~1966) 씨가 곡을 붙였다. “주는 나를 기르시는 목자” 찬송가도 이들 부부가 1956년에 만들었다. ‘학교종이 땡땡땡’ 동요는 1948년 김메리 씨가 작사 작곡했다.

천천히 울리는 예배당 종소리는 ‘땡땡땡’이 아니라 ‘댕그랑 댕그랑’이었다. 황소걸음처럼 느릿느릿 울렸다. 안 믿는 사람들은 ‘천당 만당’ 그런다고 했다. 종을 친다는 것은 무쇠 종 옆에 붙어있는 쇠바퀴를 일렁거리는 일이어서 그럴 수밖에 없었다. 쇠바퀴에 감겨서 길게 늘어뜨려진 로프를 당겼다가 풀었다가 하면 쇠바퀴는 이리저리 반 바퀴 씩 구르고 종은 앞뒤로 흔들거렸다. 그때마다 종 복판에 달려 있던 ‘종 불알’은 종 안쪽의 이쪽 면과 저쪽 면에 부딪쳐 종소리를 냈다. 이때 신난다고 로프를 세게 당겼다가 풀면 반동에 의해서 종은 한 바퀴 회전하고 로프는 쇠바퀴에 감겨 올라가서 덜렁거렸다. 일 년여 지나면 불알은 닳아있어서 새것으로 바꿔 달아야 했다.

한 차례 칠 때 몇 번 치느냐는 규정은 없었다. 보통 ‘댕그랑’ 소리가 스무 번 정도였다. 종탑 꼭대기의 뾰족 양철지붕은 주황색 페인트칠 덕분에 멀리서도 눈에 잘 띄었다. 종탑은 마을에서 가장 높은 건축물로 마을의 랜드마크(landmark)였다. 기계천 방천 둑에서 보이고 안강 기계 도로를 지나는 버스 안이나 양자동역으로 가는 기차 안에서도 보였다.

1975년 3월 소평교회, 종탑이 우뚝 서 있다. 뒷줄의 우측 네 번째가 강재덕 전도사이다. 정재용 기자
1975년 3월 소평교회, 종탑이 우뚝 서 있다. 뒷줄의 우측 네 번째가 강재덕 전도사, 뒷줄의 좌측 여섯 번째 재킷 입은 이가 김성우 집사이다. 정재용 기자

새벽기도회를 알리는 종은 4시 반에 울려서 5시에 예배를 시작했다. 종소리는 새벽 공기를 타고 하늘 높이 퍼져갔다. 들판 건너 안강제일교회 종소리, 육통교회 종소리도 앞서거니 뒤서거니 울렸다. 겨울 밤하늘엔 별이 총총하고 하현달빛은 서리 내린 들판에 교교했다. 어래산 쪽 멀리 육통교회 불빛이 켜졌다. 새벽기도회 가는 사람들은 칼바람에 옷깃을 여미고 종종걸음을 쳤다.

여름 장마 때는 앞도랑 물이 차올라 길을 덮기 일쑤였다. 물이 장딴지까지 올라올 때도 있었다. 바지를 둥둥 걷고 건너서 예배당에 도착해서는 펌프 물로 발을 씻었다. 예배당 안에서 양말을 신고 마룻바닥에 꿇어 엎드리면 “네 은혜가 네게 족하다”라는 주님의 음성이 들려오는 듯 했다.

종은 새벽기도회에 잘 나오는 여자 집사들이 당번을 정해서 쳤다. 종 당번은 교회에서 사 준 야광 자명종 탁상시계를 이어받는 것으로 시작됐다. 한 달씩이었다. 집에 시계가 들어오면 온 식구가 시계 덕을 볼 수 있어서 좋았다. 예배는 주일 낮 11시, 주일 저녁 7시 그리고 수요일 저녁 7시 반으로 그 때마다 종을 쳤다. 30분 전에는 초종 그 시각에는 재종이었다. 동화 ‘강아지 똥’으로 유명한 권정생(1937.9.10.~2007.5.17.) 선생도 안동 일직교회 종지기였다.

새벽기도회 때문에 예배당 종소리는 1년 365일 비가 오나 눈이 오나 정한 시각에 울려서 마을사람들의 공중시계 역할을 했다. 모내기철이면 품앗이를 가는 사람들은 새벽종소리에 맞춰 일어나서 이른 아침을 먹고 못자리로 나갔다. 아직 어둠이 가시지 않은 새벽에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며 모를 찌다(뽑다)보면 해가 돋고 모찌기가 끝나면 뜨끈한 멸치국물의 잔치국수가 새참으로 나왔다.

우측에 소평교회 뾰족 종탑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우측에 소평교회 뾰족 종탑이 보인다. 정재용 기자

수요일 저녁 무렵 들판에서 종소리를 들으면 ‘밀레의 만종’이 연상됐다. 종소리는 언제나 은은했다. 늦도록 정신없이 일하다가 ‘삼일기도회’ 종소리에 깜짝 놀라 부랴부랴 집으로 향했다. 얼굴과 손발을 씻고, 밥을 먹는 둥 마는 둥 예배당으로 쫓아가서 앉아 있으면 설교는 뒷전이고 졸음과의 전쟁이 시작됐다. 식곤증과 더불어 피곤이 한꺼번에 몰려오고 열린 창문으로 불어오는 산들바람이 자꾸 눈꺼풀을 쓸어내렸다. 허벅지를 꼬집어도 막무가내였다.

어쩌다가 종이 단음으로 ‘댕, 댕’ 울릴 때가 있었다. 조종(弔鐘)이었다. 교우가 소천(召天, 하늘의 부름을 받아 돌아간다는 뜻)되면 상주는 바로 예배당으로 와서 조종을 울렸다. 종을 울릴 때 ‘한번 울리고 한숨 죽이고’를 되풀이하면 ‘댕그랑’ 소리가 없는 조종이 됐다. 어느 해  농번기 가정실습으로 일손을 돕던 소년은 ‘모래골’ 논에서 보리 베기를 하다가 한낮에 조종 소리를 들었다. ‘덕동어른’으로 불리던 김덕근 집사의 소천이었다. 김덕근 집사는 목수로서 예배당을 지을 때와 목재 종탑을 세울 때 일을 도맡아서 했다. 김 집사는 장남 우중, 차남 성우 집사의 ‘삼부자 목수’로 인근에 이름을 날렸다. 목재 종탑은 나중에 철재로 교체됐다.

일제강점기 쇠붙이 공출 수난을 겪으면서도 울리던 종소리는 국민들의 생활형편이 나아지면서 ‘소음’으로 내몰리기 시작했다. 집집마다 시계가 있으니 더 이상 필요 없을 뿐 아니라 새벽잠 자는데 방해가 된다는 이유였다. 시골도 마찬가지였다. 한동안 차임벨이 종소리를 대신하던 때도 있었으나 얼마 못 가서 중단되고, 지금은 영혼의 깊은 곳을 울리던 무쇠 종은 기념으로 남겨 둔 교회를 찾아가야만 볼 수 있는 유물이 되고 말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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